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277.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1)
유진교와 함께 도시락을 먹은 천중명은 오후 1시경에 황성규와 집무실의 소파에 마주 앉았다.
“비트코인을 이용한 거래였습니다. 중국에서 채굴한 비트코인을 쇼더앤톨먼이 구입한 뒤에 프리미엄을 붙여 일본에 넘겼습니다.”
“그렇다면 장부상에서 일본 쪽 손실이 상당할 텐데요?”
“여길 보십시오.”
복잡한 거래를 표시한 자료를 황성규가 천중명의 앞에 펼쳐주었다.
“지난번에 회장님께서 조사하라고 지시했던 일본의 자금원입니다. 비트코인의 등락률이 워낙 심해서 실제로 장부기재에 유동성이 큰 점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윤곽은 대강 나왔다.
거대자본의 앞잡이 쇼더앤톨먼에 중국과 일본의 세력이 달라붙어 함께 움직이는 꼴이었다.
천중명은 왼손의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만지며 자료를 살폈다.
“중국에서 비트코인을 채굴한 세력은요?”
“그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자료가 계속 차단되어 있어서 정확한 장소와 인물을 찾는 데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몇 번이나 눈썹을 매만지며 서류를 노려보던 천중명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박승양 회장을 협박했던 한국계 미국인 타일러 케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현재는 홍콩에 있습니다. 미국의 국채가 홍콩에서 매물로 나온 것을 보면 정황상 그 일을 처리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눈썹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천중명을 황성규가 묵묵하게 지켜보았다. 전에도 이런 적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10분이 넘도록 입을 다물고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무언가를 결정한 눈빛으로 천중명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CIA라고 치죠. 이럴 때 그쪽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죽었다던 모사드가 나타나서 국가적인 위기를 만들면?”
“암살합니다.”
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황성규는 이제야 천중명이 10여 분에 걸쳐 고민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위기에 빠질 대한민국의 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거리에 나앉고 망가질 가정을 위해, 눈앞의 젊은 회장은 암살을 고민했던 모양이었다.
“황 선생님. 테드 케블린과 타일러 케인을 제거하겠다면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결국, 황성규가 예상했던 질문이 있었다.
이래서 천중명 회장은 그룹을 천상기에게 맡길 준비를 했었던 거구나.
자칫 일이 발각되면, 그래서 누군가 살인죄를 감당해야 할 때가 오면 대원들을 앞세워서 핑계 대지 않으려고.
생각이 많았지만, 당장 소파의 상석에서 천중명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시면 저와 팀원들은 무조건 움직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동선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계세요. 아! 그리고 삼합회의 총재 진광효를 살펴보시고요.”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있으십니까?”
“홍콩물고기 황채산과 테드 케블린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천상기 부회장을 핑계로 우리 지경그룹을 흔들려 했던 적이 있죠.”
황성규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황채산이 어떻게 진광효까지 연결되는가를 알지는 못했다.
“대송자동차의 생산시설과 판매망까지 막았을 정도로 거양자동차를 밀던 그가 느닷없이 국영화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혹시 거양자동차에서 비트코인을 채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내 요구가 있었다고 쳐도 조직의 2인자 가등섭을 바로 제거한 점과 거양자동차를 국유화하려는 의도로 봐서 뭔가 수상한 점이 있지 않나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답을 한 황성규를 향해 천중명이 묘한 느낌의 시선을 던졌다.
“혹시 해킹이 가능한가요?”
“예? 회장님?”
“비트코인 채굴장을 발견한 뒤에 그들이 보관하는 비트코인을 임의의 계좌로 옮긴다거나 하는 일 말입니다.”
“확인하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싸움이 조금은 쉬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비트코인 채굴장과 거래소가 확인되면 가능 여부까지 파악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고생 부탁합니다.”
보고를 마친 황성규가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그가 놓아준 서류를 살피던 천중명은 책상을 향해 움직였다. 돈 1억에도 사람을 죽고 죽이는 세상에서 500조 원 이상의 싸움이라면 누군들 방법을 가릴 틈이 있을까?
천중명이 모사드 요원의 제거를 고민하는 것처럼 상대방 역시 문제가 되는 사람을 노릴 확률이 높았다.
책상으로 움직인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었고, 곧바로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조양회입니다, 회장님.
“바쁘니까 대송자동차와 관련된 보고서는 따로 의논하기로 하고, 양서평 부총재에게 말을 전해줘. 진광효 총재가 의심스러워.”
놀라운 소식이었는지 조양회는 당장 대꾸가 없었다.
이해한다. 진광효 총재가 의심스럽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양 부총재와 조 대표가 위험해. 주변을 특히 조심하고, 내부자 확인하는 일을 중단해.”
- 예, 회장님.
“다시 말하지만, 총재가 연결되었다면 두 사람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지금은 자세를 낮추고 안전에만 신경 써. 알았지?”
- 명심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집무실의 창을 향해 섰다.
창밖으로 길게 이어진 빌딩들의 정수리를 태양이 비추었고, 그 아래로 차들과 사람들이 그늘을 찾는 시간이었다.
똑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공정규 기획실장이 들어섰다.
고개를 돌린 천중명에게 다가온 그는 경직된 태도와 표정으로 책상 앞에 섰다.
“아랍에미리트의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 청장과 카리프 마흐무드 부청장,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즈만 왕세자가 이틀 뒤에 방문해도 되는지를 문의했습니다.”
다음 주에 미국의 금리가 인상되는구나!
천중명은 마타르가 서둘러 방문하는 이유를 짐작하고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면담은 내 집무실에서 하겠습니다. 마타르의 통역이 함께 오는지 확인해 주고, 일정을 짜주세요.”
“국빈 수준이어서 정부 당국과 언론에 적당한 사유를 알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회장님.”
“블루크루드의 양산 협의, 그리고 그때까지의 원유수급을 의논하기 위해서라고 발표하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공정규가 기획실장으로 첫 번째 보고를 마친 다음이었다.
“공 실장님. 지경그룹의 기획실을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중명의 당부를 깍듯하게 받아든 공정규가 집무실을 나섰다.
**
부회장이 된 천상기는 확실히 천중명과는 태도나 자세가 달랐다.
“당신, 진짜 인생 한번 제대로 망가지고 싶어?”
무엇보다 계열사 임원을 향한 거친 말투가 그랬다.
“동생 회장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야!”
- 예?
수화기 너머에 있는 임원은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직원들을 아끼라고! 직원들을! 내 가족처럼! 당신은 청소하는 직원들이 짐승으로 보였어? 그래서 임원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식당에 못 들어가게 한 거야?”
- 제가 지시한 게 아니라, 아래에 있는 임원이 알아서…….
“야, 이 씨!”
휴대 전화기를 든 천상기가 얼굴을 붉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거래처에서 방문했다는 이유로 청소 직원들을 식당에 못 들어오게 한다는 게 말이나 돼! 식당에서 거부당할 때 그 양반들 심정이 어땠는지 생각 안 해 봤어?”
시원시원하게 고함을 지른 천상기가 독하게 입을 비틀었다.
“좋아! 내가 알게 해주지! 내가 지금 내려갈 거니까 다들 자리에 있어! 당신들 오해하는 게 있는데! 나는 동생 회장님의 방침에 대들거나 반항하는 임원들을 그냥 못 둬!”
거칠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천상기는 인터폰의 스위치를 눌렀다.
“지금 지경티티엠에 갈 거니까 차 준비하고, 비서실에 조호철과 강갑수, 함께 간다고 알려줘.”
[네, 부회장님.]
지경 신문고에 올라온 내용이었다.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식사하러 온 청소 직원들을 막았고, 결국 그들이 라면으로 점심을 먹게 했다는 메일에 천상기의 분노가 터졌다.
“공식적인 업무는 유진교 부회장이 하면 돼! 나는 동생회장님의 방침에 따라 유 부회장이 못하는 오너의 역할을 하는 거야!”
혼잣말처럼 천중명의 지시를 되새긴 천상기가 재킷을 집어 들었다.
“동생회장님! 나 정말 열심히 산다, 진짜!”
재킷을 걸친 천상기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
갈색 머리칼에 짙은 눈을 한 서양인 테드 케블린과 천상기만큼이나 날카로운 인상의 동양인 타일러 케인이 마주 앉았다.
홍콩의 전경을 내려본다는 ‘홍콩뷰’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즈만이 아랍에미리트 마타르 청장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타일러 케인의 보고를 들은 테트 케블린이 눈가를 찌푸렸다. 서양인치고는 크지 않은 체격이었는데 군살이 전혀 없어서 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군.”
테드 케블린은 아예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룹 회장이라는 사람이 삼합회의 조직원을 엮어서 가등섭을 제거하질 않나, 우리가 추천한 대원 셋의 발목을 날려버리니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동양인 타일러 케인의 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황채산을 프로그램 매매로 날려버리고 대송자동차그룹, 이어서 대송그룹까지 손에 넣었어. 고생은 우리가 했는데 이익은 그가 다 걷어가고 있잖나.”
반쯤 마신 커피잔을 내려보던 테드 케블린이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미국 채권을 내놓은 순간부터 나와 너의 목숨이 걸렸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겠지?”
“알고 있습니다.”
타일러 케인의 답을 들은 테드 케블린이 “흠.” 하며 숨을 내쉬었다.
“이미 멈출 방법이 없어. 조만간 한국이 혼란에 빠질 때를 노려 단숨에 해치운다. 그리고 황성규, 그 인간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 천중명 회장의 눈과 귀를 가릴 필요가 있다.”
테드 케블린의 독한 눈빛을 받은 타일러 케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진광효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욕심이 너무 많아. 가진 힘에 비해 머리 회전도 둔하고. 그가 양서평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지켜보고 정리하자.”
“차라리 좀 더 판을 더 키우는 건 어떻습니까?”
조심스러운 타일러 케인의 질문에 테드 케블린이 고개를 저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를 엮었다면 가능한데 이상하게 그 둘이 천중명에게 넘어갔다. 이 싸움에 우리가 동원한 한화 5백조 원만큼의 수익을 거두는 선에서 정리해.”
지시를 마친 테드 케블린이 잔에 남은 커피를 모두 마셨다.
“황성규 쪽 눈초리를 조심해. 더 동선이 드러나는 건 곤란해.”
지시를 마친 테드 케블린이 몸을 일으켰다.
**
오후의 중간에서 천중명은 본사를 나섰다.
그리고 평창동으로 향해 집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있는 갤러리아에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예, 회장님. 그동안 소식은 모두 들었습니다.”
갤러리아 안쪽의 테이블에 있던 윤만석과 악수를 나눈 천중명이 자리에 앉았다.
몸에 꼭 맞는 정장과 하얀 셔츠, 세련된 넥타이 차림의 천중명 앞에서 윤만석이 일어나 커피를 가져왔다.
“이곳이 조용해서 좋은데 커피는 직접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내가 가져왔을 텐데요.”
정말 넓은 홀에 테이블이라고는 달랑 네 개 뿐이었다. 그나마 유리로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옆 테이블의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앞쪽에 파란 잔디가 깔린 정원, 그 너머로 평창동의 아래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갤러리아에서 천중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좋네요.”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으면 10만 원입니다. 커피는 얼마든지 드셔도 됩니다.”
“평창동답네요. 시간제한은 없나요?”
“세 시간 이상 앉아 있으려면 눈치가 보이긴 합니다.”
이제는 제법 여유가 생긴 윤만석의 대꾸에 천중명이 재미난다는 투로 웃었다.
“회장님. 제게 일을 주십니까?”
“그래 보이나요?”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여기까지 오셔서 저를 찾으실 일이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중명이 바라보는 앞에서 윤만석은 삶에 달관한 사람처럼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회장님의 전화를 받고 나서 가슴이 설렜습니다. 다음으로 대원들 얼굴에 도는 생기를 보았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게도 일을 주시겠습니까?”
언젠가 지리산에서 보았던 무거운 얼굴과 전혀 다르게 중년의 여유를 지닌 윤만석의 요청이었다.
“위험한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섬에 가라는 지시를 주셔도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다만, 천상기 부회장을 제게 맡기시지 않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하하하!”
정말이지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로 천중명은 크게 웃었다.
웃음이 지나간 다음이었다.
“황성규 선생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대신 상대의 눈에도 드러났을 겁니다.”
“제가 더 숨어야겠군요.”
윤만석이 만족한 얼굴로 천중명의 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