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279.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3)
대송자동차그룹 회장 최만호는 오랜만에 유진교 그룹 부회장을 찾았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룹 부회장에 오른 것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보내준 난은 잘 받았어요. 그나저나 자동차그룹 회장이 나보다 더 바쁘지 않나요?”
“부회장님. 그런 말투를 하시면 서운합니다.”
“그런가? 그럼 전처럼 대하지. 앉아.”
익숙한 유진교의 소파에 앉은 최만호에게 부속실 직원이 바로 차를 놓아주었다. 예의상 한 모금을 마신 최만호는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바쁘실 것 같아서 바로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자료를 유진교의 앞에 놓아주었다.
“손실이 이미 3조 원이 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대송자동차그룹의 예상손실 7조 원보다 대략 2조 원의 손실이 불어나게 됩니다.”
“흠.”
“이 정도라면 따로 보고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송자동차그룹을 유진교가 맡게 되면서 회장 보고 전에 이뤄지는 사전 조율이었다.
“그동안 대송자동차가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되사는데 7조 원을 투자하시겠다는 그룹 회장님의 지시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최만호의 보고를 유진교는 고개를 저으며 막았다.
“회장님께서 신뢰를 되사겠다는 계산을 하실 분인가. 안전한 차, 믿고 탈 수 있는 차를 만들라는 지시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해.”
“말이 앞섰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는 최만호를 향해 유진교가 입을 열었다.
“신차 개발이 어느 정도 준비된 모양이지?”
“전에 개발하던 신모델이 있습니다. 대송장비의 최치국 회장이 회사에서 먹고 자면서 매달린 덕분에 이제는 부품의 성능도 믿을만합니다.”
“차종은?”
“내부 문건입니다.”
최만호가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서류를 한 부를 더 꺼내 유진교 앞에 놓아주었다.
“품질은 자신 있습니다.”
유진교는 대꾸 없이 10분쯤 서류를 꼼꼼히 살핀 뒤에 상체를 세웠다.
“지경리온의 신상훈 사장을 만나든가 아니면 화상회의를 해서 지경리온의 개발진에게 안전 점검을 받고 필요하다면 그들의 기술을 담아. 그런 뒤에 회장님을 뵙기로 하지.”
서류에 시선을 주었던 유진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룹을 맡았으니 실적에 신경 쓰이겠지. 예상보다 2조 원의 손실을 더 부담해야 한다면 최만호 회장의 경력, 대송자동차 관련 주가, 평가에 신경 쓸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런데 우리 그룹 회장님이 그 실적을 중요하게 여기실 분인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자동차 전문 경영인, 윤병지 대송그룹 회장이 있었는데도 왜 최만호 기획실장에게 대송자동차그룹을 맡기셨을까?”
테이블에 올려둔 찻잔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얼음장처럼 냉정한 두 사람의 대화였다.
“실적에 매달리지 않을 사람. 고객 안전에 관한 한 회장님만큼 적당히나 타협이 없을 인물을 선택하신 거지. 지금은 내게 대송자동차그룹의 결재를 맡기셨고.”
“저와 부회장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믿어주시겠다는 뜻입니까?”
“모두는 아니겠지. 하지만, 나와 최 회장이 의논한 뒤에 말씀을 드리는 일은 허락하시지 않겠나? 기용도 지경전자 부회장, 신상훈 지경리온 총괄사장에게 하셨던 것처럼.”
멈칫했던 최만호가 시선을 내려서 테이블에 올려진 내부 문건에 시선을 주었다.
“자, 하나 묻지. 아직도 자신 있나?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어떤 명차들과 견주어도 안전, 연비, 성능, 가격으로 앞설 수 있는 차를 개발했다고 자신해? 그렇다면 회장님께 말씀드리기로 하지.”
유진교의 질문을 받은 최만호가 멋쩍게 웃었다.
“1개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동차 개발이 그렇게 빠르게 되는 건가?”
“최치국 회장을 만나보시면 제가 왜 자신하는지 아실 겁니다. 말씀드린 1개월 동안 지경리온의 의견을 들어볼 생각입니다. 그 뒤에 부회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교 앞에서 최만호는 테이블에 있던 서류를 들어 가방에 넣었다. 어쩌면 불쾌할 수 있는 일인데 유진교는 내부 문건을 챙기는 최만호를 듬직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붙들겠지만, 내일 중요한 귀빈 방문이 있어서 우리도 정신이 없어. 다음에 시간을 내지.”
소파에서 일어난 최만호를 향해 유진교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먼저 사고 싶다고 자네에게 청탁을 넣을 정도로 멋진 자동차를 부탁하네.”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고개 숙여 인사한 최만호가 나가기 무섭게 부속실 직원이 메모를 들고 들어왔다.
“홍보실과 기획실, 그리고 외부에서 온 전화 연락입니다.”
책상에 앉은 유진교의 앞에 메모가 잔뜩 놓였다.
블루크루드의 양산, 랠리에 우승했던 트럭, 그리고 지경전자의 배터리에 관한 방송과 언론, 해외제조사의 문의가 산더미처럼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유진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좌우로 비틀어 잠시나마 피곤을 털어낸 뒤에 메모를 살폈다.
실시간으로 도로 상황을 보여주는 압축 기술에 관한 협력 요청서, 와이파이망 개방에 따른 기술 협약까지 들여다봐야 할 서류는 끝이 없었다.
대강 제목만 살핀 유진교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회장은 그동안 이 모든 서류를 꼼꼼하게 살폈고, 심지어 궁금한 점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메모해서 문의하곤 했었다.
하루 이틀이라면 모르겠다. 그러나 천중명은 몇 개월을 이렇게 견디었다.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지 못하면…….
유진교가 기가 막힌 사람처럼 웃었다.
따지고 보면 천중명은 천상기에게 넘겨준 일까지 함께 처리하고 있었다.
“후-.”
숨을 길게 내쉰 유진교는 연필을 들고서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
원주에 있는 지경티티엠에 들렀던 천상기는 강갑수, 조호철과 함께 충주로 달렸다.
이건 좀 과한데?
심지어 조호철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천상기의 결정은 뜻밖이었다.
“부회장님?”
“야!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냥 형이라고 불러!”
하여간 까칠한 성격은 어디 안 가는지 우유를 마신 천상기의 거친 대꾸가 있었다.
“굳이 형이 가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뭐라는 거야?”
“계열사에서 사고 난 거잖아요. 그쪽 회장이 직접 연락하고 병원에 간다면서요? 그러니까…….”
“갑수야.”
조수석에 앉은 강갑수를 뒷좌석의 천상기가 냉정한 음성으로 불렀다.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승용차 안이었다.
창밖으로 도로 옆의 가드레일과 표지가 홱홱 뒤로 밀려나는 사이에서 트럭이 안간힘을 내며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인마!”
운전하던 조호철이 룸미러로 뒤를 살필 정도로 천상기의 음성은 날카로웠다.
“부회장이라고 목에 힘 들어가고, 사람 다치는 게 별거 아니란 생각하는 순간, 너랑 나는 함께 섬에 들어가는 거야.”
아차 했는지 강갑수의 고개가 반쯤 숙었다.
“나도 그렇게 망가졌어. 다들 내게 고개 숙이니까. 내 말에 껌벅 죽으니까. 사람 하나 버려도 바로 다른 사람이 나타나니까.”
“죄송합니다.”
타악!
천상기가 손바닥으로 강갑수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리고 그 직후에 차 안의 분위기가 삭막하게 바뀌었다.
“동생이라며 이 새끼야? 형이 한 대 때렸는데 그게 기분 나빠? 그래서 인상 쓰는 거야?”
“아뇨.”
“그런데 왜 인상을 써?”
하여간 천상기는 진짜 성격 하나만큼은 절대 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네가 나선다며? 갑수 너랑 호철이, 너희 둘이 잘못 생각할 때가 있으면 나는 뒤통수를 때릴 거니까 알아서 해.”
“무섭다, 형.”
강갑수의 편안한 대꾸가 있고 나서 웃음이 흘렀다.
“오늘 내가 정말 화났던 게 뭔지 알아?”
강갑수가 상체를 뒤로 돌렸다.
“솔직히 좀 심하긴 했지. 다른 게 있었던 거지?”
“지경티티엠의 임원들이 보여준 모습이 내 과거에 비하면 훨씬 덜한 수준이더라고. 그걸 생각하니까 막 화가 나더라.”
천상기의 고백에 강갑수가 픽 웃었다.
“너는 새끼야! 형이 어렵게 말하는데!”
“내 뒤통수를 때릴 정도로 변한 거잖아. 얼른 충주에 갑시다. 병원 들렀다가 저녁은 내가 살게요. 삼겹살 어때요?”
“좋지!”
세 명이 동시에 웃었다.
각자 느끼는 바는 달랐지만, 생각은 비슷하구나 싶은 웃음이었다.
**
평창동 저택을 나선 천중명은 삼성동의 집으로 향했다.
마타르와 우즈만의 방문을 앞두고 차분하게 검토하고 싶은 자료가 있었고, 천호득이 집에 가보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삼성동의 빌라에 도착한 천중명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을 때 놀랍게도 허선영이 집에 있었다.
“어떻게 벌써 와요?”
“선영 씨는?”
재킷을 벗은 천중명이 고개를 기울여 허선영의 얼굴을 살폈다.
“울었어?”
“씻고 옷 갈아입어요. 그 뒤에 말할게요.”
“아니, 듣고 할게. 무슨 일이야?”
“차 할래요?”
“물 있어?”
천중명이 홈바에 앉는 것을 본 허선영이 건너편의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는 물병을 꺼냈다.
“평창동 엄마와 여주에 다녀왔어요.”
컵과 물병을 놓아준 허선영이 울컥했는지 눈가를 매만졌다.
“엄마가 큰어머니라고 부르라셨어요.”
고개를 갸웃했던 천중명은 내용을 짐작하고는 잠자코 있었다. 여주와 큰어머니라면 천봉서와 천상기의 어머니를 의미하는 것 외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허선영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사흘 전에 다녀가셨을 때 시간을 따로 부탁하셨어요. 불편하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고요. 내가 꼭 뵙고 싶다고 했어요.”
“기일이었어?”
“아뇨. 평창동 엄마가 유일하게 챙겼다는데 오늘이 돌아가신 큰어머니 생신이었다고 들었어요.”
잔에 물을 따르며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살아 있을 때 생일을 챙긴 사람이 서로 아픈 한 사람뿐이었을까.
왜들 그렇게 살았을까.
“아버님이 미국에 가라고 하셨을 때, 용인에 거처를 마련하고, 비자금의 비밀번호도 큰어머니가 직접 주셨대요. 그래야 그걸 노리고라도 다른 일을 못 꾸밀 거라고.”
물을 마시던 천중명이 잔을 내려놓고 바라볼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아버님 돌아가시면 그때 비자금 내놓는 조건으로 미국에 가라고. 그때도 미국에서 어렵게 살지 말라며 돈도 따로 마련해 주셨는데 대신…….”
숨을 나직하게 뱉은 뒤에 허선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외로울 때가 오면 꼭 곁을 지켜달라고 하셨대요. 돌아가시기 전에 3년은 평창동 엄마가 수발들어 드렸고요.”
허세직과 사연이 있는 어머니, 정부인을 큰어머니라고 부르라던 이은명, 그 두 사람을 보고 허선영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허선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왜 그렇게 살았는지. 평창동 엄마가 손으로 길게 자란 풀을 뜯으며 우는 걸 보는 게 너무 아팠어요. 죄송하다고, 정말 죄송하다고요.”
천중명은 슬픔이 복받친 허선영을 안고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
기다려 주었다. 허선영이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천천히 머리와 등을 쓸어주면서.
“돈을 많이 벌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무슨 짓이든 용서된다고 생각했을 시절이었잖아. 우리부터 바꾸자. 우리 둘이 이렇게 지내면서.”
천중명의 품에서 감정을 추스르던 허선영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천중명을 꼭 안았다.
“평창동에 들렀었어. 저녁을 먹고 오려고 했었는데 선영 씨가 집에 있을 거라고 빨리 가라고 하셨었거든. 아버지도 오늘이 가슴에 걸리셨던 모양이지.”
천중명은 고개를 숙여 커다란 허선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약속할게. 돈보다, 명예보다, 선영 씨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게. 나이 들어서 오래된 스웨터 입고 둘이 탄천을 함께 걷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살게.”
“왜 오래된 스웨터를 입어요?”
엉뚱한 질문에 천중명이 먼저 웃었고, 붉어진 눈을 하고 허선영이 따라 웃었다.
“선영 씨하고 추억이 담긴 옷이지 않을까?”
“말이 너무 늘었어!”
잔잔하게 웃은 천중명이 허선영을 다시 안았다.
이런 일을 알고 있어서 천호득이 나무를 그렇게 바라보았고, 떡국 먹는 것을 마다하고 집에 가라고 다그쳤던 모양이었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대신해서,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선영의 머리를 쓸어주며 천중명은 천호득의 삶을 떠올렸다.
과거로 보내준다면 천호득은 어떤 삶을 선택할까?
잠시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였다.
“나 라면 먹고 싶어요.”
“계란 넣어서?”
뜬금없는 메뉴를 말했던 허선영이 예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