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280. 천 회장이 우리의 힘을 이용해 (1)
새벽부터 지경그룹 본사에 방송과 언론사의 기자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본사 앞에 멈춘 승용차에서 천중명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지면서 마이크가 달려들었다.
“오늘 두 나라의 왕세자가 지경그룹을 방문합니다.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됩니까?”
승용차에서 내린 천중명을 비서실 직원이 에워쌌고, 그 틈으로 마이크와 질문이 파고들었다. 홍보실에서 내용은 이미 발표했다. 그러니 어떡해서든 천중명의 말 한마디라도 담아가려고 매달리는 게 분명했다.
“잠깐만.”
비서실 직원을 멈추게 한 천중명은 손짓으로 기자 한 명을 가리켰다. 저 기자가 목에 힘 좀 넣을 수 있도록 말이다.
“회장님. 오늘의 아침, 현충기입니다. 오늘 두 분의 방문 목적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랠리를 통해 기존의 화석 연료를 블루크루드로 대체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오늘 두 분은 그에 대한 양산을 의논하기 위해서 방문했습니다.”
천중명을 향해 마이크를 내민 기자들이 부럽고 한편으로는 다급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금융에 관한 논의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 점은 어떻습니까?”
이번엔 앞쪽을 막아선 기자가 방송국의 이니셜이 달린 마이크를 내밀며 건넨 질문이었다.
“블루크루드 시설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지분참여와 같은 투자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 부수적으로 부동산과 관련한 투자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앞에 선 기자들 사이로 팔을 뻗은 초보 기자의 질문이었다. 천중명은 분명하게 그에게 시선을 준 채로 입을 열었다.
“아직 구체적인 규모를 말할 시기는 아닙니다.”
뿌듯해하는, 그리고 커다란 행운을 얻은 듯한 기자의 표정을 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의 시선에 담긴 인사에 옅게 웃어준 뒤였다.
“자세한 브리핑은 방문이 끝난 뒤에 홍보실에서 자료를 배포하겠습니다. 이제 길을 좀 비켜주십시오.”
천중명을 살피던 비서실 직원들이 나섰다.
시간을 내준 것이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천중명의 앞을 둥그렇게 막은 고참 기자들이 더는 달려들지 않았다.
본사에 들어간 천중명은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집무실에 들어섰다.
“회장님. 유진교 부회장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슬쩍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천중명이 픽 웃었다. 지금이 오전 8시 10분이니 유진교는 적어도 8시 이전에 본사에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지금 올라오시라고 연락 부탁해.”
집무실로 들어간 천중명이 재킷을 걸어두고 책상에 기대 메모를 살피는 사이, 유진교가 들어왔다.
“커피 괜찮으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기다리고 있던 부속실 직원이 고개를 숙인 뒤에 집무실을 나섰다.
“앉으세요.”
소파로 걸어간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앉았다.
이제야 집무실의 창으로 햇볕이 비치는 이른 시간이었다.
“본사 도착 예정 시간은 오전 10시입니다. 내일은 오전에 실무자 협의, 저녁에 만찬 일정이 있습니다. 오늘 면담은 회장님의 지시대로 마타르 청장이 동반한 통역이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이용해 유진교가 결재판을 펼쳐놓았다.
“만찬에 참석하기를 희망하는 국회의원과 장·차관의 명단입니다.”
커피잔을 들던 천중명이 시선을 먼저 들었다.
“관심이 쏠린 방문이다 보니 사진이라도 찍고 싶은 모양입니다. 정당의 원내대표와 당 대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커피 드세요.”
심드렁한 천중명을 살핀 유진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그런 뒤에 예의를 지키는 것처럼 입을 대고는 바로 내려놓았다.
“적당한 기준을 정해서 자리를 만드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마타르 청장이나 우즈만 왕세자가 직접 초대하는 방식도 나쁘지 않습니다. 두 분도 그 정도의 일정을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잔을 내려놓은 유진교의 조언이었다.
“회장님. 이런 기회에 얼굴을 한 번이라도 알려야 하는 것은 정치인의 숙명과 같습니다.”
유진교가 두 번 말하는 것은 어지간하면 꼭 받아들여 달라는 의미와 같았다. 이제 이 정도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다.
“실무자 협상에서 카리프 부청장과 부회장님이 의논해 결정하세요. 내가 꼭 참석해야 합니까?”
“정치권의 초청 만찬으로 바꾸면 회장님께서 굳이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커피를 마신 천중명은 만찬에 참석하고 싶다는 명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뭔가 도움이 될 것도 같다만, 자세한 건 카리프와 유진교가 의논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았다.
**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 아랍에미리트 청장과 우즈만 알하리 무라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일행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대략 삼십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나서던 마타르와 우즈만이 기자들을 향해 의도적인 시선을 준 뒤에 걸음을 재촉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리고 그때 TV를 보던 천호득의 휴대 전화기가 책상에서 울었다.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이어셋을 귀에 걸었고, 서둘러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수석입니다, 총수님.
언젠가 이젠 마지막이라고 인사를 나누었던 수석이었다.
“염치 불고하고 메모를 남겼소. 신임 회장이 대통령과 직접 통할 분을 찾는데 뒷방에 물러나니 연락할 분이 수석밖에 없었소.”
가벼운 수석의 웃음이 먼저 들렸다.
- 총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전에도 도움 주실 때면 늘 그러셨지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받아주면 내가 고맙지요.”
수석의 웃음에 대한 답처럼 천호득은 여유 있는 대꾸를 건넸다.
- 제가 연락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 번호를 회장께 주시겠습니까?
“어느 편이 편하시오?”
- 번호를 주십시오.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통화 마치는 대로 보내드리리다.”
물 흐르듯 흐른 통화였다.
- 신세를 졌으니 식사를 한번 모시겠습니다.
“잠시 보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식사까지 한다면 수석에게 공연히 구설만 생길 게요. 나는 그저 우리 수석의 승승장구를 뒷방에서 기원하는 것이 좋아요.”
- 신임 회장의 움직임을 보면 총수님을 뵙는 것에 구설이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강녕하십시오, 총수님.
통화를 마친 천호득이 이어셋을 내려놓을 때 화면은 급등하는 환율에 관해 보도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연락처를 보낸 천호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헤헤.”
수석이 건넨 천중명의 평가가 흡족했던 모양이었다.
“흐헤헤헤.”
천호득은 자꾸만 웃음을 흘렸다.
**
결재된 보고서를 살피는 일이라고 집중이 흐트러져서는 곤란했다. 책상에 앉은 천중명은 보고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처럼 일한다. 그런데도 마타르와 우즈만이라는 인물을 만난다고 생각하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똑똑똑.
그래서인지 보고서를 보는 도중에 울린 노크 소리도 들었다. 고개를 든 천중명의 앞으로 부속실 직원이 다가왔다.
“마타르 청장 일행 도착 10분 전입니다.”
“그래? 정리하지.”
천중명은 결재판을 덮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으로 재킷을 입었는데 그때 천상기와 유진교, 기획실장 공정규, 비서실장 등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홍보실의 직원들이 카메라를 들고 기자처럼 일행의 모습을 담았다.
“준비되셨습니까?”
얌전한 천상기 상상이나 해봤나?
어딘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그는 조용하고 단정한 태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시죠.”
천중명이 앞서 걸었고, 임원들이 뒤를 따랐다.
그래, 천상기.
그렇게 얼른 좀 성장해.
내가 전에 항구에서 아버지께 약속한 게 있다니까.
복도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 직원이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에 버튼을 눌렀다.
그룹 회장 천중명, 거기에 부회장 둘, 기획실장과 비서실장까지 탄 엘리베이터의 가장 앞에 있으려면 얼마나 긴장될까?
그의 경직된 어깨와 자세를 본 천중명이 옅게 웃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했다.
“나온다!”
“비켜 봐! 순서대로 잡자고!”
천중명 일행이 로비로 나서기 무섭게 기다렸던 기자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촤자작! 촤자자자작!
터지기 시작한 플래시는 천중명 일행이 본사의 건물 앞으로 나선 이후에 좀 더 요란하고 거세졌다.
어떻게 협조를 구했는지는 모른다.
교통 경관들이 도로를 통제했고, 비서실과 지경의 경비업체 직원들, 그리고 경찰이 주변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사 건물 앞으로 나선 직후에 경찰 오토바이와 순찰차를 앞세운 검은색 승용차가 줄줄이 본사 앞으로 들어왔다.
촤자자작! 촤자자자자작!
천중명은 승용차에서 내리는 마타르에게 다가섰다.
“반갑습니다, 천 회장님.”
“한국말을 익히셨습니까?”
“조금만. 조금만.”
어색한 우리말을 익힌 노력이 고마워서 천중명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뒤편에서 카리프 부청장과 통역이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것도 보았다.
“천중명 회장님.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즈만 알하리 무라파 왕세자입니다.”
통역이 빠르게 전해주는 말에 따라 천중명은 시선을 건넸다.
“천중명입니다.”
“신의 가호가 있어서 이렇게 뵙게 됐군요.”
서른 후반? 아니면 마흔쯤 돼 보이는 우즈만이 천중명의 손을 마주 잡고 넉넉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인상이 무척 부드러워서 현인이나 학자 같은 느낌이었는데 눈빛만큼은 꽤 묵직했다.
“우리 임원은 안에서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들어가시죠.”
천중명이 안을 가리키자 마타르와 우즈만 일행이 줄줄이 움직였다. 천중명과 마타르, 우즈만, 카리프, 그리고 부회장 두 사람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형식을 따지는 넓은 공간보다는 제 접견실에 모실 생각입니다.”
“긴밀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공간이 좋지요.”
마타르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에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부속실 직원을 따라 제1 접견실로 향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그룹 천상기 부회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제 친형입니다.”
천중명이 소개했고, 천상기가 놀라울 정도로 뾰족하지 않은 표정으로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번에 보셨던 유진교 부회장입니다.”
이래서 기업인은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모양인지 마타르와 카리프가 좀 더 반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앉으시죠.”
천중명이 권하면서 일행이 자리에 앉았다.
차가 나왔고, 별것 없는 소소한 이야기가 흘렀다. 그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즈만은 부드러운 태도로 함께 앉은 이들을 둘러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보이는 게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었다. 저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들을 구금하고 그들의 재산 대부분을 정부에 귀속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10분쯤 차와 한과, 과일을 놓고 대화가 이어진 다음이었다.
“이제 실무자들끼리 좀 더 편안하게 일정을 조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타르가 천중명에게 넌지시 뜻을 건네왔다.
굳이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천중명의 시선을 받은 천상기와 유진교가 일어섰고, 카리프가 두 사람을 따라 접견실을 나섰다. 그 직후에 통역이 천중명과 마타르의 중간으로 자리를 움직였다.
“천 회장. 다음 주에 미국이 금리를 인상합니다.”
“그렇군요.”
우즈만이 천중명의 반응을 지켜보는 앞이었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채권의 매각, 비트 코인을 매각한 이익금의 움직임, 쇼더앤톨먼, 그리고 실무를 담당한 두 사람의 위치까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마타르가 슬쩍 시선을 준 곳에서 우즈만이 만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 회장님. 대책도 세워두었습니까?”
“아직 확실한 대책은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늘 두 분을 뵙고 난 뒤에 우리 정부와 미국 측 파트너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흐음.”
“결정 나는 사안이 있으면 수시로 알려드리고, 협조를 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타르가 의도가 다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우즈만 당신이 직접 나서라는 의미처럼 보였다.
“유대 자본은 아랍의 힘이 뭉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탐욕에 빠진 왕세자들을 자극해 그들에게 투자하게 만들 정도로 교활하고 야비하지요.”
신호를 받은 우즈만이 넉넉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신의 가호로 나와 마타르 청장이 그 욕심을 막았지만, 한국이 쓰러지게 된다면 다음 목표는 반드시 우리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될 것입니다. 이번 유대 자본의 움직임을 천 회장이 막아내 주길 신에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세자님.”
천중명의 인사에 우즈만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이번에 형제들에게 모은 자금이 미화 1천5백억 달러입니다.”
그런 뒤에 그는 정말이지 엄청난 제안을 내놓고는 너는 어떻게 할 거냐는 투로 마타르를 보았다.
“천 회장. 현재 우리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7백억 달러를 준비하겠습니다. 투자금이니 이자는 필요 없습니다.”
대략 생각해도 얼추 2백50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이었다.
천중명의 반응을 살핀 우즈만이 부드럽게 웃었다.
“바람을 등지고 씨를 뿌리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훗날 그곳에 있을 후손을 위해서이지요. 천 회장이 우리의 힘을 이용해 저들의 사악한 탐욕을 무너트려 주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독이는 듯한 말을 내놓았다.
“감사합니다, 청장, 왕세자님. 이렇게 되면 적극적인 수익 창출도 가능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좀 더 씨앗을 많이 뿌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군요.”
시선을 마주하고 미소 짓는 천중명과 우즈만을 마타르가 뿌듯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