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284. 내 마지막 퍼즐이니까 (1)
얼결에 들은 투자금의 규모에 당황했던 민세조는 곧바로 원래의 눈매를 되찾았다.
“회장님. 기업은 이익을 위해 움직입니다. 거대자본을 상대하는 대신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으십니까? 제 말씀은 그러니까 국책사업 독점 같은 특혜 같은…….”
천중명의 옅은 미소를 확인한 민세조가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죄송합니다. 예를 든다는 것이 회장님을 무시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당국의 협조입니다. 정보를 건네드리면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적극적 대응, 일반적인 대응, 방관, 이 세 가지 기준으로 정확하게 알려주세요.”
민세조는 마치 천중명의 말을 고스란히 머릿속에 새겨넣는 것처럼 보였다.
“저축은행과 대부업의 대출 규모를 늘릴 생각입니다. 외환 투자, 가계 대출, 자산유동화증권까지, 정부에서 보기에 염려되는 거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미 계획이 완성되어 있으시군요.”
“큰 틀일 뿐입니다. 나머지는 상황의 변화와 저들의 움직임에 따라 차례로 대응할 예정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게 전부입니까?”
“이후의 상황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수석께 말씀드리고 협조를 구하겠습니다.”
이해한다는 듯 민세조는 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우선 말씀해주신 내용을 보고하고 그에 대한 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내용은 그 뒤에 의논하기로 하시죠.”
돌솥은 이미 식어 있었다. 이제 와서 굳이 누룽지를 먹을 것도 아니어서 저녁은 그렇게 끝났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곧 다시 보게 된다. 그것도 며칠 사이에.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시죠.”
천중명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세조는 함께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여러모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마지막으로 인사를 마무리한 천중명이 먼저 식당을 나섰다. 처음 이 방까지 안내했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
황성규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족한 미소를 그려냈다.
그가 서 있는 책상 앞에 앉은 컴퓨터 전문가인 문상훈 역시 밥값을 해냈다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진짜 운이 좋았습니다. 진광효가 느닷없이 거래처를 바꾸는 바람에 인아웃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일본 쪽 정보까지 이렇게 얻어낼 줄은 몰랐습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문상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중국 쪽에서 왜 갑자기 거래처를 바꾸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이제 확실히 회장님의 지시대로 일이 되는 거지?”
“이제부터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됩니다. 일본의 거래소, 쇼더앤톨먼과 중국 진광효의 거래 계좌 여섯 개, 모두 완벽하게 파악했고 해킹 가능합니다. 이걸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합니다.”
“그럼 회장님께 보고드린다?”
질문을 받은 문상훈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좋아. 태블릿 PC에 옮겨.”
“예, 팀장님.”
황성규의 지시에 문상훈이 시원하게 답을 내놓았다.
시간을 확인한 황성규는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문자를 입력했다.
[황성규입니다. 말씀하신 정보를 모두 확인했고, 지시하신 일들을 처리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가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삼성동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벤처사업부에서 잠깐 볼까 하는데 시간 어떠세요?]
천중명으로부터 답이 있었다.
[20분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9시에 보죠.]
문자를 마친 황성규는 편안한 재킷과 등에 메는 가방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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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중명이 벤처사업부의 옥상에 도착한 시간은 황성규와의 약속보다 대략 10분쯤 먼저였다.
“회장님, 우리 회장님. 커피입니다.”
“왜 그래?”
“박승양 회장 흉내 한 번 내봤습니다.”
곽대출의 넉살에 실없이 웃은 천중명이 종이컵을 받았다.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의 천중명 옆으로 비슷한 복장의 곽대출이 편안하게 앉았다.
“상처는 괜찮냐?”
셔츠 안에 붙인 거즈를 내려다보았던 곽대출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눈매를 좁혔다.
“그 새끼들, 눈알을 파버렸어야 하는데!”
“적당히 해.”
천중명의 말에 곽대출이 “큼!”하고 장난처럼 대항했을 때였다.
옥상문을 통해 황성규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본부장님?”
셋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눈 다음이었다. 커피를 준비해 준 곽대출이 눈치껏 아래로 내려갔다.
“회장님. 자료를 먼저 보십시오.”
뭔가 빨리 알려주고 싶었는지 벤치에 앉기 무섭게 황성규는 태블릿 PC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이것들이 진광효가 관리하는 계좌 여섯 개입니다. 그 외에 류서열 거양자동차 회장과 일본의 거래소 거래 내역, 쇼더앤톨먼이 거래한 흔적도 분명하게 확보했습니다.”
천중명의 옆자리에 앉은 황성규가 검지로 자료를 넘겨 가며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운도 따랐습니다. 진광효 삼합회 총재가 느닷없이 거래처를 홍콩으로 옮기는 바람에 지금 보고드린 거래소와 계좌를 모두 해킹할 수 있었습니다.”
황성규가 넘겨주는 태블릿 PC를 받은 천중명은 잠시 내용을 살폈다. 정확하게 이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양서평과 조양회를 보낸 목적은 충분히 얻은 모양새였다.
“혹시 진광효가 계좌를 옮긴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양서평 부총재와 조양회 대표가 진광효를 찾아간 것은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 떠보는 듯한 황성규의 질문을 천중명은 적당하게 받았다. 그런 뒤에 시선을 들고는 태블릿 PC를 돌려주었다.
“일본에 있는 이 계좌도 해킹할 수 있을까요?”
“예, 회장님. 원하시는 곳으로 얼마든지 옮길 수 있습니다.”
“추적은요?”
“비트코인은 한번 털리면 끝입니다.”
보고를 들은 천중명이 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아챈 것처럼 황성규가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죠. 이렇게 결정적인 무기를 만들어주셨는데.”
“최근에야 우리 팀만으로 거대자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었는지를 매일 깨닫습니다. 만약, 회장님을 못 만났다면 아마 지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있었을 겁니다.”
천중명이 돌려준 태블릿 PC를 가방에 넣은 황성규가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저와 우리 팀원 모두의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인사가 너무 빠른데요? 아직 일이 많이 남았거든요.”
픽 웃은 천중명은 고개를 돌려 탄천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정말 열심히 삽니다. 그러다가 인생이 만든 함정에 빠져 길을 잃을 때도 있죠. 욕심을 내서 일을 키우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너무 믿었다든가.”
어쩌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황성규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런 거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는 것이 그런 거니까요. 그러나 인위적으로 위험을 만들어서 그 대가로 부를 가져가려는 이들이 있다면 막아내야죠.”
고개를 돌린 천중명은 질문과 동시에 황성규에게 시선을 주었다.
“막아내기만 하실 겁니까?”
황성규의 질문에 대한 천중명의 답은 재미있다는 투의 웃음이었다.
“전 세계에서 10위를 오르내리는 능력을 지니고도, 정작 우리나라는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 채 눈치 보며 살았습니다. 이제 보여줘야죠.”
그렇구나 하며 말을 듣던 황성규가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여운이 있는 말처럼 들린 탓이었다.
“저녁 어떻게 하셨어요? 대충 먹었더니 출출해서 곽 본부장과 국수 한 그릇 하러 갈까 하는데요.”
“회장님께서 그런 메뉴를 말씀하시면 어쩐지 잘 안 어울립니다.”
“그런가요? 그럼 좀 더 편안해 보이도록 해야겠는데요?”
“제가 방해되지는 않으십니까?”
“국숫값 정도는 괜찮습니다.”
천중명의 농담에 웃던 황성규가 정말 궁금한 눈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회장님. 최근 뵙던 모습 중에 가장 여유 있어 보이시는데 좋은 일 있으십니까?”
“황 선생님이 지금 보고해준 내용 덕분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가 아쉬웠는데 해결됐거든요. 가세요. 국수 두 그릇까지 책임집니다.”
재킷을 집어 드는 천중명을 따라 황성규가 가방을 둘러멨다. 건너편의 종합운동장이 탄천을 지나 이쪽 옥상을 지켜보는 밤이었다.
**
모두가 바쁠 하루가 밝았다.
특히 그룹발전본부는 긴장이 지나쳐서 날이 팽팽하게 서 있을 정도였다. 기획실과 홍보실이 움직이며 만찬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어차피 그 모든 내용이 올라와 모이는 곳이 유진교의 책상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요한 날이라고 사건, 사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층을 사용하는 천상기 역시 밀려드는 일에 짜증이 잔뜩 올라온 얼굴로 결재서류를 펼쳤다. 이래놓고 저녁에 만찬장에 나오란다. 그러니 어떡해서든 짬을 만들어서 실무진 협상 내용도 파악해야겠는데 지경신문고에는 또 연달아 붉은색으로 표시된 메일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것들이 정말!”
굴뚝을 올라간 이후로, 지경티티엠, 충주병원 방문을 계기로 천중명의 그쪽 포지션이 자연스럽게 천상기에게 넘어왔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천중명이 가더니, 막말을 시원시원하게 퍼붓는 천상기가 그 자리에 나타난 꼴이었다.
그런 천상기가 연필을 들고 결재서류를 들여다보다가는 이를 뿌드득 악물었다.
시행사를 관리하면서 돈 빼먹는 거 누구보다 확실히 아는 사람이 천상기이고, 저축은행을 거쳐 부티크까지 운영하느라 돈의 흐름 역시 척하면 착,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결재서류에 밑줄 그은 부분과 내부통신망에 올라온 세부 계획서, 회의록을 모두 살핀 천상기가 연필을 움직였다.
[너는 죽었어.]
그런 뒤에 마지막에 감정까지 적어넣는 꼼꼼함을 보였다.
천중명이 하던 메모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는데 아무튼 천상기는 그렇게 일을 해결했다. 대충대충, 적당하게 넘어갈 수도 없다. 이렇게 결재한 내용이 모두 보고서로 동생회장에게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다음 결재판을 펼친 천상기는 내부통신망에서 해당 자료를 찾아놓았다.
‘이거 진짜 훈련인데?’
그러면서 그는 잠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표현이 좀 이상하기는 한데, 이건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시키는 경영훈련과 비슷하지 않은가 말이다.
천중명도 자식이 생기겠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천상기 역시 그럴 테고.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도 서로 회장 하겠답시고 죽고 죽이려 드는 판국에 계열사 절반을 뭉턱 천상기에게 맡겨서 어쩌려고 하는 건지.
천상기가 불편한 눈으로 모니터를 노려볼 때였다.
똑똑똑.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부속실 직원이 들어와 조심스럽게 내용을 전했다.
그 정도로 지금 천상기의 눈에는 독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천중명은 집무실에 들어서는 천상기를 보며 픽 웃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날카로워?”
“아침에 올라온 결재서류 때문에 그래. 지경신문고도 마찬가지고. 아직도 회식 강요하는 인간에, 공금 함부로 쓰는 간부들이 나온다는 게 이해가 안 가네.”
“앉아. 커피?”
고개를 끄덕이려던 천상기가 아차 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얘기할게.”
“갑자기 착한 척은? 얼른 앉아.”
인터폰을 누른 천중명은 커피를 부탁한 뒤에 소파로 움직여 상석에 앉았다.
“다음 주에 금리가 오르는 건 알지?”
천상기가 의아한 시선을 돌렸을 때 부속실 직원이 들어와 커피를 놓아주고 나갔다.
“마셔.”
천중명은 천상기에게 권하고는 먼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뒤에 그가 커피를 마실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었다.
“오늘 오전 실무자 협상에서 나온 결과를 오후 만찬에서 발표하고 나면 바로 리츠 설립에 들어갈 생각이야.”
“리츠를? 부동산 회사?”
천상기의 질문을 받은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행사 해서 잘 알지? 우리는 지분형과 부채형을 모두 취급할 거니까 그거 맡아.”
“내가?”
“여기 둘밖에 없는데 그럼 누가 해?”
놀라움 뒤에 이어진 천상기의 반응은 당황함과 억울함이었다.
“나한테 왜 이래, 진짜!”
불뚝거리는 천상기를 보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지금 눈앞에 앉은 천상기의 모습은 꼭 천호득이 심통 났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솔직히 나는 갑수와 애들 데리고 구급대! 그래, 그거 하면서 섬에도 놀러 가서 웃고…….”
“정말 그걸로 만족해?”
말을 뚝 자르며 던진 천중명의 시선을 천상기는 피하지 않았다.
“그 근성과 강단에 그것만 가지고 만족하면서 살 수 있어? 내게 눌려서 포기하기는 했지만, 해보고 싶잖아.”
잠시 천중명을 똑바로 보던 천상기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시선을 떨궜다.
“동생회장님. 내 과거의 추한 모습에 비해 죽지 않고 섬에 간 거, 그곳에서 갑수 만나 깨달을 수 있었던 게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아.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사람 쉽게 안 변한다.”
시선을 다시 든 천상기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를 알고 난 뒤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기억하지? 돌아가신 형님 밑에 있을 때, 강 이사장과 손잡았을 때, 용인에 있을 때도. 나 원래 그런 놈이야. 털어내고 아닌 척 살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지만, 기회가 생기면 언제고 동생회장님 뒤를 노릴지 모를 그런 놈이라고.”
덤덤한 독백 같은, 그러나 아픈 천상기의 말이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천중명의 집무실에 흘러나왔다.
“지금은 분명히 그런 마음 없어. 그런데 나란 놈은 그렇게 생겨 먹었어. 그러니까…….”
“판단 한번 잘못하면 1조, 2조의 돈이 날아가. 돈이 피처럼 아깝고 아쉬운 순간이 올 텐데 그때 부동산에 관한 냉정한 판단과 지시를 내릴 사람이 필요해.”
“지경그룹에 그런 사람 많잖아. 당장 박승양 회장도 있고.”
“다들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리고 거래를 하라는 게 아냐. 부동산 거래에 닳고 닳은 사람들을 다부지게 관리하라는 거지.”
“감정 평가라는 게 있어. 공시지가도 있고.”
“그런 거 전혀 쓸모없는 순간이 코앞에 있어.”
천중명의 마지막 말에 천상기가 고개를 틀며 멍하니 있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진짜!”
“내 마지막 퍼즐이니까.”
그리고 그가 던진 질문에 천중명은 곧바로 답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