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285. 내 마지막 퍼즐이니까 (2)
천상기와의 면담을 마친 천중명은 책상으로 옮겨가 결재서류를 살폈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회장님. 실무 협상 전에 카리프 부청장이 유진교 부회장과 함께 인사를 드리고 싶답니다.”
노크와 함께 들어온 부속실 직원의 보고가 있었다.
“지금 만날 테니까 올라오라고 하지.”
결재서류를 덮은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해 섰다. 유진교와 카리프가 도착할 때까지 얻은 짧은 여유를 뜨거운 느낌의 햇살이 어른대는 오전이었다.
사는 건 참 희한하다.
어쩌면 오너 출신의 영향력에, 시행사와 저축은행을 함께했던 천상기까지 필요한 순간에 옆에 있는 건지. 더구나 마음을 고쳐먹은 다음에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능력 있는 사람이야 주변에 많다. 그러나 그토록 어울리는 사람을 구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천중명은 눈살을 좁힌 채 녹색으로 변해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서 이 일을 꾸민 누군가가 있다면 꼭 묻고 싶었다. 이렇게 도와줄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거대 자본을 막아 주지 그랬냐고 말이다.
그랬으면 고통받는 사람들이 훨씬 줄었을 텐데…….
“회장님?”
그때 천중명의 생각을 자르는 것처럼 유진교의 음성이 들렸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마타르가 그러더니 카리프 역시 어색한 우리말로 인사를 전했다. 악수를 나눈 천중명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통역을 부르지 않은 채로 나누는 안부 수준의 담소였다.
이 정도 영어야 천중명도 편안하게 구사한다.
커피와 한과를 앞에 두고 10분쯤 그렇게 한국의 인상과 고생 많다는 이야기를 나눈 뒤에 유진교와 카리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리프 부청장. 거래는 항상 공정해야 하고 그런 거래가 오래간다고 생각해. 사소한 마찰에도 늘 계약서를 먼저 들추는 법이니까 귀찮더라도 꼼꼼하게 부탁해요.”
“잊지 않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소를 그려낸 카리프가 고개를 숙인 뒤에 유진교를 따라 움직였다. 240조 원이나 되는 투자를 며칠 사이에 결정하고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협상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전쟁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했다.
먼저 적을 상대하는 지경에게 미사일 24기를 빌려준다고 생각하면 딱 맞을 투자이기도 했다.
오늘 협상이 끝나면 이제 남은 준비는 한 가지였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엄청난 변화가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책상으로 옮겨간 천중명은 마우스를 움직여 상황을 살폈다.
원·달러환율은 또 7원 올라서 1289를 기록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주 금리 인상 시기에는 당연하게 1300선을 넘어가게 된다.
수출하는 업체는 좋지 않냐고?
당장 유학비용과 기타 해외로 송금해야 하는 가정과 중소기업이 먼저 충격을 받고, 다음으로 원자재를 사와야 하는 대기업이 고통에 신음하게 된다.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천중명은 숫자를 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현명하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답이 바뀌는 문제였다.
생각을 털어낸 천중명이 결재서류를 펼쳤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바로 옆에 두었던 휴대 전화기가 황성규의 이름을 올려둔 채 울었다.
“여보세요?”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홍콩에서 대규모 미국 국채가 시장에 나왔습니다. 대략 한화로 100조 수준입니다.
예상보다 워낙 빠른 움직임이어서 천중명은 얼른 마우스를 움직여 주식과 환율을 살폈다.
- 금리를 큰 폭으로 내리라고 미국을 협박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30년물 채권 가격이 요동치고, 나스닥 선물지수 폭락, 이어서 현재 코스피 주가도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긴 한데 각오했던 일이니까요. 다른 내용이 생기면 계속 알려주세요.”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빠르게 모니터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와 전혀 다르게 주가가 아래로 처박히고 있었다. 코스피 선물지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지금이라도 지경에 대한 투자를 취소하고 돌아가라.
저녁의 만찬을 앞두고 마타르 청장과 우즈만 왕세자에게 전하는 경고처럼 보였다.
천중명은 모니터를 보며 같잖다는 듯 픽 웃었다.
**
마타르와 우즈만은 호텔로 찾아오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국회의원들의 면담 요청을 모두 거절한 채 특실의 중앙에 마련된 거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청장의 말씀대로 천 회장은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더군요.”
흰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우즈만이 넉넉한 미소와 함께 천중명에 대한 평가를 꺼냈다.
“수십조 원의 돈을 벌 기회가 있는데 그걸 마다하는 사람이 있다니. 탐욕에 절어 유대 자본의 손을 잡으려던 왕손들과 비교하자니 부끄럽고 민망해서 얼굴을 들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왕세자님은 그래도 일찍 그 일을 막아내지 않으셨습니까? 저야말로 천 회장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제 겨우 왕손들의 탐욕을 알아챘을 겁니다.”
“천 회장은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탐욕이나 불의에 전혀 타협하지 않는 무서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타르의 덧붙인 말에 우즈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였다.
“유대 자본이 얼마나 투입할 거라고 보십니까?”
마타르가 건넨 질문에 우즈만은 먼저 알 듯 말 듯 한 미소로 먼저 답을 대신했다.
“중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라고 봅니다. 우리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손들이 가진 재산을 모두 합하면 대략 7백조 원 정도 됩니다. 아랍에미리트가 5백조 원 정도 되지요?”
마타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들이 우리의 왕손들을 꼬드겨 한국을 노리려 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국을 통해서 자금을 불린 뒤에 아랍을 노렸겠지요. 그러니 이번에 유대 자본은 한화로 5백조 원까지 투입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마타르가 ‘그 정도까지?’하는 눈으로 우즈만을 바라본 다음이었다.
“한국은 그 정도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의 대응입니다. 240조 원의 무기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가 무너진다면 우리는 240조 원이라는 무기를 유대 자본에 스스로 넘길 꼴이 되니까요.”
“흠.”
“마타르 청장. 우리 아랍 세계는 석유가 고갈된 이후의 삶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다시 낙타를 타며 살아가지 않도록 현재 가진 자금으로 다음 대를 준비해야 하지요. 나는 지경이 그 역할을 해줄 거라 믿습니다.”
“한번 본 그를 그 정도로 신뢰하십니까?”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마타르가 건넨 질문에 우즈만이 만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눈은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정직한 눈을 가진 사람은 신뢰할 수 있지요.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정직하고 강한 눈을 만날 때마다 그 바람을 향해 씨를 뿌릴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소원을 안고 말입니다.”
우즈만이 특유의 넉넉한 음성으로 대꾸를 내놓은 뒤에 찻잔을 집었을 때였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두 명의 남자가 각각 우즈만과 마타르에게 상체를 기울여 귓가에 뭔가를 전했다.
“흐음.”
말은 필요 없었다.
우즈만을 바라본 마타르가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상황을 판단하기에는 충분했다.
**
오늘 박승양의 눈빛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출근까지는 기분 좋았던 그가 이곳저곳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회장님. 이번 건도 뒤로 미룹니까?”
“미루는 게 아니라 거절이라고! 거절!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전부 거절이라니까!”
김도정이 들고 온 결재판을 펼치기도 전에 박승양은 독한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은 대출은 전부 중단하라고!”
“그게 아니라 여신을 그렇게 묶으면 수익은……?”
슬며시 의견을 내놓던 김도정 상무가 박승양의 독한 눈빛을 받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명동하고 대치동 사채 바닥 대출 금리가 얼마야?”
“예?”
“사채 바닥 금리! 그것도 모르고 저축은행의 상무 자리에 앉아 있어?”
“담보 12퍼센트, 신용 22퍼센트였습니다.”
김도정의 답을 들은 박승양이 혀를 쯧쯧쯧, 찼다.
“그게 조금 전에 싹 바뀌었어. 담보만 취급하는데 24퍼센트로 바뀌었다고.”
“예에?”
“이건 무슨 놀라는 인형도 아니고! 냄새를 맡은 거지. 조만간 일 터진다. 뭔지 모르지만, 현재 이자율이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큰일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정신 바싹 차려. 알았어?”
“예, 회장님.”
“아니다! 내가 내 눈으로 돌아다니면서 다그쳐야 마음이 놓이지. 공연히 아는 놈이니 뭐니 해서 대출 내놓는 직원이 있으면 아예 기표한 손가락을 다 잘라버릴 테니까, 얼른 앞장서!”
그렇게 박승양은 고향 같은 한알저축은행을 나섰다.
“우선 지경저축은행으로 모시겠습니다.”
운전도 하고, 비서 역할도 하고, 결재도 올리는 만능 상무 김도정이 얼른 운전석에 앉았다.
“지경그룹에서 투자도 받고 분위기가 좋은데 갑자기 사채 쪽에서 왜 금리를 올렸을까요?”
그렇게 출발해서 신호를 받은 김도정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슬쩍 질문을 내놓았다. 일찍 점심을 먹으러 나온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인도를 걷는 시간이었다.
“저기 회사신분증 목에 걸고 밥 먹으러 가는 사람들 잘 봐둬.”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린 김도정이 인도에 있는 직장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얀 셔츠 차림의 남자들이 목에 걸린 신분증을 왼쪽 주머니에 넣은 채 걷고 있었다.
“지금 명동과 대치동의 사채가 다시 제자리로 가면 저 사람들은 다음 주에도 저렇게 웃으며 밥을 먹을 테고, 만약 지금 상태로 2주일 이상 가면…….”
박승양의 침묵이 김도정의 숨통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이 상태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독촉했다.
“이전에 IMF 사태에서 그랬지. 느닷없이 명동 사채 이자율이 치솟고 꼭 일주일 뒤에 일이 터졌거든. 후! 이걸 알아채시다니 회장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네.”
“예?”
“신호 바뀌었잖아!”
어떤 경우에도 여유만만이던 박승양이 날카롭기가 면도날처럼 변해 있었다. 당황한 김도정이 급하게 차를 운전했는데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
모니터를 확인하던 주인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벤처사업부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먼저 지원 방법과 규모에 대한 문의가 부쩍 늘어났다. 게다가 이미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선 업체의 문의가 연달아 이어지는 것도 평소에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지?’
주인영은 포털에서 경제뉴스와 속보들을 살폈다.
오늘의 메인 경제 보도를 꼽으라면 확실히 지경그룹을 방문한 우즈만과 마타르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도 거대한 규모의 투자가 예상된다, 혹은 모두가 놀란 특별한 발표가 임박했다는 등의 좋은 내용이 전부였다.
“어, 이게 뭐야?”
뜻밖에도 주가가 급락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속보의 끝에 미국의 금리 인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는 간단한 평이 전부였다. 10분쯤 내용을 살피는 동안에도 사무실 전화는 계속 울었다.
“예, 사장님. 그렇지는 않습니다. 타 기관에서 지원받은 경우에도 기술력 평가가 선행되어야 추가지원이 가능합니다.”
갑자기 늘어난 문의 내용은 대개 비슷했다.
이미 사업을 진행해서 성과를 거두었는데 운영자금을 지원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이건 좀 확실히 이상한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나?
곽대출 본부장의 방을 돌아보았던 주인영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유조차 모른 채 본부장에게 보고할 말이 없어서였다.
휴대 전화기를 든 곽대출은 책상에서 일어나 문을 살폈다.
“혼자 있습니다.”
- 오늘 갑자기 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가가 급락하고, 환율이 널뛰고 있거든. 생각보다 빨리 왔다. 신호탄은 다음 주에 있을 금리 인상인 것 같다.
뭔가 모를 위험이 스멀스멀 목덜미를 움켜쥐는 느낌에 곽대출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 벤처사업부로 자금 지원 요청이 밀려들 거다. 금리 인상 때까지는 우선 현 상태를 유지해. 만약 실제로 거대 자본의 공격이 확실하다면 유망한 기업체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을 지원하는 게 벤처사업부의 역할이다.
“예, 회장님.”
- 명심해. 최소한의 금액을 지원하는 거야. 이번 고비만 넘기면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과 잠재력 있는 기업.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곽대출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벤처사업부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경그룹에 들어온 이후로 이렇게까지 굳은 천중명의 음성을 처음 들었다.
우선 맡은 일을 하나씩! 제대로!
휴대 전화기를 움켜쥔 곽대출이 문을 열었다.
“주인영 부장. 잠깐 들어와.”
“예, 본부장님.”
그 짧은 대화를 하는 사이에 곽대출은 사무실의 분위기가 출근 때와는 또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뭐가 이렇게 홱홱 바뀌지?
곽대출은 살면서 돈과 금리의 움직임이 이렇게 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앉아.”
곽대출은 책상 앞에 주인영을 앉게 한 뒤에 지금 있었던 천중명의 지시를 전해주었다.
“다음 주에 미국 금리가 인상되면 그때부터 어려운 기업이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일이 밀려들 텐데.”
길지 않은 내용이라 곽대출의 설명은 바로 끝났다.
“정말 위기가 오나요, 본부장님?”
“회장님 말씀대로라면 아마…….”
아직 어떤 위험인지 실감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곽대출과 주인영은 서로 마주 본 채로 나직한 숨만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