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78화 (278/315)

# 278

278.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2)

평생 처음일 정도로 진한 돈 냄새를 맡은 박승양의 일정이 분주했다.

“어이구, 박 회장! 이제 나 같은 사채업자 나부랭이는 뵙기도 어렵소.”

“어서 오십시오, 변 회장님.”

지경저축은행의 회장실에 들어선 변전일이 눈매를 갸름하게 하고는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는 탁자에 가득 놓인 체리를 보고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배 모양으로 둥그런 흰색 사기그릇에 담긴 체리는 알이 굵었고, 색이 진했다.

“앉으십시오.”

“박 회장! 지경그룹에 몸담더니 이런 체리까지 마음 놓고 드시는구려!”

“푸하하하! 변 회장님의 별명이 체리 변인 걸 이 박승양이 모르겠습니까? 앉으세요!”

박승양이 과장된 손짓을 받은 변전일이 얼른 자리에 앉았다. 누렇고 얇은 점퍼, 목 부분이 닳고 닳은 체크무늬 셔츠, 길에서 파는 등산복 바지 차림의 변전일이 냉큼 체리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상품이네! 상품이야!”

그가 허겁지겁 체리를 반이나 먹을 동안, 박승양은 묵묵하게 지켜보았다.

“아니, 왜 안 드시고?”

“차를 하실까? 집에서 만든 유자차가 기가 막힌 게 있는데.”

번득 눈이 뜨인 변전일의 앞에서 박승양은 전기 포트를 누른 뒤에 커다란 병을 테이블에 놓았다.

잔도 머그잔이었다.

그 안에 박승양은 커다란 숟가락으로 뚝뚝 떠서 유자차를 반쯤 담았다. 물 반, 유자차 반, 얇게 썬 유자가 투명한 진액과 함께 머그잔에 담기자 변전일은 그걸 참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쪼르륵.

뜨거운 물을 부은 박승양이 작은 스푼을 담은 채로 머그잔을 변전일 앞에 놓아주었다.

“하! 냄새가 다르네! 냄새가!”

“집에서 만들었다니까 그러시네!”

머그잔을 든 변전일은 스푼으로 유자를 떠서 먼저 입에 넣었다. 또 그가 유자차를 반쯤 먹을 때까지 대화는 없었다.

“하! 좋았어요, 박 회장.”

추레한 모습의 변전일이 핏줄 불거진 손으로 잔을 내려놓고는 입을 쓱 닦았다.

“얼마나 필요해요?”

“변 회장님이 동원하실 수 있는 금액이 얼마나 됩니까?”

박승양의 대꾸를 들은 변전일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빛났다.

“내가 1천억 원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에이! 체리하고 유자차 날렸네!”

박승양은 실제로 체리가 남은 사기그릇과 머그잔을 손으로 집었다.

“3천억!”

“유자차나 마저 드시고 가세요.”

박승양은 왼손에 잡은 체리 그릇만 당겼다.

“6천억!”

“유자차를 좀 더 드릴까?”

극적인 변화였다.

박승양은 커다란 유리병을 열어서는 밥숟가락으로 푹 떠서 변전일의 머그잔에 유자차를 듬뿍 넣어주었다.

“8천억 다 내놓으시면 저녁에 짜장면과 탕수육 사드리려고 했는데 뭐, 6천억 원으로 하시지.”

“양장피와 전가복 추가.”

“둘 중 하나만요.”

변전일의 눈이 매섭게 흔들렸다.

“탕수육을 빼면 되지. 양장피, 전가복, 짜장면.”

“그렇게 사드리면 8천억 오케이?”

“콜!”

거래는 끝났다.

나이와 행색답지 않게 ‘콜!’을 외친 변전일이 이제야 안심된다는 듯 남은 체리를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이제 내 돈 박 회장이 다 가져간 거요. 뭐에 쓸 거요?”

“담보대출 해보려고요.”

“건물이 나왔소?”

체리의 씨를 손바닥에 뱉어낸 변전일의 질문이었다.

“대부업에서 굴릴 겁니다.”

“물건이 지저분하다는 뜻이잖소?”

“변 회장님.”

박승양이 나직하게 변전일을 불렀다.

“내가 살다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절대 없을 거라 확신할 정도로 진한 돈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뭣이? 그렇다면 탕수육까지 사시오. 그 유자차 남은 거 나 다 주고.”

“얼마를 더 내시려고?”

“1조 원 맞춰 드리지.”

“코올!”

이번엔 박승양이 시원하게 외쳤다.

그런 뒤에 그는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난데, 거 집에서 다시 가져다 놨다는 유자차 있잖아. 내가 어제 가져온 거, 그거 들고 오고, 올 때 체리 좀 사와. 그리고 저녁은 중국집에서 먹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늦지 마. 배고파지면 나는 이상하게 화가 나.”

- 예?

“왜? 싫어?”

- 아닙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싫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남부증권 문요양 회장은 박승양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역시, 박 회장님이야. 그렇게 변함없는 모습을 보니 정말 든든하오.”

남부증권의 회장인 문요양에게 저녁을 사게 하는 박승양을 보며 변전일은 오히려 안심된다는 얼굴이었다. 조 단위 돈을 굴리는 이 두 사람의 공통된 신념은 먹고 자는데 절대 내 돈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

원주에 있는 지경티티엠에 도착한 천상기를 계열사 회장과 부회장, 임원들이 맞았다.

“우선 차라도 드시고…….”

“시끄럽고. 낮에 쫓겨났다는 양반들 휴게실이 어디야?”

“저쪽에 있습니다.”

물불 안 가리는 천상기가 용역 깡패처럼 생긴 강갑수, 조호철을 대동하고 나타난 길이었다.

지경티티엠 임원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휴게실로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천상기가 온다는 말에 준비했는지 휴게실에는 새 커피포트는 물론이고 그 옆에 간단한 간식과 믹스 커피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전에 있었던 지경화재보험 사건 때 준비했던 게 분명한 탁자와 소파도 있었다.

“나, 지경그룹 부회장 천상기입니다.”

“예, 부회장님. 제가 주임입니다.”

청소 직원 중에 주임이라는 남자가 상체를 꾸벅 숙였다.

“낮에 직원 식당 못 들어갔다고 들었는데요.”

“아닙니다. 저희가 눈치가 없어서 그만…….”

“아하, 진짜!”

혹시 답을 잘못했나 싶어 나이 든 주임이 움찔한 다음이었다.

“그룹 회장님이 가장 관심을 두시는 일 중 하나가 직원들을 제대로 대우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하면 당당하게 항의하세요. 뭐가 무서워요?”

“예?”

“직급이 낮은 건 부끄러운 일 아니고. 밥 먹는 건 죄 아닙니다. 하여간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 테니 마음 푸세요.”

심지어 천상기는 주임의 손을 잡아주기까지 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해드릴까? 여기 임원들 모가지를 싹 잘라버릴까?”

“예에? 그런 건 아닙니다. 아까 오셔서 미안하다고 말씀도 해주셨고, 금일봉도 주셨습니다.”

홱, 천상기가 눈을 돌린 앞에서 임원들이 고개를 떨궜다.

“눈이 있으면 좀 봐! 당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함께 좀 살자! 함께! 능력 있어서 임원 된 당신들이! 많이 버는 당신들이 좀 더 배려하고 신경 쓰면서! 가끔 삼겹살도 사고! 문어도 대접하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천상기가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는 뒤에서 조호철이 강갑수를 힐끔 돌아보았다.

‘이 형, 좀 멋지다?’

‘그러네요.’

짧은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묵묵하게 천상기의 뒤를 지켜주었다.

**

윤만석과 헤어진 천중명은 평창동의 저택으로 향했다.

정문에 차를 세우고 익숙한 계단을 올라서자 늘 걸려있는 그림처럼 천호득이 테이블 앞에 있었다.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어쩐 일이야? 한가해?”

불뚝 건네는 천호득의 말투 역시 변함이 없었다.

“안에 인사하고 올게요.”

“요즘 바빠. 또 나갔어.”

지금 같은 표정의 천호득은 질문해봐야 절대 순순히 답을 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을 살핀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테이블의 한쪽에 앉았다.

“나 시원한 음료수 좀 부탁해.”

그런 뒤에 장만섭, 송달순과 눈인사를 했고, 음료수를 부탁했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내게? 무슨 일인데?”

“정부 관계자를 만났으면 싶습니다. 대통령과 의견을 조율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분을 조용하게 만나고 싶습니다.”

“뭐가 그렇게 조건이 많아?”

천호득이 의심스럽다는 투로 바라볼 때 송달순이 음료수를 가져왔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는 모양입니다. 내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에서 청장급이 방문하는데 그 결과에 관해 의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결국, 일이 벌어져?”

“그런 것 같습니다.”

천호득의 첫 번째 반응은 나직한 한숨이었다.

“김준후와는 연락해 봤어?”

“내일 아랍 쪽 방문이 있은 뒤에 의논해 볼 생각입니다.”

“얼마짜리 싸움이야?”

천중명의 시선을 본 천호득이 기가 막힌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렴 내가 그 정도 질문도 못 할 뒷방 늙은이야?”

“500조 원입니다.”

“많긴 많다!”

기껏 질문해서 답을 들은 천호득이 엉뚱한 대꾸를 쏟아냈다.

“내가 연락해 보고 답을 줄게.”

“감사합니다.”

천중명의 인사를 들은 천호득이 고개를 돌려 오후 햇살을 가린 나무를 쳐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천호득은 엉뚱한 나무를 바라보았고, 천중명은 음료수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안 바빠?”

“부회장이 두 명 생기니까 시간이 좀 여유 있습니다.”

“누구 앞에서 어른 흉내를 내?”

말투는 투박하기 그지없는데 천호득의 눈길은 대견하다는 느낌이었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깨끗한 싸움은 없다는 말?”

“그 말씀 덕분에 리온자동차 인수했고, 대송자동차그룹과 대송그룹이 함께 움직입니다.”

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천호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이 젊으니까 할 수 있는 싸움이야. 내가 지경그룹을 경영했다면 지금쯤 직원 숫자를 줄이느라 눈이 벌겋게 되어 있겠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의미야.”

분명히 이번 일을 앞두고 주는 조언인 것 같은데 천중명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은 50억 원을 넘어서면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감이 없어. 좀 산다 하는 사람은 1백억 원이 그래. 매달, 혹은 매해 그렇게 벌어야만 그 돈의 크기를 이해하고, 사는 모습이 바뀌지.”

“아직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람을 뿜어내는 사람처럼 “흥.”하고 나서야 천호득은 다시 입을 열었다.

“5백조 원의 싸움이라면서? 나이를 먹은 나와 젊은 회장이 그 돈을 놓고 싸우면 누가 더 조심스럽겠어?”

“거대자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들이라면 그 정도에 조심할 수준은 아닐 것 같은데요?”

“유대 자본은 피라미드 형태의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결정권이 크고 강해. 이번에 그들이 실제로 손해를 각오한 돈은 1백조 원이 안 될 거야.”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천중명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천호득이 시선을 주었다.

“나는 IMF를 몸으로 겪었어. 그들의 정체와 움직임에 관해 공부도 했고. 그들이 기대하는 건 공포야. 공포. 왜 우리가 IMF를 벗어났는지 알고 있어?”

당시의 과정이야 충분히 공부했다만, 지금 천호득이 원하는 건 그런 빤한 답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거대자본, 헤지펀드들이 놀라서였어. 금 내놓고, 고통 감당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놀랐지. 누가 죽는지 끝장을 보기보다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게 좋았던 게지.”

“그들에게 공포를 주라는 말씀이세요?”

“방법은 회장이 찾아야지.”

“이왕이면 방법도 하나 알려주세요.”

재미있다는 것처럼 천호득이 웃었다.

“이 사람아! 대통령과 통하는 정부 관계자 구해주고, 과거의 경험 설명하고, 윤 실장까지 내줬으면 나는 할 만큼 했어.”

연륜은 진짜 무섭다.

윤만석이 분명 천중명의 지시를 이야기하지 않았을 텐데 천호득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놓고는 천중명의 눈길을 외면한 채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잘못해서 지경그룹이 흔들리면 어떻게 하지요?”

“뭘 어떻게 해? 윤 실장 시켜서 섬에 가둬야지! 다시는 그런 짓 못 하게.”

“하하하!”

참으려 했는데도 천중명은 웃음을 멈추기 어려웠다. 어쩌면 저런 말을 저토록 뻔뻔한 표정으로 툭 할 수 있는 건지, 이런 재주는 정말이지 천호득만이 가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준비는 대강 했지?”

“정보는 황성규와 윤만석 실장이 애써주고, 국내자금은 박승양 회장이 대부업까지 준비했습니다.”

“아랍이 움직일 테니까 중국이 문제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다시 선문답이 흘렀다.

“사람이야 열심히 준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나머지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나.”

그런 뒤에 천호득은 다시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꺼내놓았다.

“이제 얼른 집에 가.”

“벌써요?”

“선영이 조금 뒤에 집에 도착할 거야.”

허선영의 뒷조사도 하나?

“얼른 가! 가서 손자든, 손녀든 만들어.”

홱 노려보는 천호득의 시선에는 더 이상 대꾸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매서움이 담겨 있었다.

“떡국이라도 함께…….”

“가!”

천중명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예?”

“선영이한테 한약도 보냈는데 소식이 없으니까 그렇지!”

거대자본 따위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는 투로 천호득은 엉뚱한 재촉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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