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275. 위기가 쏟아질 때가 기회야! (1)
통쾌하게 달린 지경리온의 신화가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이었다.
뿌우우-.
투박한 사이렌이 힘겨웠던 다카르 랠리의 끝을 알렸고, 그와 동시에 스태프들이 일제히 뛰어나왔다.
“와아-!”
신화를 감싼 지경리온의 스태프들이 운전석에서 내리는 아론도 지안테를 들어 하늘로 던지자 그 모습을 잡기 위해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우승이야! 우승!”
결승선에서 하늘로 양 주먹을 든 신상훈에게 파크 피터슨이 달려들었다.
“우리가 해냈어요! 우리가 우승했다고요!”
파크 피터슨을 끌어안은 신상훈이 그의 등을 두드릴 때였다. 이번엔 스태프와 아론도 지안테까지 달려들어서 신상훈을 들었다.
“휘오!”
하늘 높이 떠오른 신상훈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높다랗게 떠올랐다. 진바지에 하늘색 셔츠 차림의 신상훈이 하늘을 배경으로 떠오른 모습을 방송카메라가 잡았고, 그 모습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퍼졌다.
천중명은 집무실에서 유진교 그룹 부회장, 최만호 대송자동차그룹 회장과 함께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었고, 우승 장면을 지켜보았다.
“신상훈 총괄 사장이 멋지게 약속을 지켰네요.”
천중명의 말에 유진교와 최만호가 흐뭇한 표정으로 TV를 지켜보았다.
“자 그럼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천중명은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줄였다.
“오전에 보았던 추천서대로 공정규 부실장을 기획실장으로 임명하겠습니다. 나머지 인선은 부회장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예, 회장님.”
천중명은 유진교가 추천한 공정규 기획실장의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거양자동차에 협조 공문도 바로 발송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천중명은 오랜만에 보는 최만호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최만호 회장님. 우리 지경은 두 가지 자동차 브랜드를 가졌습니다. 앞으로 지경리온은 고급 브랜드, 대송자동차 그룹은 실용적인 차량, 이렇게 구분하겠습니다. 최 회장이 그 전반적인 업무를 진행해 주세요”
“예, 회장님.”
최만호는 이미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천중명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지경리온이든, 대송자동차든, 국내 가격이 전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저렴해야 합니다.”
“그 점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 판매 가격을 그렇게 책정했을 경우, 대송자동차그룹의 이익이 70퍼센트가량 줄어들게 됩니다.”
“각오한 부분이니까 감당해야죠.”
최만호의 조언을 천중명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 가지 더. 공산품은 불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고객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보다 수준 높은 자동차로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동안 대송자동차는 독과점에 가까운 국내 시장을 담보로 방만했습니다. 기술과 가격으로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동차가 해외에서 인정받을 수는 없습니다.”
TV에서는 기자가 내민 마이크를 향해 신상훈이 감동적인 표정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싼 가격만으로 승부하는 시장은 이제 세계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는 자동차, 내가 원하는 지경의 자동차는 그랬으면 싶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거의 끝났다.
“조만간 아랍에미리트에서 마타르 청장의 방문 요청이 있을 겁니다. 비서실에서 통보가 오면 일정을 조율해서 최대한 협조해 주세요.”
“예, 회장님.”
천중명의 마지막 지시를 끝으로 유진교와 최만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랠리가 끝나고 베이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양서평은 조양회와 함께 심각한 얼굴로 마주 앉았다.
“총재의 속뜻을 모르겠어. 거양자동차를 국유화해서 트럭 부분을 지경에 넘기지 않겠다는 건데 갑자기 왜 그렇게 나오는 건지 알 길이 없거든. 가등섭을 제거한 마당에 내가 함부로 반대 의견을 내세우기도 어렵고.”
양서평은 커다란 고개를 갸웃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노려보았다.
“천중명 회장님은 또 무슨 생각이신지도 모르겠고.”
양서평의 앞에 앉은 조양회 역시 천중명의 의중을 짐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지시는 간단했다. 류효양이 찾아오면 랠리에 우승해서 중국 인민의 자부심을 높이라는 말만 전하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면 지경리온이 우승한 오늘까지 류효양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빌빌거릴 뿐이었다.
“너는 돌아가는 대로 대송자동차를 맡아. 그리고 그 뒤로는 당분간 나에게 연락하지 마.”
“형님?”
“아무래도 총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가등섭을 노릴 때 나도 어찌하려 했는데 시선이 두려웠을 수 있다. 한국에서 온 대원들도 걸렸을 테고.”
양서평이 퉁방울 같은 눈을 들어 조양회를 노려보았다.
“만약, 천 회장님이 알아보라던 홍콩물고기 건이 총재의 지시였다면 우리 둘 다 목숨을 유지하기 어렵다.”
“차라리 천 회장님께 있는 대로 말씀드리고 지시를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서평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홍콩물고기와 연결됐던 놈을 알아본 뒤에 말씀드리는 것이 옳지. 만약 총재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면 공연히 혼란만 생길 수 있으니까.”
“본국에 돌아간 뒤에 총재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저보다는 형님이 위험하시지 않겠습니까?”
“쉽지 않을 거다. 나까지 없어지면 당장 총재의 앞을 막아줄 사람이 없어. 그러니 당분간은 괜찮을 텐데 문제는 정말 총재가 홍콩물고기를 연결한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양서평이 오른손을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문지르며 잠시 침묵했다.
“회장님께 분명 복안이 있을 거다. 그러니 일단 지시한 대로 따르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귀국하면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늘 경호원과 함께 다녀.”
“예, 형님.”
“앞으로는 부총재라고 불러. 대송자동차의 중국 법인 대표가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좋은 모습이 아니다.”
“예. 부총재님.”
양서평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찻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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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원은 대원들과 함께 모여 앉았다.
신상훈이 양주를 두 병이나 넣어주었는데 아직 임무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탓에 아예 손도 대지 않은 채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천상기 저축은행 회장이 그룹 부회장이 되었답니다. 우리는 돌아가는 대로 지경그룹 구급대로 발령 난다고 들었습니다.”
“구급대? 그게 뭐야?”
“용인에서 있었던 크레인 사고나 이번에 굴뚝 사건 같은 경우에 출동하는 역할이랍니다. 우리가 지냈던 섬을 아예 매입할 거라던데요. 거기에서 대원들 훈련시켜서 구급대를 전국에 만들겠답니다.”
그게 말이나 되나?
추일원의 표정을 본 대원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천상기 그룹 부회장과 함께 지내고 있답니다. 섬을 매입하는 문제를 직접 알아보라고 했다던데요.”
이 정도면 안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룹 회장님은 무슨 생각이신 거야? 왜 우리를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시는 거지?”
“아무래도 곽 선배가 부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
이제야 추일원은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감탄을 뱉어냈다.
대원들 일이라면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는 곽대출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그리고 천중명의 심복이 분명한 곽대출의 간곡한 부탁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곽 선배는 진짜 변함이 없네.”
추일원의 말에 대원들이 모두 고마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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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리에 우승하고 가장 큰 반응은 역시나 블루크루드와 전기엔진, 그리고 변형이 가능한 지경전자의 배터리였다. 랠리에서의 성과가 보도되면서 세계 각지에서 양산에 관한 문의가 줄을 이었다.
다음 날, 천중명이 출근하기 무섭게 유진교가 공정규 신임 기획실장과 함께 집무실을 찾았다.
“회장님. 공정규 신임 기획실장입니다.”
“반가워요.”
천중명이 내민 손을 공정규가 공손하게 잡았다.
사십 후반으로 아이비리그 출신의 엘리트였는데 외모는 투박하기 그지없어서 건설 현장에 근무하는 소장 느낌이었다.
“앉으세요. 커피 괜찮습니까?”
“예, 회장님.”
천중명은 두 사람과 함께 소파에 앉은 뒤에 부속실 직원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새벽에 아랍에미리트에서 방문일정에 관한 협조 요청이 있었습니다. 살펴보시고 결재해 주시면 바로 통보하겠습니다.”
유진교는 천중명 앞에 결재판을 내밀었다.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놓아준 다음이었다.
“신상훈 지경리온 총괄사장이 화상회의를 신청했습니다.”
유진교가 두 번째 보고를 꺼냈다.
“시간을 10시쯤으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통보하겠습니다.”
“커피 드세요.”
천중명이 권하면서 세 사람이 잔을 들었다.
“공 실장.”
“예, 회장님.”
“내 경영 방침은 알고 있죠?”
“직원들이 행복한 기업, 그리고 그 직원들이 고객에게 최선을 다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투박한 외모와 달리 의견을 내놓는 공정규의 눈빛은 그가 왜 기획실의 부실장까지 임명되었는지를 증명하고 남을 만큼 날카로웠다.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 겁니다. 임원들이 힘겨울수록 직원들이 편합니다. 우리 지경은 부조리와 비리가 없어야 하고, 시스템이 정착되어서 누구나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우받아야 합니다. 앞으로 기획실이 그런 지경을 만드는데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장님.”
공정규가 단단하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최만호 실장까지 밖으로 나간 마당에 이제 부회장님을 뵐 기회마저 줄어들 것 같아서 서운한데요?”
천중명이 농담처럼 아쉬움을 전하자 유진교와 공정규가 비슷한 표정으로 옅게 웃었다.
**
황성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팀장님! 여기요! 잡았습니다! 여기요!”
지금껏 함께 활동한 세월이 있다.
제임스 김이 저렇게 소리를 지를 정도라면 저건 절대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풀이 죽어 있던 팀원 전체가 우르르 일어나 황성규와 함께 제임스 김의 책상으로 달려들었다.
“쇼더앤톨먼입니다! 이 새끼들이었어요!”
제임스 김은 마우스의 화살표를 움직여서 계좌 번호 여러 개를 파란색으로 물들였다.
“여기 이 계좌는 기억하시죠?”
황성규가 급한 마음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사드 출신의 테드 케블린이 움직인 계좌라는 걸 여기 있는 팀원들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계좌로 들어온 돈의 출처를 알지 못해서 끙끙댔을 뿐이었다.
“깜깜이 거래입니다.”
“누군데?”
전산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도 도저히 자금이 추적되지 않는 거래가 있는데 그걸 해외에서는 ‘블랙트레이드’라고 표현했고, 국내에서는 ‘깜깜이’라고 부른다.
“회장님이 주신 일본 돈의 정체를 캐다가 찾았습니다. 여기 보세요. 여기 단기 자금! 일본의 비트코인 거래소에서 나왔습니다.”
마우스를 움직인 제임스 김이 화면 하나를 새롭게 펼쳤다.
“중국에서 채굴한 비트코인을 일본에서 샀습니다. 중국의 거래소에 입금된 돈이 다시 쇼더앤톨먼의 테드 케블린의 계좌로 들어간 거죠.”
“비트코인 매입 대금이었다는 거야?”
“장부상으로 비트코인인데 현금거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실제로 쇼더앤톨먼으로 보낸 건 비트코인입니다. 이걸 일본에서 현금으로 바꾼 겁니다. 장부와 다르게 현금을 돌린 거죠.”
황성규가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복잡한 거래였다.
“현금이라고 하고는 비트코인을 보내 일본에서 다시 현금으로 바꾼 겁니다. 이러니 이름이나 계좌가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돈은 돌았는데 입금은 비트코인을 환전한 것으로 나오니까요!”
황성규는 지금껏 쌓였던 갑갑함이 단숨에 벗겨진 얼굴로 모니터에 집중했다.
“이제 넌 끝났다! 테드 케블린!”
그가 책상에 팔을 짚은 자세로 으르렁거릴 만큼 확실한 자료였다.
“비트코인을 이렇게 돌리니 방법이 없었지! 후! 이제 중국의 거래처만 잡으면 되겠다.”
사설 비트코인 거래소를 통해 오간 거래에 가명과 차명계좌를 이용하고 있어서 정말이지 흔적을 찾는다는 게 불가능한 거래였다.
“회장님은 어떻게 이걸 짐작하시고 일본의 자금처를 알아보라고 하셨을까요?”
제임스 김의 질문에 황성규가 기가 막힌 얼굴로 웃고 말았다. 일본에서 들어온 자금을 알아봐 달라는 지시에 전산을 뒤지다가 중국과 연계된 자금을 찾았으니 솔직히 누구보다 황성규가 더 궁금한 내용이었다.
“홍콩에서 미국 채권 거래에 이 현금이 이용되는지 확인하고, 원·달러 환율 거래하는 업체 파악해서 뽑아. 이 정도면 얼추 윤곽이 나오겠다.”
“확인하겠지만, 이 정도면 주포는 쇼더앤톨먼이 확실해 보입니다.”
“정확한 자료가 필요해.”
“두 시간만 기다리십시오.”
제임스 김의 어깨를 다독인 황성규가 자세를 세운 뒤에 커다랗게 숨을 뱉어냈다. 지경그룹의 천중명 회장에게 몸을 의탁한 뒤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