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281. 천 회장이 우리의 힘을 이용해 (2)
두 명의 부회장과 카리프가 접견실을 나서고 이야기가 급하게 달려가더니 고작 10분 만에 25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천 회장님. 우리는 진지하게 지경이 개발한 블루크루드의 생산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 점은 이미 마타르 청장과 합의한 내용입니다. 내일 오전에 있을 실무자 협의에서 세부 논의가 진행될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분에 관한 발표나 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즈만은 고개를 저으며 천중명의 질문에 답을 주었다.
“왕세자들이 유대 자본에 투자하려는 행동을 막았고, 그들의 부정한 재산을 환수했습니다. 그런 뒤에 하는 투자이다 보니 나와 마타르 청장에게는 적당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 점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우즈만 왕세자.”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해도 제1 접견실은 절대 좁은 공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바닥에 꾸며놓은 화원과 거대한 화분 덕에 식물원 안에 앉아 있는 듯한 여유로움도 있었다.
“어쩐지 한국과의 인연이 오래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즈만 왕세자께서 한국과 천중명 회장님에게 푹 빠지신 모양입니다.”
“그런 곳이 있지요. 처음 가본 곳인데 마치 오래 지낸 듯 익숙한 장소, 그리고 처음 보는데도 마치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타르와 우즈만의 대화를 상체를 기울인 통역이 쉴 틈 없이 전해주었다.
“천 회장님을 뵙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호텔로 돌아갈까 합니다.”
“곧 점심시간입니다. 이대로 가시면 서운합니다.”
“시차가 있는 데다 내일 저녁 만찬을 위해 오늘을 아껴두겠습니다. 투자방법에 관해서는 부회장 두 분과 의논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즈만과 마타르를 따라 천중명이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서자, 비서실 직원, 그리고 마타르와 우즈만의 수행원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앞으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함께 걸어간 다음이었다.
“여기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연히 기자들에게 붙들리는 모습이 불편합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청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신의 가호가 천중명 회장과 함께하길 기원하겠습니다. 오늘 만남이 씨앗이 되어 먼 훗날 후인들이 행복한 결실을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뵙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우즈만 왕세자님.”
천중명은 마타르, 우즈만과 차례대로 인사하는 것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
도깨비 출신 직원들은 아직 벤처사업부의 소속이었다.
책상에 앉은 곽대출은 주인영 부장이 가져온 승진 명령서에 멋지게 이름을 적어넣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예, 본부장님.”
“조만간 다른 계열사로 발령 날 테고, 랠리에서 고생한 것도 있고 하니까 다른 직원들에게 그렇게 잘 설명해줘.”
“그룹 회장님의 지시사항이란 말씀은 왜 빼세요?”
결재판을 집어 든 주인영의 애교 섞인 반문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것까지 말했겠지만, 주 부장에겐 안 그래도 되지?”
주인영이 밝은 미소로 답을 대신할 때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어깨와 팔뚝에 붙여 놓은 커다란 거즈가 셔츠에 달라붙어 눈에 들어왔다.
“옥상에 가시게요?”
“응. 커피 한잔하고 내려올게.”
주인영이 먼저 나섰고, 곽대출은 혹여 직원들이 거즈를 눈치챌까 싶어서 지경그룹의 점퍼를 걸친 뒤에 옥상으로 향했다.
계단이라야 별로 힘들지 않다.
오래전에 지은 건물을 급하게 수리한 수준이라서 복도와 계단은 화려하지도 않았다.
12개의 계단을 오르면 다시 반대로 홱 돌아간 계단이 나온다. 옥상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곽대출이 위쪽에 보이는 문을 보며 웃었다.
사람 사는 거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긴 했다.
도깨비로 살면서, 봉천동의 집에서 지내면서, 이런 삶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주인영까지.
끼이익.
문을 열자 기회를 노리던 햇빛과 바람이 곽대출을 덮친 뒤에 계단 아래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셨습니까?”
“커피 한잔 마시려고. 마셨어?”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던 추일원과 대원 넷이 자리에서 일어나 곽대출에게 다가왔다.
“내가 탈 테니까 그냥 있어. 더 마실 사람?”
“일이 없어서 지루하던 참입니다. 저쪽으로 앉으십시오.”
대원 두 명이 곽대출을 밀어내고는 포트와 커피, 컵을 꺼냈다.
“오늘 일곱 명 전부 한 단계 승진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그래도 됩니까?”
“회장님 지시사항인데 내가 힘 있냐?”
달달한 커피 냄새가 벤치로 달려오고 있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 곽대출이 왼손으로 바람을 막아가며 불을 붙였다.
“실제 고생은 회장님과 선배님이 다 하셨잖습니까?”
“그나마 그 일이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것도 없었으면 서운할 뻔했어.”
“솔직히 저도 맥빠지긴 했습니다. 죄송하기도 했고요.”
추일원이 미안하고 아쉬운 심정을 전할 때였다.
“자! 커피입니다!”
대원 한 명이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추일원이 두 개를 들어 곽대출에게 건넸고, 나머지 대원들은 알아서 하나씩 들고 벤치에 둘러앉았다.
“조금만 쉬고 있어. 조만간 구급대 설립되면 일이 많아질 거야.”
“섬을 매입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훈련생 구해지면 쓸데없이 잡도리하지 말고. 적당하게 해.”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따블로 해라, 그렇게 들립니다.”
추일원의 농담에 곽대출이 픽 웃은 다음이었다.
“그런데 회장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사막에서 삼합회 조직원을 해결한 것도 황당한데 갑수와 일호 말을 들어보면 AK 소총을 능숙하게 다루셨다고 하던데요.”
곽대출은 대꾸 대신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발목을 날리는 것도 어지간한 사람은 못합니다. 혹시 특수부대 출신이십니까?”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궁금하더라도 알 필요 없는 일들이 있거든. 이 곽대출이 목숨 걸고 따르는 분, 그 이상 더 필요해?”
“아닙니다.”
추일원이 궁금함을 삼키는 것처럼 커피를 시원하게 마셨다.
“말을 들을 때마다 궁금했습니다. 그룹 회장님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지는 거 못하는 꼴통 회장님이잖아.”
곽대출의 답에 추일원과 대원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긴장 풀지 말고 있어. 조만간 뭔가 있을 것 같다.”
“예, 선배님.”
웃음의 끝에서 곽대출이 나직하게 꺼낸 지시에 추일원이 단단하게 답했다.
‘나는 데려간다고 했으니까!’
추일원과 대원들 앞에서 탄천을 바라본 채 곽대출이 실없이 웃었다.
돈? 명예?
아니, 곽대출은 천중명 때문에 지경그룹에 있는 사람이었다.
**
우즈만, 마타르와 헤어진 천중명이 한 시간쯤 내부 자료와 환율을 살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책상에 올려두었던 휴대 전화기가 처음 보는 번호를 안은 채 울었다.
“여보세요?”
- 천중명 회장님이십니까? 천호득 총수님께 연락받고 전화 드립니다.
“예. 제가 천중명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청와대 경제수석 민세조입니다.
“반갑습니다. 번거로우실 텐데 연락 부탁드렸습니다.”
-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뵙고 싶었는데 기회가 생겨서 오히려 반갑던 참입니다.
민세조는 단정한 느낌의 음성이었다.
“괜찮으시면 뵙고 싶은데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으면 싶습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제가 맡은 업무가 있다 보니 비공식 면담이라도 VIP께는 보고드려야 합니다.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 그럼 시간을 정해주십시오.
우즈만과 마타르의 방문이 있어서인지 민세조는 면담에 주저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에 실무자 협상, 오후에 만찬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 시간을 피해서 오늘 저녁, 아니라도 가장 가까운 시간에 뵈었으면 합니다.”
- 흠.
민세조의 나직한 숨소리가 먼저 들린 다음이었다.
- 오늘 저녁을 함께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오후 7시 이후에는 언제고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세요.”
- 예, 회장님. 통화 마치는 대로 문자로 드리겠습니다. 오후 7시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하시죠.”
- 그럼 오후에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이 민세조의 이름을 휴대 전화기에 입력했다. 그 직후였다.
지이이잉.
서초동의 주소와 한식집이 분명한 상호, 전화번호가 문자로 건너왔다. 인터폰을 누른 천중명은 부속실에 시간과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래 놓으면 비서실에서 정확한 장소와 운행시간을 확인해서 운전기사에게 알려놓는다.
점심시간이 다 됐는데 천상기와 유진교, 공정규의 보고가 없었다.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보면 예의나 격식보다는 실리에 집중하는 것이 분명했다.
‘천상기가 좀 힘들겠는데?’
천중명이 가볍게 웃었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부속실 직원이 들어왔다.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뵙죠.”
천중명의 지시가 있은 후에 송문철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서 오세요.”
짧은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소파에 앉자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놓아주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드시는 건 아닙니까?”
“하루에 대략 열 잔 정도 되나 봅니다. 자기 전에도 한 잔은 해줘야 잠이 푹 드는 느낌인데요.”
계열사 회장급은 대개 송문철의 연배이거나 그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았다. 처음엔 뻑뻑하던 관계가 진심을 알게 되면 지금처럼 표정이나 눈빛으로 뜻을 읽게 되고 이어서 대개 천중명의 건강을 염려하는 단계로 발전하곤 했다.
“오늘 마타르 청장과 우즈만 왕세자에게서 투자 가능 금액을 들었습니다. 지경증권의 준비는 어떻습니까?”
“지시를 내려주시는 대로 움직일 준비를 마쳤습니다. 회장님,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환율 거래에서 일정 금액 이상은 반드시 신고를 마쳐야 합니다. 그 점을 고민해 주십시오.”
“조 단위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최소 벌금, 심한 경우에는 실형을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하죠.”
틀림없이 조심하지 않을 거면서.
송문철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천중명은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넘겼다.
“투자금은 얼마나 준비됩니까?”
“당분간은 송 회장님만 알고 계세요. 대략 240조 원쯤 됩니다.”
“하아.”
금액을 들은 송문철이 240억을 손에 쥔 샐러리맨의 얼굴로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를 보면서 알았다. 천호득의 조언대로 송문철은 240조 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감을 잡지 못한 눈치였다.
“부동산 투자 목적으로 입금할 테고, 필요하다면 홍콩이나 다른 나라의 지경증권 지점 계좌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참고하세요.”
“예, 회장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습니다. 그것도 내가 아니라 거대 자본이 먼저 던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싸움에서 물러나지 못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저녁에 정부 관계자와 만날 예정입니다. 혹시 그쪽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다면 수시로 알려주세요.”
고개를 갸웃했던 송문철이 묘한 미소를 그려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부 관계자가 의미하는 인물이 어느 정도 선인지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송문철을 배웅한 천중명이 몸을 책상을 향해 몸을 돌린 직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책상에 있던 휴대 전화기가 천중명을 불렀다.
“여보세요?”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쇼더앤톨먼, 일본과 거래한 중국 내 세 곳의 비트코인 채굴장을 확인했습니다. 그중 한 곳의 소유주가 진광효 삼합회 총재입니다.
“그렇군요.”
책상에 기댄 자세로 창을 향해 선 천중명의 대꾸였다.
- 짐작하셨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정보를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좀 더 쉽게 가겠습니다. 혹시 해킹의 가능 여부가 나왔습니까?”
- 아직 마지막 단계에 걸려있습니다. 이틀 안으로 확답을 드리겠지만, 90퍼센트의 확률로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 같으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천중명은 전화기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감정을 조절했다.
“그럼 확답이 나오는 대로 연락해 주세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 아닙니다, 회장님. 반드시 좋은 결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창밖을 향해 픽 웃었다.
어쩐지 찜찜하더라니.
그렇다면 이제 좀 쉽게 가볼까? 진광효 총재?
잠시 생각을 정리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의 번호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