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282. 천 회장이 우리의 힘을 이용해 (3)
조양회는 대송자동차 중국법인의 현황을 최만호와 유진교에게 보낸 뒤에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자리를 지켰다.
달러 대비 원화 가격이 매일 5원에서 7원씩 오르고 마타르 청장과 우즈만 왕세자가 지경그룹을 공식 방문하는 것으로 봐서 이미 일은 시작되었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 한가한 집무실의 풍경과 다르게 조양회를 둘러싼 공기는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처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트럭 부분을 양도하기로 약속한 류효양은 귀국과 동시에 진흙 속을 파고든 장어처럼 모습을 감추었고, 삼합회 총재 진광효 역시 당장 이렇다 하는 말이 없다.
중국이었다.
당의 한마디면 대송자동차 중국 법인쯤 얼마든지 생산과 영업을 중지해야 하고, 진광효가 독한 마음을 먹으면 양서평과 조양회는 칼을 맞고 바다에 뿌려지는 곳이었다.
“후-.”
뻔한 서류를 덮은 조양회가 갑갑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창을 향해 움직였다.
커다란 책상, 좌우로 10명씩 앉을 수 있는 소파 세트, 책장까지, 중국 법인의 대표회장 집무실에서 조양회는 인상을 찌푸린 채 창으로 다가섰다.
뭔가 계획이 있을 분이다.
절대 양서평과 조양회를 잊거나 위험에 빠지도록 지켜볼 분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천중명의 지시대로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숨죽이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렇더라도 답답한 건 또 답답한 거니까.
차라리 양서평의 곁을 지키면 훨씬 속은 편할 텐데 말이지.
나직하게 숨을 내쉰 조양회가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입술에 힘을 꾹 주었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책상 위에 두었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급하게 움직인 조양회가 번호를 확인하고는 얼른 버튼을 눌렀다.
“예, 회장님!”
- 식사는 하고 있어?
마치 조양회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천중명의 농담에 조양회는 “죄송합니다.”하는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 식사를 하는 게 내게 죄송한 일이 되나?
“그런 것이 아니라 회장님의 지시를 받지 못해서…….”
불안하고 지루했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한 조양회가 말끝을 흐렸고, 대꾸처럼 천중명의 옅은 웃음이 건너왔다.
- 양 부총재는?
“아직 다른 일은 없습니다.”
- 그럼 됐어. 통화 마치고 나면 양서평 부총재와 진광효 총재를 만나.
책상 앞의 의자로 움직인 조양회가 얼른 펜을 집어 들고는 이어질 지시를 기다렸다.
-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 양도에 관한 모든 권한을 진광효 총재에게 넘긴다고 제안해.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을 말씀하십니까?”
조양회는 아예 펜을 놓고 통화에 집중했다.
- 그 대신 중국에 있는 비트코인 채굴장을 막는 것과 그 비트코인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해.
“알겠습니다.”
조양회의 대꾸에는 힘이 부족했다. 거양자동차의 조건만 가지고는 진광효를 설득하기 어려울 거란 순간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 진광효는 그 정도에 쉽게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비트코인 거래를 완전히 중단시켜주면 한화로 1조 원을 주겠다고 제시해.
“예에?”
화들짝 놀랐던 조양회가 고개를 짧게 털고는 “1조 원이라고 하셨습니까?” 라고 되물었다.
- 거래 중지 시기는 내가 요구하는 당일이야. 그 정도면 협상할 만하겠지?
“예! 회장님!”
기운이 솟은 조양회의 답에 다시 옅게 웃는 천중명의 웃음이 들렸다.
- 속을 보이지 마, 조 대표. 무슨 일이 있어도 목소리나 표정을 읽히지 마. 양서평 부총재를 위해 목숨도 걸었던 배포를 꺼내서 진광효를 상대해. 명심해. 이번 협상은 조양회 대표가 나를 대신해서 나서는 거야.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렇게 하면 중국 내에서 부총재의 위신에 문제가 생깁니다.”
- 착각하지 마. 사업으로 만나는 거지, 조직원끼리 협상하는 자리가 아냐.
“알겠습니다, 회장님.”
아차했던 조양회가 얼른 답을 내놓았다.
- 필요하다면 제3국에 숨겨진 돈을 줄 수 있다고 제시해. 그게 내가 내밀 수 있는 마지막 카드니까 그건 꼭 쥐고 있다가 마지막에 꺼내. 한 가지 더.
“예, 회장님.”
- 이 협상이 성사되면 양 부총재와 조 대표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그럼 면담을 끝내고 결과를 알려줘.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조양회는 잠시 멍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서 조금 전의 통화를 떠올렸다.
“아차!”
그런 뒤에 그는 급하게 양서평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솔직히 좀 놀랐다. 천상기는.
그룹 회장 자리 탐낸 적 있었다. 그게 안 되면 지경건설, 지경전자의 회장이라도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 정도 배포는 있는 천상기였다. 그러니 돌아가는 분위기나 느낌 정도는 얼마든지 잡아챌 눈치 정도는 있었다.
카리프와 함께 온 실무진과 천상기, 유진교, 공정규, 법무팀장 고강도는 귀에 이어셋을 걸고 회의에 열중했다.
내일 오전 실무 회의에서 실제 결정해야 할 안건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게 천상기가 예상했던 수준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양측이 요구조건을 내놓으면 그에 따른 질문과 답을 통해 이견을 조율한다.
“지분율은 51:49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49퍼센트의 지분을 다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나누어야 합니다.”
카리프가 내놓은 의견이 이어셋을 통해 천상기의 귀에 우리말로 들렸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특별한 이견이 없습니다.”
유진교의 대꾸가 저쪽에는 아랍어로 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 정도야 천상기도 알지!
그런데도 그가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것은 유진교를 비롯한 임원들과 뒤에 앉아 내용을 확인하는 임원, 중간 간부들의 태도였다.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 그들의 모습은 전에 천봉서가 건설을 관리할 때도 전혀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지경그룹 천중명이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점심시간입니다. 괜찮으시면 샌드위치와 커피를 드시면서 간단하게 휴식을 취한 뒤에 계속했으면 싶은데 어떠십니까?”
“그럼 30분쯤 휴식할까요?”
유진교의 제안을 카리프가 받으면서 다들 상체를 세우고 잠시나마 긴장을 털어냈다.
비서실 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여서 샌드위치와 커피, 음료수, 물을 새롭게 놓아주었고, 그 틈에 카리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교에게 다가왔다.
“부동산 투자는 방식만 결정해서 알려주십시오. 나머지는 청장님과 회장님께서 이미 정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천상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걸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리에 앉는다고? 그것도 박무일 같은 임원을 데리고? 그럼 강갑수나 청소 직원, 그리고 충주에서 부상당했던 직원은 어떻게 대우받는데?
‘에이!’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절로 저어지는 일이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냥, 생각이 많아서 그래……요.”
유진교의 배려를 천상기가 그답지 않게 정중하게 받았다.
**
천중명은 약간 늦은 점심을 집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정했고, 통화가 연결된 박승양과 마주 앉아 먹었다.
“햐! 중식 도시락은 또 처음 봅니다!”
박승양이 흐뭇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반찬들을 훑어보았다. 그를 위해 밥을 추가한 것은 물론이고, 한식, 일식, 그리고 중식, 이렇게 종류별로 세 개나 주문했던 참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학교에서 보리밥 섞었는지 검사도 했고, 1년에 한두 번 계란 프라이를 싸갈라치면 밥 아래에 깔아서 숨기곤 했었습니다.”
“밥 아래에요?”
“그래야 다른 놈들이 젓가락 들이밀지 못하니까요.”
일본식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든 박승양이 흘러버린 세월을 먹는 사람처럼 입에 넣었다.
“반찬은 1년 내내 유리병에 깍두기였지요. 그걸 밥 위에 쭉 펼쳐 넣고 도시락 뚜껑을 닫아 누르면 밥에 콕콕 박혀서 젓가락으로 떠먹기 좋았습니다.”
“이제는 좋은 음식 사드실 정도는 되잖습니까?”
“에이!”
젓가락을 뻗던 박승양이 고개를 저었다.
“뭐든 배워야 하나 봅니다. 밥 한 끼 사 먹는 법, 주말에 쉬는 법, 하다못해 가족들과 어울리는 것도 자꾸 노력해서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골프는 하시잖습니까?”
“합니다! 건강이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내 돈 내고는 절대 안 합니다. 돈이 아쉬운 인간들이 초대해 줄 때만 갑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박승양은 돈을 쓰지 않는 것에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는 눈치였다.
“회장님. 지난번에 파생상품 이익과 개인적으로 전주들에게서 빌리기로 한 돈을 합치면 현재까지 대략 10조 원쯤 확보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대부업은요?”
“두 개는 가지고 있었던 게 있고, 세 곳을 더 준비 중입니다.”
밥을 잘라 젓가락으로 뜬 천중명이 질문했고, 잘라놓은 갈빗살을 집어 든 박승양이 답했다.
“이번에 얼마나 벌고 싶으세요?”
천중명의 다음 질문을 받은 박승양이 고개를 비틀고는 야릇한 미소를 그려냈다.
“다 아시면서!”
“그렇게 하시면 못 알아듣습니다.”
“저야 회장님 곁에 있는 것에 행복하지 돈 버는 건 이제 관심 없습니다.”
“100퍼센트 수익이면 만족하세요?”
천중명의 질문에 바삐 움직이던 박승양의 젓가락이 허공에 딱 멈췄다.
“따블? 10조 원의 따블! 만족합니다. 아-주 만족하지요. 제가 도시락 먹은 힘으로 기운차게 달려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 3조 원 정도 더 만들어 내겠습니다.”
그렇게 더 만들어도 되겠느냐는 박승양의 시선에 천중명은 옅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 과장은 잘 지냅니까?”
“이명선 과장 말씀이시지요? 처음엔 새끼 제비 같더니 지금은 발을 분지르면 곧장 달려들어 놀부의 목을 꺾을 정도로 강단 있는 제비가 되었습니다.”
생선회를 간장에 찍으며 박승양이 건넨 평가였다.
**
양서평과 만난 조양회는 진광효의 집으로 향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집 앞에 서 있는 공안, 대문 안으로 펼쳐진 인공 연못과 정자, 곳곳에 서 있는 조직원까지, 서투른 짓 하면 당장 목이 떨어진다는 것을 진광효는 사는 집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고전적인 정원을 지니고도 정작 진광효의 집은 현대식 5층 건물이었다.
“이쪽입니다.”
조직원을 따라 걸으며 조양회는 슬쩍 건물 내부를 올려다보았다. 5층 건물의 중앙 부분이 뻥 뚫려서 위의 유리를 통해 하늘이 보였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각 층이 빙 돌아가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조직원들이 습격한다고 해도 내부 협력자가 없다면 도대체 몇 층에 그가 있는지 알 길이 없는 구조였다.
엘리베이터로 안내한 조직원은 곧바로 3층의 버튼을 눌렀다. 빙 돌아간 복도에 일정하게 세워진 기둥과 주황색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건물의 3층에서 내린 조직원은 복도를 걸어가 엘리베이터가 마주 보이는 곳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안쪽 정면 유리를 통해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접견실 느낌의 공간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양서평과 조양회는 먼저 고개를 숙여 창을 등지고 이쪽을 바라보는 진광효에게 인사했다.
“앉아.”
“감사합니다.”
작은 테이블 앞에 놓인 손잡이와 등받이를 갖춘 1인용 의자에 두 사람이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뚜껑이 덮인 자기 찻잔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보자고 한 이유는?”
진광효는 소위 상고머리 스타일에 얇게 시작한 콧대가 길게 이어졌고, 이가 조금씩 벌어져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약간 멍청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지경그룹 회장님의 제안을 전해드릴까 합니다.”
눈을 살짝 크게 뜬 진광효가 불쾌한 눈으로 조양회를 노려보았다.
“흥! 가등섭이 죽고 나더니 조직의 꼴이 엉망이군. 그래, 이왕 말이 났으니 어디 제안이 뭔지 말해봐.”
조양회는 방에 둘러선 남자들을 돌아본 뒤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트코인 채굴장을 없애주시고…….”
이러면 안 되는데 조양회는 긴장해서 말의 중간에 마른침을 삼켰다.
“해외로 나가는 비트코인의 거래를 지정한 날에 중단시켜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흣흣흣. 경영자가 별걸 다 관심을 두는군.”
찻잔을 든 진광효가 뚜껑을 앞으로 두어 번 밀어댄 뒤에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했을 때 내가 얻는 것은?”
“거양자동차의 트럭 양도 부분에 관한 결정권을 모두 총재님께 드리겠답니다.”
“어차피 국유화되면 끝날 일이니 이렇게 생색을 내겠다?”
“그 외에 한국 돈으로 1조 원의 현금을 드리겠다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호오.”
가로로 긴 진광효의 눈이 조양회를 노려보았다가 번득하고 양서평에게 건너갔다.
“경영인인 그가 비트코인 채굴장과 거래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것 역시 제가…….”
“내가 양 부총재에게 물었다. 혓바닥이 세 개쯤 된다면 더 떠들어.”
조양회가 입을 다물고 마른 침을 삼킨 다음이었다.
“내가 묻지 않나? 경영인인 한국의 회장이 비트코인 채굴장과 거래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뭐지?”
진광효의 가로로 긴 눈이 양서평의 부리부리한 눈을 파고들 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