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83화 (283/315)

# 283

283. 천 회장이 우리의 힘을 이용해 (4)

양서평은 머리 회전이 느렸고, 조양회는 기가 꺾여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긴, 양서평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면 벌써 가등섭을 누르고 2인자의 위치에 있었을 텐데 타고난 머리를 또 어쩌겠나.

“이유도 모르고 내게 제안을 전했나?”

진광효가 비웃음이 가득 묻은 질문을 재차 던진 다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유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습니다.”

양서평이 우직한 성격다운 답을 내놓았다.

답을 들은 진광효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조양회의 눈을 강제로 벌리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눈빛이나 표정을 읽히지 마.

독한 진광효의 눈빛 앞에서 조양회는 최대한 묵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경그룹의 천 회장은 총재님과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등섭 부총재의 문제도 총재님께 해결책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대송자동차의 영업을 개시하고, 가등섭을 제거한 것으로 보상을 충분히 가져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양자동차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중국은 국제적인 망신을 사게 됩니다.”

“흥! 우리는 이미 내수시장만으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수준이다. 그깟 아이들 장난 같은 거래야 거양을 정부 관리업체로 돌리면 끝이야.”

말을 마친 진광효가 뒤로 펼쳐진 정원을 향해 상체를 돌렸다. 그런데도 양서평과 조양회는 고개를 떨군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진광효가 뒤에 있는 유리를 통해 두 사람을 살피고 있다는 것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어설프게 시선을 교환한다거나 엉뚱한 짓을 하면?

인공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이 저녁 식사로 양서평과 조양회 중 누굴 먹을지 고민하는 식단이 완성된다.

“우리가 거래하는 비트코인이 어떤 수준인지는 아나?”

“저는 모릅니다.”

“1코인당 한화 1천만 원으로 계산했을 때, 시가총액이 2백조 원이다. 상승이든 하락이든 우리 마음대로지. 그러니 비트코인 채굴과 거래를 중단을 원한다면 하루에 1조 원을 원한다고 전해.”

“예, 총재님.”

양서평이 고개를 숙여 답하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다. 아직 찻잔에 손도 못 댔고, 필요하다면 1조 원을 해외 계좌로 만들어주겠다는 제안 따위 꺼내지도 못했다.

“그만 돌아가.”

진광효의 지시에 양서평과 조양회가 함께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는 문을 나섰다.

달각.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였다.

“한국의 그 경영인은 확실히 빨라. 우리가 비트코인을 통해 거래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경고인가? 저 멍청이 둘은 감히 내게 경고를 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달려온 게고.”

야비한 웃음을 픽 쏟아낸 진광효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가등섭이 없는 상태에서 양서평까지 죽이면 삼합회가 비틀거릴 거라는 것을 계산해서 보냈다고 하면 그 젊은 회장이 너무 무섭잖아? 설마 이것까지 생각해서 가등섭을 죽였나? 흥! 죽었던 제갈공명이 살아온 것도 아닐 텐데…….”

주변에 서 있는 조직원들을 향한 것인지, 정원을 향해 하는 말인지 의미를 알기 어려운 혼잣말을 지껄인 그는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채굴장에 갈 테니 류서열 거양자동차 회장을 그리 오라고 연락해.”

“예, 총재님.”

헐렁한 정장 바지 차림인 그는 역시나 품이 커 보이는 재킷을 걸치고 문을 나섰다.

**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천상기와 유진교, 두 사람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앉으세요.”

소파의 상석에 앉은 천중명은 오른쪽에 자리한 천상기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넘어질 것처럼 진이 빠져 있어서였다.

“많이 힘들었어?”

“그냥.”

천상기의 짧은 대꾸가 건너온 다음이었다.

“기본안을 원만하게 정리했습니다. 국내법, 국제법, 상법규정을 살핀 뒤에 내일 오전 실무자 협의를 마치면 오후에 있을 만찬에서 발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점심시간을 포함해 3시간 30분을 회의에 매달린 유진교의 보고였다.

“오늘 오후에 환영인사의 초안을 올리겠습니다. 수정을 원하시는 부분을 체크해서 보내주시면 됩니다.”

유진교의 보고가 끝났다.

“먼저 일어나세요.”

“예, 회장님.”

유진교를 먼저 내보낸 천중명은 천상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살짝 튼 천상기가 켕기는 듯한 표정으로 천중명의 시선을 받았다.

“왜? 뭐?”

“오늘 회의 봤지?”

“끝까지 자리에 있기는 했지. 말이 나와서 그런데 앞으로 나는 이런 회의에서 빼주라, 진짜! 알아듣는 말도 없는데 꼭 그렇게 숨도 못 쉴 정도로 힘든 분위기에 날 앉혀놔야 하겠어!”

“커피 마셔.”

“아까 너무 마셨어.”

껄렁대며 대꾸하던 천상기가 아차 하는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룹 차원에서 보면 그 자리에 부회장 두 명이 모두 앉아 있는 건 손해가 커. 그러니 업무를 빨리 익혀. 알았어?”

“아, 동생회장님! 과로로 쓰러지겠어, 진짜!”

“내가 문병 가 줄게. 만찬장까지는 함께 움직여. 이제 그만 일어나고.”

“에이!”

툴툴댄 천상기가 소파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리고 그 직후에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조양회입니다.

소파에 앉은 천중명은 조양회의 급한 보고를 하나씩 확인하며 들었다.

- 해외 계좌를 통해 1조 원을 주겠다는 말은 아예 하지도 못했습니다.

“괜찮아. 조만간 다시 연락 올 것 같으니까 진광효가 만나자고 하면 반드시 양서평 부총재와 함께 움직여.”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천중명은 소파의 팔걸이를 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진광효 총재가 제법 머리가 있었나? 그럼 고맙지!”

알기 어려운 말을 뱉어낸 천중명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책상으로 향했다.

**

컨테이너 높이의 사각형 공장이 끝없이 이어진 공장에 도착한 진광효가 조직원에 둘러싸여 차에서 내렸다.

삼합회의 총재가 이렇게 허술한 모습이어도 되나 싶었는데 진광효와 주변에 서 있는 조직원 모두 어쩐지 껄렁한 태도였다.

진광효가 여유 있게 공장 외곽을 둘러볼 때였다. 조금 전에 그가 지나온 길을 최고급 승용차가 달려왔고, 공장 앞에 멈췄다.

“총재님!”

“번거롭게 했어.”

“아닙니다.”

급히 고개를 숙인 류서열이 양손을 맞잡고는 진광효의 곁에 섰다.

“지경그룹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비트코인 채굴장과 거래소를 중단시켜달라는 요구가 있었어. 그것도 자기가 지정한 날에.”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을 지켜주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제안에는 반드시 대가가 이어진다. 이어질 조건을 기다리며 류서열은 진광효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트럭의 인수와 관련한 모든 조건을 내게 일임하겠다는 건데 어때?”

“결정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지경은 말할 것 없고, 한국이 죽게 생겼는데 굳이 긴말 해서 뭐하겠나. 바깥의 내 계좌로 약속한 돈이 입금되면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 그렇게 알아.”

“감사합니다! 총재님!”

“자식 관리에 신경 써. 류 회장과 다르게 류효양 부사장은 양서평에 가등섭까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아.”

“잘 가르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광효가 뒷짐을 진 자세로 공장으로 향했고, 류서열과 조직원이 뒤를 따랐다.

“지경에서 우리가 채굴장을 돌리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당분간 돈을 돌리는 방법을 바꿔. 홍콩에 좀 더 많은 코인이 갈 수 있도록.”

“예, 총재님.”

지시를 마친 진광효가 흡족한 얼굴로 안을 돌아보았다.

전기와 컴퓨터만 있으면 돈이 쏟아지는 사업이었다. 속 썩이는 사람 없고, 가격도 물건을 가져가는 일본과 테드 케블린, 이렇게 두 곳과 의논하는 대로 결정된다.

“으하하하!”

이걸 멈춰주는 조건으로 1조 원이라니!

모자란 녀석!

얼마든지 멈춰주마! 얼마든지!

진광효는 또다시 만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

서초동의 식당은 천중명의 예상대로 그저 그런 양옥을 개조한 한식집이었다. 6시 50분에 도착한 천중명이 차에서 내리자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천중명 회장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는 신분을 딱히 밝히지 않고 천중명을 안으로 안내했는데 태도는 공손했다. 식당은 크지 않았다. 넓지 않은 마루를 지난 남자는 왼편에 있는 방으로 천중명을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역시나 정장 차림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시니까, 회장님? 경제수석 민세조입니다.”

“천중명입니다.”

둘이서 악수를 나눴고, 문을 중심으로 마주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뵙고 싶던 참에 총수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식사를 모시겠다는 말씀을 드렸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흔 중반의 민세조는 털털한 느낌이었다.

“젊은 회장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권위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VIP께서도 관심 있게 보셨고요. 직접 뵙고 보니까 눈빛이 대단하십니다.”

“좋은 뜻으로 받겠습니다.”

“그럼 저녁을 먼저 드시고 말씀을 나눌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하시죠.”

천중명의 답을 들은 민세조가 테이블 위의 버튼을 눌렀다.

“재킷을 벗으면 어떻겠습니까?”

“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털털함을 한껏 표현한 민세조가 반가운 얼굴로 재킷을 벗었다.

“셔츠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확실히 달랐다.

벗어둔 재킷, 셔츠, 넥타이까지, 천중명과 달리 민세조가 걸친 제품은 모두 중가의 브랜드였다.

“하나 선물해 드릴까요?”

“하하하! 그렇게 하시면 제가 직장을 잃습니다!”

천중명의 농담 섞인 제안을 민세조가 기분 좋게 받았다. 그리고 그 농담 끝에서 식사가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굴비, 찌개, 어쩐지 음식 소개 잡지에서 봤음직한 불고기, 잡채 등의 반찬과 돌솥밥이 나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예. 수석께서도 맛있게 드세요.”

그렇게 둘이서 식사를 시작했다.

“우즈만 왕세자와 마타르 청장은 정부에서도 초대하고 싶어 했을 정도로 아랍 세계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밥을 그릇에 퍼낸 민세조가 뜨거운 물을 돌솥에 부으며 건넨 말이었다. 우즈만과 마타르의 이야기를 옆 동네 사람처럼 편안하게 말하는 그의 털털함과 편안한 성품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만찬에 초대해 달라는 정치인들이 꽤 있었습니다.”

“적당히 들어주거나 자리를 따로 만들도록 배려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와 비슷한 유진교 부회장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아마 실무진 협상에서 따로 일정을 조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후로 식사 동안의 화제는 취미나 최근 본 기사, 유행하는 영화 따위의 이야기로 진행되었다.

밥을 적당히 먹은 뒤였다.

“마타르 청장이 아랍에미리트의 공사를 중단했던 것이 블루크루드 관련이 맞습니까?”

“예.”

“그런데 그걸 블루크루드 생산시설에 투자하는 조건으로 해결하셨고요?”

민세조의 질문이 있었고, 천중명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우즈만 왕세자는 오늘 처음 만나셨는데 단순한 인사 차원의 방문이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불고기를 집어 밥에 올린 민세조가 궁금한 시선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미화 1천5백억 달러의 투자를 제안했습니다.”

천중명의 이어진 설명이 나온 직후였다.

엄지와 중지를 튕겨서 ‘딱!’ 소리를 내자 굳어버린 것처럼 민세조는 젓가락을 든 자세로 움직임이 없었다. 그가 1천5백억 달러가 한화로 얼마인지 계산하고 있다는 것에 고급 셔츠 한 장 걸 정도로 확신할 수 있는 일이었다.

“7백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는 마타르 청장의 제안도 있었습니다. 오늘 기본적인 사항에 합의했고, 내일 오전 실무자 회의를 거쳐 오후에 정식 발표할 예정입니다.”

굳어버린 참에 아예 한 번에 들으란 듯이 천중명은 백김치를 집어 들며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회장님? 지금 말씀하신 투자금이, 그러니까 그게 우즈만 왕세자와 마타르 청장의 몫을 합하면 우리 돈으로 240조 원이 넘는? 맞습니까?”

“예.”

고개를 숙인 민세조가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는지 한쪽에 있던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블루크루드에 그 많은 금액을 투자하지는 않을 테고, 다른 목적이 있으십니까?”

“밥은 됐고, 누룽지를 먹을까 하는데 어떠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민세조 역시 허기를 채우러 나온 것 같지는 않은 모양인지 천중명의 권유에 반가운 얼굴로 돌솥을 당겼다.

“수석님.”

돌솥의 뚜껑을 연 천중명이 나직하게 불렀고, 민세조가 시선을 들고 궁금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오늘 면담에 있었던 내용을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수석님을 이렇게 대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전에 질문이 하나 있고, 답을 듣고 싶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긴장한 얼굴의 민세조를 향해 천중명이 입을 열었다.

“유대 자본이 중국의 일부 세력, 일본의 자본과 결탁해서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 점을 알고 계십니까?”

돌솥에 담긴 누룽지에서 김이 올라오지 않았다면 방 안의 모든 것이 굳었다고 믿을 정도로 두 사람은 상대의 눈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민세조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해결할 방법은 있습니까?”

“변명 같지만, 전 정권에서 이미 약속한 몇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올해부터 국제 은행 규정에 따라 대출을 제한하기로 한 협약 등이 그렇습니다. 그 함정을 풀어내려 애쓰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 자본에 정면으로 맞설 생각이고 정부의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질문과 답이 오갔다. 그리고 다시 ‘그대로 멈춰라!’라는 노랫말처럼 잠시 움직임이 없었다.

돌솥밥에 담긴 누룽지가 ‘저기, 나 이제 거의 다 식었는데요.’ 하는 외침처럼 가녀린 김을 피워올리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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