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274. 어떻게 할래? (2)
먹통이 돼버린 운전석 위의 계기판을 아론도가 검지로 두드렸다. 유해물질의 배출 수치를 표시하는 계기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위로 넓어지는 와이파이 표시와 파란색 숫자들이 올라와 있어야 했다.
추일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아론도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는 뒤편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내려서 살펴보자는 의미였다.
아론도를 따라 안전벨트를 푼 추일원은 대원과 함께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론도를 따라 트럭의 뒤로 걸어간 추일원은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배기구에 연결된 유해가스 점검장치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아론도가 먼저, 추일원이 뒤따라 자세를 낮추고 살펴본 점검장치는 돌로 아예 짓이겨 놓은 모양새여서 수리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유해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승을 장담했었다. 어제까지 14일을 유해가스 배출 없이 달렸으니 오늘 하루쯤 그냥 달린다고 해도 주최 측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
틀림없이 마지막 날에 측정되지 않았다며 이 엄청난 기록을 깎아내리는 말들이 돌 게 분명했다.
몸을 세운 추일원이 어떻게 할 거냐는 투로 아론도를 바라보았다. 두 시간을 앞서 있으니 기계를 교체하려면 그 안에 해결해야 했다.
두두두두두두!
확실한 우승후보인 지경리온의 신화를 따라붙은 헬리콥터를 아론도가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결심한 얼굴로 허벅지에 달린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냈다.
TV 화면에 나오는 신화의 모습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헬리콥터의 진동을 이겨내며 쭉 달려간 카메라에 무전기를 든 아론도와 그 옆에서 장치를 확인하는 추일원의 모습이 잡혔다.
[강력한 우승 후보 지경리온의 신화가 멈춰 섰습니다!]
[화면으로 보기에도 경사가 대단한데요. 조금 전에 미끄러지면서 문제가 생긴 건가요?]
[현재 드라이버와 스태프 두 명이 내렸습니다. 무전기를 통해 교신 중인데 아직 정확한 이유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헬리콥터에 탄 기자가 상황을 전했는데 역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안타까운 상황인데요! 부디 큰 고장이 아니길 바랍니다!]
앵커의 바람이 전해지는 동안 헬리콥터는 지경리온의 신화 위쪽을 커다랗게 맴돌았다.
[조금 전에 신화의 드라이버 아론도 지안테에게서 무전 연락이 있었습니다. 유해물질 확인장치가 망가져서 더는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내용입니다.]
[오른쪽 위의 저 숫자 말이지요? 유해물질의 측정이 어렵다고 해도 주행에는 변함이 없는 것 아닙니까? 아직 랩 타임에 여유가 충분해서 이대로 출발하면 우승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물론 우승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경리온은 유해물질이 전혀 배출되지 않는 우승을 선언했기 때문에 거양자동차와의 계약을 비롯해 세계 시장을 향해 내세운 약속을 끝까지 증명하지 못했다는 약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소식인데요! 그렇더라도 우선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스튜디오에서 앵커가 질문을 건넸을 때, 화면은 우승을 위해 달려야 할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직후였다.
[놀라운 소식입니다! 신화의 드라이버 아론도 지안테가 연료 탱크의 연결을 끊겠다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기자가 흥분한 음성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을 전했다.
[우 기자? 연료 탱크의 연결을 끊는다고 했습니까?]
오른쪽 아래 작은 화면에 담긴 앵커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대놓고 고개를 비틀었다.
[블루크루드를 사용해 주행을 계속할 경우, 유해물질을 배출한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에 연료탱크와 연결된 밸브를 차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연료 탱크를 차단하면 어떻게 주행한다는 겁니까? 이점이 납득하기 어려운데요?]
두두두두두두두.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무전기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주최 측과 아론도의 음성이 오갔다.
[지경그룹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지경전자가 개발한 차세대 배터리를 설치했다는 설명입니다! 트럭의 화물칸을 덮은 덮개가 배터리라는 놀라운 말도 있었습니다.]
[우성한 기자! 그렇다면 지금 보이는 저 덮개가 배터리란 말인가요? 우리가 알던 배터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요?]
[정확한 내용은 랠리를 마친 뒤에 확인해야겠지만, 신화의 드라이버 아론도 지안테는 분명 화물칸을 덮은 덮개가 배터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 지금 주최 측이 연료탱크의 연결부위를 차단하는 것을 허가했습니다!]
저 아래에서 아론도가 무전기를 들고 헬리콥터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운행을 멈출 때까지 유해물질이 배출되지 않았다는 점도 인정했습니다.]
무전을 마친 아론도는 연장을 꺼내 누운 자세로 연료통 아래로 들어갔다. 굉장히 어려운 일처럼 여겨졌는데 육각 볼트 두 개를 조인 것이 전부였다.
“렛츠 고우!”
몸을 빼낸 아론도가 고갯짓으로 추일원과 대원을 불렀다.
차에 오른 세 사람이 벨트를 걸고 난 다음이었다.
달칵. 달칵. 달칵.
아론도가 스위치 세 개를 연달아 올리자 계기판에 파란색 숫자가 피어났다. 물론 블루크루드를 사용할 때도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위이잉. 철컹! 우웅. 철컹!
그렇더라도 지금 신화의 주행은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엔진 소리가 전혀 없이 달리는 트럭이라니, 심지어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추일원은 고개를 돌려 뒤에 앉은 대원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놀란 눈치였다.
드드득! 드득!
대신 바퀴가 밀리는 소리는 좀 더 생생하게 들렸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는 지경리온의 신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 거대한 트럭이 지경전자의 배터리와 구동장치를 이용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와-!”
기자의 흥분한 음성이 나오는 순간, 지경전자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주먹을 움켜쥐었고, 앞으로 움직인 기용도는 멍하니 TV를 보고 있던 개발자 이관수의 어깨를 붙들었다.
“부회장님?”
“저렇게 멋진 배터리를 개발해 놓으시고 왜 그런 얼굴을 하세요?”
“고맙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저기 운전석 뒤의 공간이 모두 배터리라는 걸 알면 기자분이 기절하겠는데요? 랠리가 끝나면 정식으로 발표할 예정이니까 각오 단단히 하세요. 발표회장에 함께 나갈 겁니다.”
기용도가 넉넉하게 웃어주었을 때였다.
상무가 급하게 연구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부회장님. 기자들이 몰려들어서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랠리 이후에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고 답을 했는데도 워낙 막무가내입니다.”
기용도는 먼저 ‘보셨죠? 우리 해냈습니다.’하는 표정으로 이관수를 보았다.
“그 외에도 해외에서 배터리에 관한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무시할 수 없는 거래처는 아무래도 부회장님께서 통화해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관수를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남긴 기용도가 상무와 함께 움직였다.
**
천중명은 송문철 지경증권 회장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시원한 음료를 앞에 둔 다음이었다.
“본격적인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환율의 변화, 일본에서의 송금, 그리고 미국 국채의 매도입니다.”
천중명이 각오했던 일들이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 주에 미국의 금리가 인상된다면 회장님께서 예상하셨던 현상이 나올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빠르군요.”
천중명은 송문철이 놓아준 자료를 무거운 얼굴로 살폈다.
“랠리가 끝나는 대로 아랍에미리트의 마타르 청장이 방문한다고 했으니 함께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죠.”
천중명의 말을 들은 송문철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 혹시 두 분의 부회장을 임명하신 것이 이번 일을 준비하신 겁니까? 최악의 상황에도 그룹이 유지될 수 있도록 미리 임명하신 것인지…….”
말을 하던 송문철이 아차 싶었던지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외람된 말씀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회장님의 안위를 염려하고, 지켜드리고 싶은 생각에 여쭤봤습니다.”
나이 있는 회장이 고개를 떨구고 미안한 심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세요. 그리고 염려하는 사태가 생긴다면 무조건 내가 거부하지 못할 지시를 내렸다고 진술하세요.”
“회장님?”
떨어져 있던 송문철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
“그렇다고 순순히 당할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다만, 사람 일이란 게 늘 예상 밖의 일이 생기는 법이어서 최악의 사태를 준비하는 거죠. 이 거래를 통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경고하는 겁니다.”
송문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경그룹. 그리고 유진교 부회장, 송문철 회장님과 같이 능력 있는 임직원이 있는 한, 거대자본 아니라 세상 없는 것이 노려도 우리 경제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줄 생각입니다.”
졌다는 투로 송문철이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우선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계세요. 마타르 청장과 회의를 마치면 바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예, 회장님.”
송문철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소파에 앉은 천중명은 천천히 서류를 다시 살폈다.
그런 뒤에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 황성규입니다, 회장님.
“일본에서 2조3천억 원이 들어왔습니다. 소액신용대출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투자하는 방식인데요. 내가 지금 사진으로 보낼 테니까 이 자금의 출처를 정확하게 파악해 주세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송문철이 보고한 내용을 휴대 전화기로 찍어서 황성규에게 보내주었다.
“후-.”
일이 번쩍번쩍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하나라도 삐끗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는 싸움에서 잽을 날린 상대방이 이쪽의 반응을 살피는 느낌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책상으로 움직여 TV를 켰다.
지경리온의 신화가 먼지를 길게 올리며 달리는 모습이 헬리콥터에서 잡은 영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배터리 기술을 보여줄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돌에 찢긴 유해물질 감지장치 덕분에 랠리의 모든 관심이 지경전자의 새로운 배터리에 쏠렸다.
TV를 향해 의자를 돌려 앉은 천중명은 책상에 몸을 기댄 자세로 화면을 지켜보았다.
돌산을 넘은 지경리온의 신화는 정말이지 멋지게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래?
저렇게 달려서 우승을 차지하는 지경리온의 트럭을 두고 너희는 어떻게 할 건데?
거양자동차를 국영기업으로 바꾸려는 삼합회의 총재와 거양자동차그룹 류서열 총수, 당신들이 날 돕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한데.
지금 저 TV를 잘 봐둬.
엔진 소리조차 없이 우승을 향해 달리는 지경리온의 트럭 신화가 바로 지경그룹과 도깨비 회장의 모습일 테니까.
픽 웃은 천중명은 몸을 돌려 책상 위의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아직 읽어야 할 리포트가 좀 더 있었다.
**
전기로 움직이는 엔진은 블루크루드를 이용하는 엔진과 소리부터 느낌까지 전혀 달랐다.
위잉! 철컹! 위이이이잉.
가벼운 모터소리와 함께 기어변속이 이루어지고 나면 머리가 뒤로 홱 젖힐 정도로 가속이 이루어졌다.
“하아!”
추일원은 감탄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의 웃음을 터트렸다.
미칠 듯이 자랑스럽다.
유해물질 점검장치가 박살 난 것을 보았을 때의 좌절을 단숨에 환호로 바꿀 정도로 완벽한 준비였고, 심지어 성능마저 워낙 뛰어나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이 피어났다.
별 활약은 못 했다만, 그래도 지난 14일을 함께 달렸던 신화에 이런 능력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마지막 순간에도 거칠 것 없이 튀어나가는 트럭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했다.
추일원은 턱없이 왼손을 들어 엄지를 세웠다.
감정은 같았나 보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중간 뒤편에 앉았던 대원이 주먹을 내민 뒤에 역시나 엄지를 치켜세웠다.
“시나! 우승!”
아론도 지안테가 오른손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어설픈 우리말도 ‘신화! 우승’이라고 외쳤다.
우이이이이잉! 덜컹!
돌산을 넘어서자 끝이 없을 것처럼 넓게 펼쳐진 벌판을 신화는 정말이지 미친 듯이 달렸다.
이 15일의 주행을 위해 신상훈은 얼굴이 반쪽이 되도록 매달렸고, 각 파트를 담당했던 스태프들 역시 피곤에 절었을 정도로 노력했다.
국도, 벌판, 진창길, 돌산을 넘으며 두 시간의 간극을 만들어낸 아론도 지안테도 있다.
단지 돈을 버는 게 전부라고 여겼던 기업에 이런 열정과 보람, 긍지, 감동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었다.
추일원은 이제야 곽대출이 목숨 걸고 천중명을 따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상훈이 왜 그토록 그룹 회장을 존경하는지도.
이런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배터리와 전기 엔진을 설치하는 꼼꼼한 판단, 대원들을 보내 이곳을 지키게 하는 배려, 그리고 직접 달려와서 강갑수와 조호철을 구해내는 강단을 갖춘 그룹 회장이라니.
미치지. 그런 남자라면.
위이이이이잉-!
추일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지경그룹의 신화가 전기 엔진 소리를 좀 더 높이며 무섭게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