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273. 어떻게 할래? (1)
출근한 천중명이 재킷을 벗어두기 무섭게 두 명의 신임 그룹 부회장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유진교와 아직 어색하게 인사하는 천상기였다.
“앉으세요.”
천중명은 두 명에게 소파를 권하고 함께 앉았다.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놓아준 다음이었다.
“형은 앞으로 그렇게 인사하지 마.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야. 혹시 방송 카메라가 있어서 정 곤란하면 그저 고개만 숙이는 정도로 직급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는 거로 끝내.”
“그래도 되겠어?”
“말투부터 고치라고 해줘? 존댓말 쓰라고?”
“그건 아니다, 진짜!”
역시 천상기였다. 그의 뻔뻔한 반응에 천중명과 유진교가 실없는 표정으로 웃고 말았다.
“부회장을 맡겼다고 가족의 서열이 바뀐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불편하게 하지 마.”
“알았어.”
어쩐 일인지 천상기의 답은 반 박자 느리게 나왔다.
힐끔 그를 바라보았던 천중명은 다시 생각해두었던 지시를 꺼내 들었다.
“각자 맡은 계열사는 확인했을 테니까 긴말 할 것 없고, 앞으로 계열사에서 올라온 5백억 원까지의 사업은 두 분이 알아서 처리하고 보고서만 올려주세요.”
“예, 회장님.”
나직한 음성으로 유진교가 답을 한 다음이었다.
“동생회장님. 내가 계열사를 충분히 살피는 데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나도 동생회장님처럼 2백억 원까지만 결재하면서 분위기를 살필게. 당분간만.”
전 같으면 권한을 좀 더 행사하겠다고 날뛰었을 인간이 겸손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천상기는 변했다. 그러니 이런 요청은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그럼 2백억 이상은 내가 결재할 테니까 대신 시간을 줄여줘.”
“알았어.”
결재서류의 범위가 정해졌다.
“오늘 랠리가 지경리온자동차의 우승으로 끝나면 곧바로 거양자동차에 공문을 발송하세요. 계약대로 트럭 부분 인수와 관련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내용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다만, 거양자동차와 중국 정부의 불편한 행동을 감안해 적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선에서 협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천상기와 달리 유진교는 묵직한 음성으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을 인수하려 들면 우리는 반드시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좋은 방법이긴 한데 당분간은 약속을 지키라는 쪽으로 밀어붙이세요.”
또 뭔가 계획이 있구나, 하는 시선으로 유진교가 지시를 받았다.
“발표문 초안과 기획실장 후보자의 서류를 가지고 오전 중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형은 오늘부터 계열사 순시하고.”
짧은 회의가 끝났다.
“유진교 부회장은 먼저 좀 일어나지? 내가 동생회장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예.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천상기의 요청에 유진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이 인간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천중명은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천상기가 말을 꺼내놓기를 기다렸다.
“할 말 있다며? 집무실이 마음에 안 들어?”
유진교는 당분간 그룹발전본부의 방을 그대로 사용하고, 천상기는 같은 층에 꽤 넓은 집무실을 준비했다.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냐. 너무 넓어.”
“집무실을 줄여달라는 건 아닐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천중명의 독촉에도 천상기는 입맛을 다시며 머뭇거렸다.
“여자가 생겼어? 아니면 혹시 강갑수인가 하는 대원에게 사랑을 느껴?”
“아, 진짜!”
인상을 팍 찌푸렸던 천상기가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섬에서 말이야.”
천중명의 얼굴을 힐끔 보았던 천상기가 결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생각 많았거든. 죽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고. 그러다가 생각난 게 있어. 마음만 먹으면 날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환경인데 아버지와 동생회장님이 왜 이렇게까지 할까, 그런 거.”
솔직하게 속을 털어놓는 것이 힘든 모양이었다.
강단 하나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천상기가 자꾸만 손을 매만졌다.
“그때 갑수가 나를 감싸줬던 거야. 정말은 아버지와 동생회장님도 이렇게 해주고 싶은 걸 텐데, 그래서 죽이지 못하고 이렇게 섬에, 이 사람들과 함께 가둬둔 거겠지, 하는 생각도 했고.”
손을 바라보며 말을 하던 천상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로 끔찍해. 형수와 있었던 일, 아버지를 노렸던 일, 용인 사건, 나도 내가 징그러울 정도야. 그거 다 용서하는 거지?”
천중명은 먼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렸던 거야. 형을 지켜달라고, 형을 다치게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천상기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다음은 대원들의 보고를 들었고. 굴뚝에 올라갔을 때부터 믿기로 했어. 한 가지는 분명하지. 형이 지은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
천상기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 죄를 갚으며 살아. 직원들이 곤란한 일에 빠졌을 때 나보다 먼저 형을 찾게 만들어. 그게 완성이야.”
“무슨……? 뭐를 완성하는 건데?”
“그건 나중에.”
“에이, 진짜!”
죄를 반성하던 천상기가 단박에 원래의 모습을 찾으며 불만을 토해냈다.
“형.”
일어나는 천상기를 천중명이 불렀다.
“형이 갑수 보고 싶어 하는 만큼, 갑수를 보면 좋은 만큼, 아버지도 형이 보고 싶고, 보면 좋을 거야.”
따귀를 한 대 맞은 얼굴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잠시 멈춰 있던 천상기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
마지막 하루를 준비하는 베이스 기지는 전쟁통의 한복판 같은 분위기였다.
이미 일곱 대의 트럭이 주행을 포기할 정도로 거친 길을 14일 동안 달렸다. 이리저리 패고 긁힌 자리는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고, 교체한 부품도 상당했다.
“하부 보강 확인했습니다!”
“자신 있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리온자동차의 베테랑들은 이미 이 랠리에 여러 번 참여했었다. 그래서 돌산을 통과하는 마지막 일정에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아아앙!
먼저 출발하는 트럭의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동안, 점검을 마친 신상훈은 신화의 운전석을 매만졌다.
마지막으로 출발한다.
우승이 확실한 트럭이 가장 뒤에 출발해서 영광을 차지하는데 이번 랠리의 주인공은 지경리온의 신화였다.
고맙다. 고생했다.
운전석을 시작으로 라디에이터, 조수석,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난 신상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아론도 지안테와 추일원, 그리고 대원 한 명, 파크 피터슨이 다가왔다.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최고입니다. 다른 걱정하지 마시고 결승선에서 기다리십시오. 아! 우승 축하 샴페인을 잊으시면 다시는 지경리온과 계약하지 않을 겁니다.”
신상훈의 어깨를 툭 쳐준 아론도가 운전석에 올랐다.
“부탁합니다, 팀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추일원과 대원 한 명이 조수석으로 올라가자 신상훈은 뒤로 서너 걸음을 물러났다.
크르릉.
신화가 마지막 랠리를 위해 나직한 엔진음을 토해냈다.
크르르릉. 철컹. 크르르르릉!
커다랗게 방향을 트는 신화를 향해 신상훈과 파크 피터슨이 엄지를 세웠고, 아론도가 왼손 엄지를 세워 답을 주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신상훈은 그저 출발선을 향해 움직이는 신화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파크 피터슨 역시 신상훈과 비슷한 감정인 모양이었다.
**
마지막 날답게 방송은 온통 랠리이야기로 가득했다.
[지경리온의 신화가 지금 막 출발했습니다! 2위인 거양자동차의 황금룡과 2시간 27분의 갭을 두고 있어서 우승을 염려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랠리를 따라 움직였는지 보도를 전하는 기자는 추레해 보일 정도로 지친 몰골이었다.
[이번 랠리에서 아시아권의 기술이 돋보였습니다. 현지 반응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지경리온의 신화가 지경이나 대송자동차그룹의 기술로 탄생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블루크루드를 이용해 유해물질이 전혀 나오지 않는 새로운 엔진과 연료기술만 본다면 이는 대한민국, 나아가 아시아의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증명하는 쾌거라 하겠습니다.]
흥분한 기자의 음성 위로 연료를 채우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나왔다.
[이 랠리에서 지경리온이 우승하면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을 인수하게 되는데요. 그 때문에 세계의 관심이 더 집중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거양자동차의 트럭 인수에 관한 기본 협상이 끝난 상태입니다.]
계약 내용을 설명하는 기자의 음성이 나오는 동안, 이번엔 볼이 퉁퉁한 류효양이 트럭에 올라타는 자료 영상이 화면에 올라왔다.
[마지막 랠리에서 거양자동차의 류효양 부사장이 직접 트럭에 올랐습니다. 아직 랠리가 끝나지 않아서 거양자동차의 특별한 발표나 반응은 아직 없습니다. 인수 문제는 랠리가 끝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의 보도를 끝으로 화면은 스튜디오의 앵커에게 돌아왔다.
[오늘 랠리는 우리 보도국의 기자가 헬리콥터에 함께 탑승해서 생생한 우승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다음 소식은 지경그룹의 부회장 임명 소식입니다. 통상적인 인사시즌과 상관없는 파격적인 임명인데요, 천상기 지경저축은행 회장이 그룹 부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자세한 소식을 보도하라는 투로 앵커가 기자의 이름을 불렀다.
**
송문철 지경증권 회장은 보고서를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미국 채권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현재 원화 가격이 7원이나 급등했습니다.”
“우리 쪽 대응은?”
“잠시 지켜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한번 봐주십시오.”
송문철은 최상중 상무가 내민 결재판을 펼쳤다.
“일본에서 운용 신청한 신규 자금의 규모입니다.”
“2조3천억 원? 뭐가 이렇게 많아? 이 정도면 수익을 내기 어려울 텐데?”
“담보 대출을 늘릴 계획으로 보입니다.”
송문철은 고개를 틀며 보고서를 다시 확인했다.
신용으로 소액 대출을 주로 하는 대부업의 특성상 느닷없이 2조3천억 원을 들여와도 당장 운용이 어렵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대규모 자금을 들여온다면 반드시 목적이 있다고 봐야 했다.
“다음 주에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결국 우리와 금리가 역전될 텐데 이런 상황에서 미국채가 쏟아져 나오고, 환율까지 무너지면 상황이 심각한데?”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거대자본의 움직임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흠.”
최상중의 의견에 송문철은 신음 같은 대꾸를 내놓았다.
“최 상무가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봐. 나는 이 자료를 회장님께 보고드리고 지시를 받을 테니까.”
“예, 회장님.”
최상중이 고개를 숙인 뒤에 송문철의 집무실을 나섰다.
**
거대한 바퀴가 돌을 짓누르며 올라설 때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트럭이 기울었고, 돌 부서지는 소리, 거친 엔진음, 차체를 버티는 쇳소리, 바닥이 긁히는 거북한 소리가 위협적으로 달려들었다.
크아앙! 철컹! 크르릉!
랠리에 참가하기 전까지 추일원은 운전을 쉽게 생각했었다.
막말로 핸들을 맡겨주면 그깟 사막과 이 마지막 돌산쯤 가볍게 넘을 거라 생각했었다.
콰득! 콰드득! 크릉! 철컹! 크르르릉!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 따위 아예 멀리 버렸다.
완전히 옆으로 기울어지다시피 넘어간 트럭의 자세를 바로 세우고, 모래를 타고 흘러내리는 트럭의 속도를 높여 위기를 빠져나오며, 언덕을 뛰어넘다시피 달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었다.
지형을 완전히 알고 있는 건가?
크아앙! 콰득! 콰드득! 철컹! 크아아앙!
아론도는 앞에 펼쳐질 바위를 이미 아는 사람처럼 핸들과 기어를 조절했고, 이제는 끝이구나 싶은 순간마다 트럭의 차체를 세워서 위기를 빠져나왔다.
포뮬러1의 레이스에 참가하는 드라이버는 0.1초 앞의 미래를 본다는 말은 들었다. 워낙 속도가 빨라서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속도감이 무뎌지고, 이어서 0.1초 뒤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는 인터뷰였다.
추일원이 볼 때 아론도는 대략 1초 앞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바퀴를 돌려야 하는 건 상식 아닌가.
그런데도 아론도는 반대로 핸들을 꺾곤 했는데 만약 강단이 조금만 부족했다면 추일원은 분명 욕을 뱉어냈을 정도로 섬뜩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콰득! 콰드득!
그렇게 미끄러진 트럭이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아론도는 그 큰 핸들을 미친 듯이 돌렸고, 거짓말처럼 위기에서 빠져나와 산을 타고 올랐다.
추일원이 안도의 숨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크르릉! 끼이익!
아론도가 트럭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