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276. 위기가 쏟아질 때가 기회야! (2)
책상에 앉은 천중명은 모처럼 여유 있게 메모를 살폈다.
가장 위편에 어제 있었던 신상훈 총괄사장의 인터뷰 내용이 있었고, 이어서 랠리 관련한 보도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천중명 그룹 회장님의 결단과 배려 덕분에 우승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경리온의 임직원 모두는 이번 우승을 통해 유해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자동차 시대를 위한 분명한 성과를 이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준비했던 게 분명한 신상훈의 깔끔한 인터뷰였다.
[리온자동차의 성능과 안정성, 그리고 지경그룹의 기술이 접목되어서 오늘의 우승을 이루었습니다. 고생한 모든 스태프와 드라이버 아론도 지안테, 그리고 지경그룹의 임직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천중명 회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제 유진교와 공정규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TV의 볼륨을 줄여놓았더니 그때 이런 인터뷰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 외에 랠리와 관련된 보도 내용을 살핀 천중명은 책상에 올려진 결재서류를 펼쳤다.
유진교가 5백억 원 이상, 천상기가 2백억 원까지의 결재를 책임지면서 오늘 천중명이 해야 할 결재는 달랑 하나뿐이었다.
걱정되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천중명이 모든 결재를 움켜쥘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2백억 원 수준의 결재를 일일이 체크해가며 그룹의 흐름을 공부했던 것도 이런 날을 위해서였다.
오늘 두 명의 그룹 부회장이 결재한 내용을 내일 보고서로 확인하고 잘못되었다고 판단된 부분이 있다면 따로 의논해서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 이제부터 천중명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믿지 못할 사람에게는 일을 맡기지 않는다.
맡겼다면 믿어준다.
천중명이 모처럼 느긋하게 하나뿐인 결재서류를 살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유진교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회장님. 화상회의 시간입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런데 왜 부회장님이 직접 오세요? 이런 일은 이제 기획실장에게 맡기셔야죠?”
“회장님을 모시는 일을 쉽게 넘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책상에서 일어난 천중명을 향해 유진교가 평소에 보이지 않던 표정으로 건넨 말이었다. 어쩐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는데 천중명은 가볍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의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유진교가 버튼을 눌렀고, 앞쪽 화면에 신상훈의 모습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그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고, 볼이 핼쑥했으며, 눈에 기쁨만큼이나 짙은 피곤이 담겨 있었다.
“고생했어요. 우승 축하하고.”
[회장님께서 허락해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봤어. 두 번씩이나 나를 거론해줘서 고맙고. 옆에 있는 우리 부회장이 서운하겠던데?”
[오늘도 인터뷰가 세 건 있습니다. 그때는 반드시 감사의 인사를 표시하겠습니다.]
우승한 뒤여서 여유 있는 대화가 오갔다.
[회장님. 유럽시장에서 여러 가지 제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점을 어떻게 진행할지 본사의 기본 방침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엔진을 상용화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블루크루드를 양산하려면 최소 1년, 길게 잡아서 2년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으면 그 기간을 줄일 수 있으니 생산 설비에 관한 비용을 우선 산출해 보세요.”
[이번에 들어온 제안들을 정리해서 찾아뵙고 보고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 기회에 얼굴 보면 좋죠. 고생들 많았습니다. 임직원에게 내가 감사하고, 축하한다고 전해주고, 신 사장도 휴식을 취한 뒤에 일을 진행하기로 합시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리고 작은 청이 하나 있습니다.]
회의의 마지막에 신상훈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시 포상금을 바란다면 그건 이미 발전본부에서 따로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그보다는 송구하지만, 회장님께서 수고했다는 영상 메시지를 하나 전해주시면 어떨까 하는 청입니다. 파크 피터슨 연구소장만 해도 회장님께 우승 트로피를 전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는 소감을 내놓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고맙다. 이런 요청은.
“알겠습니다. 오후에 영상을 만들어서 보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신상훈은 포상보다 더 기쁜 얼굴로 그의 마음을 전했다.
이후로 10분쯤에 걸쳐 랠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과 현지 직원들의 반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화상회의를 마쳤다.
회의실을 나선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집무실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 조양회 대표가 중국에 도착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미 정식 임명을 받은 상태여서 생산시설과 판매망을 점검한 뒤에 보고서를 올리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랠리가 끝나기 무섭게 일이 바쁘게 돌고 있었다.
“중국 정부가 어떻게 나올지 그에 관한 의견이 있나요?”
“현지에 능통한 임원들은 한결같이 이대로 곱게 양보하지는 않을 거라는 의견이었습니다. 당장 자국의 자동차 기업에 보다 많은 혜택을 주리라는 예상도 같았습니다. 거양자동차를 국유화하기 위한 검토가 이미 끝났다는 정보도 있었습니다.”
“신발과 의류 기업들이 모두 돌아올 정도의 환경이니 자동차도 조만간 그 순서를 밟게 되겠죠. 기술을 얻을 게 있다면 붙잡겠지만, 영양가가 없다고 여기면 내칠 겁니다. 우리는 그 시장에서 살아남아야죠.”
천중명이 생각했던 내용을 전한 다음이었다.
“회장님. 환율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제 7원이 올랐는데 오늘 오전에만 벌써 5원이 상승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조만간 1천3백 원을 웃돌게 됩니다.”
천중명의 반응을 살핀 유진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현상이 회장님께서 염려하시던 거대자본의 공격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환율을 우리 그룹의 힘만으로 대항할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스럽습니다.”
기획실장이 움직여야 할 화상회의를 유진교가 직접 챙긴 이유가 지금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였구나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가 지금 환율시장에 뛰어들면 지경그룹은 아마 뼈대도 안 남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준비한다던 천중명의 대꾸가 뜻밖이었던 모양이었다. 유진교가 의아한 눈으로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율은 우리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일정 수준이 될 때까지는 고통을 최대한 줄이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마저도 벅차서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힘을 빌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거대자본과의 싸움은 고통을 줄이는 수준입니까?”
“한 번입니다. 꼭 한 번,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때 숨통을 끊을 정도로 강하게 반격할 텐데, 그게 실패하면…….”
천중명은 고개를 저었다.
더는 답이 없다는 의미라는 것쯤 유진교는 충분히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의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과 눈빛이 그랬다.
“우리 정부가 나서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보유한 외화의 최고치가 4천억 달러입니다. 지금 홍콩에서 내놓는 미국 국채 수준이죠. 환율 공격은 이전의 IMF 때와는 다릅니다. 채권, 이자율, 그와 동시에 환율로 달려들면 스와프 체결 따위는 의미가 없습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지켜봐야 한다는 수준이 어느 정도 인지는 짐작하십니까?”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협조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는데…….”
천중명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했다.
“원·달러 환율이 1천8백 원, 국내 담보이자율이 8퍼센트 이상의 수준일 겁니다. 그때까지는 함부로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상상조차 안 된다는 얼굴로 유진교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다음 주에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 당장 우리 이자율은 변함이 없는데도 시중 은행은 반드시 이자율을 올립니다. 변동금리로 대출받은 서민들의 충격이 커지겠죠.”
“그럴 일이 없었으면 하지만, 생긴다면 그것이 신호탄이겠군요.”
“그들이 만들었든, 그 기회를 노리든, 환율이 그때부터 움직일 겁니다. 우리 정부의 대응을 바라면서요. 거기에 맞춰 미국 채권이 튀어나올 테니까 어느 나라도 쉽사리 우리를 돕기 어렵습니다.”
유진교가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부회장님.”
그런 유진교를 천중명이 진중한 음성으로 불렀다.
“이 싸움은 우리의 생존권과 관련 있습니다. 필리핀이 우리보다 잘살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총칼에 당하면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에 눌리면 영원히 자존심을 팔며 살아야 합니다.”
“회장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무서우니 저는 이제 정말 나이를 먹은 모양입니다. 제가 회장님의 자리에 있었다면 결코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해한다. 망할 위험을 안고 싸우느니 차라리 이 기회에 돈을 더 거머쥐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말이다.
천중명은 옅게 웃었다.
“앞으로 닥쳐올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마음먹는다면 얼마를 벌지 모를 기회이긴 하죠.”
그런데도 왜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하느냐는 것처럼 유진교는 안타까운 시선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길거리에 나앉는 전쟁인데, 그 무기가 돈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돈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죠. 그걸 적에게 돌릴까요, 아니면 궁지에 몰린 우리 국민에게 돌릴까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유진교는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천중명을 멍하니 보았다.
“지경그룹의 직원이 가정에 돌아가면 서민이 됩니다. 나는 우리 직원을 지킬 겁니다. 우리 제품을 구매해주는 고객들을 지켜낼 겁니다. 내가 이 싸움을 하는 진짜 이유, 우리에게 부를, 돈을 만들어준 이들이 우리 가족이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진교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소를 그려냈다.
천중명이 고맙고,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감동한 그의 감정이 복잡하게 담겨서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우리도 이제는 자랑스러운 국민의 기업을 하나쯤 가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나는 지경이 그런 기업이었으면 싶습니다.”
“지경그룹의 발전을 위해 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겠습니다.”
“그전에 점심 도시락 어떠세요?”
“하하하하.”
이번에 터진 유진교의 웃음은 천중명의 농담을 참지 못해서 나온 유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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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저축은행의 회장으로 임명된 박승양은 한알저축은행의 김도정 상무와 함께 집무실에 있었다.
“큼큼.”
그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계속 코를 이리저리 돌리며 냄새를 맡았다.
“혹시 불편하신 거라도…….”
“그렇게 설명해도 몰라! 돈 냄새가 진하게 나잖아! 돈 냄새가! 여기였어! 지경저축은행! 내 살다 살다 이렇게 진한 돈 냄새는 처음이야!”
지금의 김도정은 박승양의 저 말이 단순히 현찰에서 풍기는 구리구리한 냄새가 아니란 것쯤은 안다. 다만, 도대체 박승양이 말하는 그 돈 냄새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까지 내가 맡은 돈 냄새가 된장 수준이었다면, 여기에서 나는 냄새는 청국장이야! 청국장!”
심지어 박승양은 김도정이 지금껏 보지 못했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명동에서 어음 심부름을 하던 시절에는 말이지. 쌍둥이라는 것도 있었어.”
김도정도 듣기는 했었다.
종이 어음 시절에 있었던 편법이었다.
상장사에서 발행한 어음을 담보로 잡은 사채업자가 그와 똑같은 어음을 만들어서 은행권이나 금고에서 다시 싼 이자로 돈을 돌리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어음을 손에 쥘 때 알았어. 돈 냄새가 진한 어음이 따로 있었거든. 사람도 마찬가지야.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풍기는 냄새가 달라.”
박승양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김도정과 단둘이 있는 집무실을 살피고 살폈다.
“기회가 왔어. 내 평생을 통틀어 상상도 못 했던 돈이 돌고 그걸 벌 기회.”
심지어 박승양은 소름이 돋는지 팔을 엇갈려 팔뚝을 문지르기까지 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걷는 건 알지?”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김도정이 눈에 힘을 주고 박승양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 직후였다.
“파란 우산, 깜장 우산, 찢어진 우산, 이렇게 셋이서 좁다란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그 셋이 나중에 어떻게 돼?”
“예?”
“에이! 이건 뭐 말이 통해야 뭐라도 해먹지!”
“죄송합니다.”
뒤통수를 긁는 김도정을 향해 박승양이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좁다란 학교길을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하며 걸어가잖아!”
“예! 그런데 그게…….”
“학교에 도착하는 거지! 학교에! 아침에 학교 길을 걸어가는데 아무렴 오락실을 들르겠어? 떡볶이집에서 오징어눈깔을 주문하겠어!”
김도정은 아예 학교 가는 길을 잃어버린 아이의 심정으로 그저 박승양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기가 쏟아질 때가 기회야! 학교가 기회란 뜻이라고! 어떻게 할래? 까만 우산 쓰고 준비 단단히 하고서 기회를 잡으러 갈래? 아니면 비에 홀딱 젖은 채로 기회를 놓칠래?”
그게 이런 뜻이 되는 건가?
“회장님께서 준비하신 기회가 오고 있다. 김도정 상무.”
“예? 예.”
바보같이 대답하는 김도정을 놔둔 채 박승양은 고개를 비틀었다.
“우산을 준비해야 돼! 우산을! 그래서 지경그룹이란 학교에 들어가야지! 이 박승양이 천중명 회장님을 모시고, 제대로 가야지!”
박승양은 무대에 선 주인공처럼 허공을 향해 혼잣말 같은 각오를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