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86화 (286/315)

# 286

286. 조심하긴 해야지 (1)

유대자본이 거칠게 휘두른 주먹에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었다. 그것도 만찬을 개최한 천중명과 먼 길을 날아온 우즈만, 마타르가 동시에 말이다.

거칠게 내려가던 주식 시장은 장을 마칠 무렵에 진정되었고, 요동치던 환율도 그럭저럭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여기에 원유 생산량마저 급격하게 변했다면?

“후-.”

이 정도로 끝난 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얻어맞은 것이 억울해 눈을 부라려야 하는 건지.

옅은 미소를 지은 천중명이 선물지수, 주가, 환율, 금값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책상에 놓인 휴대 전화기가 뜻밖의 이름을 액정에 올려놓은 채 울었다.

지금이 오후 3시인데?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고서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김준후입니다.

“그쪽이 새벽 2시쯤 되지 않았나요?”

- 그렇습니다, 회장님.

반 템포 늦게 들리는 김준후의 음성에서 피곤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만찬이 끝나면 적당한 시간에 전화하려던 참이었습니다.”

- 일이 있으면 언제고 전화 주시면 됩니다.

여유 있게 천중명의 뜻을 받은 김준후가 말을 이었다.

- 회장님. 오늘 주가와 선물, 환율, 금값이 출렁였습니다. 덕분에 이쪽도 꽤 요란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콩에서 미국 국채를 내놓았다고 들었거든요.”

- 조금 전에 나온 결과가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유대 자본이 알고리즘을 이용한 거래를 통해 시장을 흔들었습니다.

“인공지능 거래 말인가요?”

천중명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 그렇습니다, 회장님. 흔히들 인공지능 거래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이전보다 좀 더 발전된 프로그램 매매가 가능하다는 평가입니다.

천중명의 반문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김준후의 설명이 막힘없이 이어졌다.

- 인공지능을 이용한 거래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이쪽 금융가에서는 유명한 펀드 매니저마저 일자리를 잃을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두 명 정도를 남겨두고 모든 펀드 매니저를 해고한 금융사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거 봐?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데?

- 이전에 회장님께서 홍콩물고기 황채산을 상대하셨을 때, 프로그램 매매를 이용한 방법을 오늘 유대 자본이 꼭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긴 설명보다 조금 전에 김준후가 해준 말 한마디에 천중명은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 유대 자본은 채권 매도를 통해 30년물 이자율을 높였고, 이어서 달러를 강세로 바꿔서 매도를 조장했습니다. 그 결과 인공지능이 매도 주문을 쏟아내서 미국 선물지수 하락, 금리와 환율 변화, 한국의 증권시장 하락으로 이어진 겁니다.

“그렇군요.”

천중명은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지며 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우리는 홍콩물고기를 상대할 때 네가 사용한 방법을 알고 있다. 이제부터 그보다 더 강하고 완벽한 방법으로 너의 숨통을 조여주마.

마치 하늘 저 높은 곳에서 거대자본이라는 놈이 고개를 불쑥 내밀고는 천중명을 향해 으르렁대는 경고를 들은 것만 같았다.

- 비트코인은 조만간 무너질 겁니다. 한화로 2백조 원이 넘는 돈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옮겨 다녔습니다. 유대 자본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보시는 게 좋습니다.

“저들이 움직일 자금의 규모를 짐작하시나요?”

- 우리 돈으로 대략 5백조 원 수준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쪽의 헤지 펀드들은 한국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지 지켜봐야 하는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대강 보고는 끝났다.

- 회장님께서 준비할 수 있는 자금의 규모가 아랍의 투자금 240조 원, 지경그룹 전체의 유동성 자금 70조 원,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자금 20조 원이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뒤에 이어진 김준후의 말에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내 지갑을 다들 그렇게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습니까?”

- 저들의 지갑도 절반 이상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비트코인을 통해 옮겨 다닌 자금이 어디에서 불쑥 튀어나와 시장을 교란할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공포나 좌절 따위를 느끼지 못하고, 미래보다 현재의 수익에 충실하니까요.

“오늘 일이 경고 같은데 어떻습니까?”

- 분명한 경고입니다. 이것이 회장님을 향한 것이든,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든, 아니면 회장님과 한국을 도우려는 이들에게 주는 것이든, 경고는 분명해 보입니다.

설명이 길어지면서 잠시 멈칫하는 틈이 있었다.

- 회장님.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시느냐에 따라 헤지 펀드들의 움직임이 달라집니다. 이쪽의 헤지 펀드들은 승냥이 떼와 같습니다. 약해 보이는 쪽에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에 익숙해서 도움을 바라기는 어렵습니다.

승냥이라면 천중명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미국 쪽에 던져두어도 우두머리를 할 정도로 강한 놈으로다가.

박승양을 떠올린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눈이 확실히 맑아졌습니다.”

- 언제고 전화 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도움될 만한 금융회사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고생 부탁합니다.”

통화가 끝나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 회장님.

김준후가 나직하게 천중명을 불렀다.

- 이곳에서 회장님을 부를 때 이름 앞에 매드(미친, Mad)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천중명이 가볍게 웃었는데 김준후는 그러지 않았다.

- 최선을 다해 회장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런 뒤에 미친 회장을 따르겠다는 정신 나간 각오가 넘어왔다.

“고맙습니다. 또 연락하죠.”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숨을 길게 내쉬고 창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휴대 전화기를 들어 송문철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송문철입니다.

“알고리즘 거래가 있다는데 그와 관련한 자료가 있을까요? 거래를 대신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던데?”

- 우리 지경증권에도 이미 도입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준비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내부통신망으로 올려주세요.”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웃음 묻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대자본이라? 꼴통 회장의 뒤통수를 이렇게 때려놓고 마음 편히 잠이 오겠어?

따블로 되돌려줄 테니까 일단 기다려.

하늘은 아직 뜨거운 햇살에 색이 바랜 것처럼 녹색이었다.

**

오후의 중간이 지나자 박승양은 버릇처럼 남부증권에 도착했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불편한 얼굴로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얀 셔츠 아래로 배가 불룩 나온 문요양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종일 못마땅한 박승양과 비교되는 것처럼 문요양은 흐뭇한 얼굴이었다.

“주가가 폭락한 날에 증권사 회장이 뭐가 그렇게 좋아?”

“모르십니까?”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데?

박승양은 눈가를 좁힌 채 문요양을 바라보았다.

“이명선 과장이 오늘 제대로 사고 쳤습니다!”

“뭣이! 이명선 과장이? 왜? 놀부 목이라도 꺾었어?”

“놀부 목이요?”

“그건 됐고! 그래 무슨 사고를 쳤는데? 혹시?”

주가 폭락으로 계좌에 든 돈을 날려 먹었다면 문요양이 이렇게 히죽거리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이명선 과장이……?

“선물 풋 포지션과 풋옵션 풀배팅이었습니다.”

“푸, 푸, 푸, 풀배팅을?”

“아시다시피 저희는 딜링룸 규모가 작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근에 이명선 과장에게 거래액의 절반쯤을 맡겨두었는데…….”

“닥치고! 그래서 결과를 말해! 결과를!”

독하게 빛나는 박승양의 눈빛에 문요양은 퍼뜩 정신이 돌아온 얼굴이었다. 그는 배에서 끌어 올리듯 오른손을 들어서 검지부터 새끼까지 네 개의 손가락을 위로 뻗었다.

“네? 네? 네 배?”

살집이 퉁퉁하게 붙은 문요양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더니 삽시간에 환하게 웃는 얼굴로 변했다.

“그렇다면 내 계좌에 든 돈이?”

“2천억 원을 넣어두셨습니다.”

“왜? 왜 그것밖에 안 돼? 왜!”

“저축은행으로 가져가셔서…….”

“끄아-!”

천하의 박승양이 남부증권에 맡겨둔 본인 돈이 얼마인지를 모르겠나. 이럴 때 1조 원을 턱 넣어두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서 고함을 지른 거지.

홱!

고통에 몸을 비틀던 박승양이 퉁퉁한 멧돼지를 바라보는 살벌한 눈으로 느닷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남부증권 딜링룸은 얼마를 배팅했는데? 우리 이명선 과장이 얼마를 운용했냐고?”

문요양은 고개를 비튼 채 멈칫거렸다.

“빨리 말 안 해!”

남부증권 회장은 대답 대신 손가락 세 개를 위로 폈다.

“3백억?”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만 1천2백억 입금 잡았습니다! 매도 타이밍이 얼마나 좋았는지! 아까는 눈물이 나와서!”

8천억 원을 쥔 박승양이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1천2백억을 거둔 문요양을 바라보는 희한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명선은 고개를 반쯤 떨구어서 얼핏 보기에 기도하는 사람 같은 자세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누구의 지시도 없었다. 그저 매일 돌아가는 세상의 지표를 머리에 넣고 넣다 보니 어느 순간 딱 눈에 보이는 기회가 있었을 뿐이었다.

과감하게 배팅했고, 좋은 결과를 움켜쥐었다.

신기하지?

천중명 회장의 지시대로 해서 수익이 생겼을 때는 몸이 떨릴 정도로 감정이 흔들리고 눈물이 쏟아졌는데 지금은 덤덤하게 모니터를 바라볼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월말까지 이 수준을 유지해야 하지만 오늘 남부증권에서 올린 수익의 수당만 30억6천만 원이었다. 세금을 제하면 대략 20억쯤 현금이 생긴다.

20억 원이다. 20억 원.

이 남부증권 지점에서 수습직원 자리마저 VIP 고객의 조카 때문에 밀려날 뻔한 이명선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하루 거래액의 수당으로 20억 원을 버는 딜러가 되었다.

이명선에 관한 소문도 증권가에 돈다.

세상에 이렇게 선하게 생긴 이명선에게 붙은 별명이 파생거래의 독거미라니.

벌컥!

“이 과장! 오늘 대단한…….”

문을 열고 뛰어들어온 박승양이 멍한 이명선을 보고 눈을 몇 차례 끔벅인 다음이었다.

“회장니-임!”

어처구니없게도 그토록 덤덤하던 이명선이, 파생거래의 독거미가, 바보 같은 얼굴로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그! 놀부 목을 부러트릴 제비인 줄 알았더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봐?”

“흐으. 흐으으.”

큰아들 보다 두 살 어린 이명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매달리자 박승양은 엄한 아버지가 애교부리는 딸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등을 다독여주었다.

“잘했다. 우리 이명선 과장이 언젠가 해낼 줄 알았지.”

그가 다독여준 덕분인지 이명선이 벌겋게 변한 눈을 하고는 어색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회장님께서 이 과장을 택한 게 이래서였구만.”

“예?”

“아냐. 시간 괜찮으면 가자. 내가, 아니지! 여기 문 회장이 소갈비 쏜다고 거품 물더라. 수당 확실히 챙겨! 수당!”

뭔가를 알아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박승양이 먼저 몸을 돌렸다.

**

낮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만찬의 분위기는 어쩐지 한풀 꺾인 느낌이었다. 그렇더라도 기자들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에서 천중명은 환영인사를 정식으로 전했고, 건배를 제의했다.

답사는 우즈만과 마타르의 순이었는데 더도 덜할 것 없는 적당한 수준에서 끝났다.

천중명과 우즈만, 마타르가 한 테이블, 천상기와 유진교, 카리프,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두 명이 한 테이블, 다른 임원들이 테이블 세 개에 나눠 앉았다.

“천 회장님. 우리는 오늘 밤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천 회장이 베풀어준 만찬에 답하는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그것이 우리 전부를 위해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식사의 끝에서 우즈만이 조심스럽게 건넨 말을 통역이 빠르게 전달해주었다.

“이란과 이라크에서 석유 생산을 줄이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가서 만나봐야 확실히 알게 되겠지만, 오늘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바로 오늘 낮에 천중명이 염려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즈만은 헤어짐이 아쉬운, 마치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형처럼 다정한 눈빛과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우리는 그저 석유를 팔아 돈이 많을 뿐입니다. 굉장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세상사에 그리 밝지도 못합니다. 그런 이유로 세계 곳곳에서 우리 돈을 노리고 달려옵니다.”

마타르가 같은 생각이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사람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강한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힘겨운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통역이 말을 전하도록 기다린 우즈만이 옅은 미소와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전한 무기를 올바르게 사용해서 저들의 탐욕을 꺾어주길 바랍니다. 그런 뒤에 우리 후손들이 적어도 지금처럼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기를 희망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즈만 왕세자.”

“신께 우리 천 회장의 승리를 기도하겠소. 그리고…….”

우즈만이 시선을 돌리자 수행원이 가로 길이 45센티미터쯤 되는 직사각형의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내가 우리 천 회장에게 드리는 증표입니다.”

수행원이 뚜껑을 열자 반달처럼 휜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빛나는 칼집과 손잡이만 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천 회장님. 칼을 나눈다는 것은 우즈만 왕세자가 천 회장님을 형제로 대하겠다는 뜻입니다.”

마타르가 전한 의미를 들은 천중명이 우즈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이 끝나면 내가 초대하겠습니다. 그때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도록 하지요.”

“반드시 찾아뵙겠습니다.”

“이왕이면 수익을 얻어서 와주면 더 좋습니다.”

우즈만의 넉넉한 농담에 천중명과 마타르가 함께 미소를 그려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