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272. 따따블로 갚아줘야지 (2)
오후 7시쯤 퇴근한 천중명은 8시가 조금 넘어서야 삼성동의 벤처사업부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옥상에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녁 먹자며?”
“옥상이 좋습니다.”
천중명을 기다렸던 것처럼 입구에 있던 곽대출은 두 번이나 옥상을 강조했다.
이 정도면 뭔가 있는데?
천중명은 잠자코 곽대출을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주인영 부장은?”
“대리 한 명과 자료를 살피고 있습니다.”
옥상문을 열고 나선 곽대출은 천중명이 올라서자 아예 문을 닫고 고리까지 걸었다.
“뭔데 그래?”
“쨔잔! 저녁입니다.”
그런 뒤에 곽대출은 입구 옆의 나무 박스를 열어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었다.
“돼지 불고기냐?”
“이걸 먹는데 회장님 생각이 떠오르지 뭡니까. 이집트에서 떠올렸던 돼지 불고기입니다.”
“주인영 부장은?”
“직원하고 먹었습니다.”
기본 반찬에 공깃밥이 네 개, 그리고 족히 4인분은 됨직한 돼지 불고기가 옥상의 벤치 위에 놓였다.
죄를 지은 것도, 그렇다고 훔쳐온 것도 아닌데 지경그룹의 회장과 벤처사업부 본부장이 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 돼지 불고기라니, 이게 생각해보면 웃기는 상황이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아가며 천중명은 곽대출과 마주 앉았다.
재킷을 벗어두고 셔츠 소매까지 걷어 올린 채로 옆 건물과 멀리 탄천의 조명에 의지해 먹는 돼지 불고기였다. 곽대출이 장담했을 정도로 맛이 꽤 좋았다.
“강갑수와 조호철은?”
밥을 뜨며 천중명이 내놓은 질문이었다.
“천상기 부회장과 함께 있답니다. 당분간 함께 지내라고 했으니까 경호는 문제없을 겁니다. 두 사람 모두 경호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부상이 심하면 교대해 줘.”
“낮에 갈비 14인분에 등심 5인분을 먹고, 저녁에는 호텔 뷔페에 간다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둘이서 공깃밥 두 개씩을 먹었고, 돼지 불고기를 싹 비웠다.
“아후, 잘 먹었다.”
“이게 연탄불에 구워서 제법 괜찮습니다.”
쟁반을 가져간 곽대출이 전기 포트를 이용해 믹스 커피를 만들었다. 천중명이 물병의 물을 마시고 난 다음이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탄천과 주황색 가로등을 바라보며 앉은 천중명의 옆에 곽대출이 커피를 놓아주었다. 둘이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도 붙였다.
“거대자본이 슬슬 움직이는 눈치다.”
그렇게 앉은 상태에서 천중명은 황성규의 보고와 마타르의 통화 내용을 전해주었다.
“이럴 때 난 좀 무섭습니다.”
“뭐가?”
“강갑수와 조호철더러 귀국하라고 지시하더니 천상기 부회장을 경호하게 한 것도 그렇고. 가등섭을 잡은 것도 그렇고. 회장님이 이걸 모두 예상해서 그런 거라면 좀 무섭습니다.”
담배를 재떨이에 누른 천중명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웃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게 또 있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미래가 보인다거나 뭐 그런 거?”
“미래를 다 알게 되면 그게 살 맛이 나겠냐.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천중명의 대꾸에 웃은 곽대출이 몸을 돌려서 앞에 펼쳐진 탄천을 바라보았다. 옅은 웃음을 담은 그의 눈에 감출 수 없는 그리움이 있었다.
“이집트가 그리워?”
“회장님과 둘이 사막에서 놈들을 상대할 때 죽여줬는데…….”
“구급대를 맡을래?”
“에이, 그건 아니지, 회장님아.”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곽대출이 담배를 눌러 끈 뒤에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과 함께해서 좋았던 거지. 혼자 그런 일을 맡는다고 그게 행복하겠어?”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곽대출이 없었다면, 느닷없이 몸뚱이가 바뀐 세상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천중명의 생각을 뚝 끊는 것처럼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조양회입니다, 회장님. 통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무슨 일이지?”
- 류효양 부사장이 저를 찾았었습니다.
통화에서 조양회는 류효양과 나눈 이야기를 빠르게 전해주었다.
- 조만간 거양자동차에서 연락이 있으리라 봅니다.
“고생했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천중명은 픽 웃은 뒤에 곽대출에게 내용을 전해주었다.
“그것도 혹시 미리 언질을 주신 내용입니까?”
“오! 언질이라는 표현도 써?”
“에이! 이 망할 회장님이!”
둘이서 킬킬거린 다음이었다. 남은 커피를 털어 넣은 천중명은 옆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들었다.
찰칵.
“후우.”
곽대출과 둘이 탄천을 바라보며 앉았다.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고, 커피를 마셨으며,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 차림이어서 집무실과 달리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힘으로 누르려는 놈들과 잔머리를 굴리는 놈은 더 강한 놈, 더 영리한 놈과 마주했을 때, 방법이 없거든.”
“그야 뭐.”
“거대자본은 힘으로 누르는 놈이고, 거양자동차는 잔머리를 굴리는 놈이라고 생각해. 그럼 편안하다.”
“따블로 돌려줍니까?”
엄지를 까딱거리는 곽대출을 보며 천중명은 픽 웃었다.
“따따블로 갚아줘야지.”
대꾸를 건넨 천중명은 팔을 뒤로 짚은 자세로 앞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번쩍번쩍하지, 회장님?”
곽대출이 새삼스럽다는 듯 건넨 말이 어둠과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
**
거양자동차그룹의 총수 류서열은 휴대 전화기를 붙들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했을 때는 믿고 의지했던 가등섭은 죽어 없어진 후였고, 이미 거양자동차의 국유화가 검토 중이었다.
- 지금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은 천중명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통화하셔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 류효양은 뜬금없는 전화를 걸어서는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 회장님! 듣고 계십니까?
“그는 한국인이다. 그것도 기업인. 그가 어떻게 당의 정책을 좌지우지한단 말이냐! 내가 알아본 바로는 대송자동차그룹에 트럭 부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방법으로 국유화를 검토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은테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은 류서열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통을 이기려 애썼다.
- 삼합회 총재가 나서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진광효 총재는 내가 낮에 이미 만났다. 그에게서 들은 내용이 국유화인데 도대체 어떻게 한국의 일개 경영인이 그를 통해 국유화를 막는다는 말이 나올 수 있어!”
류서열은 아들 류효양과 비슷하게 어지간한 일로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지금 건넨 말끝은 평소보다 확실히 높았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거양자동차의 황금룡이 우승을 차지하는 것밖에 없다. 지경리온의 신화가 내일 우승을 차지한다면 결국 우리 거양자동차는 국유화되는 것 말고 없어!”
- 그렇다면 왜 제게 그런 말을 했을까요? 양서평 부총재의 말과 조양회 비서의 조언이라면 해결방법은 천중명 회장님과 통화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야 당연하게 우리의 트럭 부분을 가져가고 싶겠지! 그러려면 국유화 전에 인수를 마쳐야 할 테고!”
마침내 휴대 전화기를 향해 류서열이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기업을 한다는 놈이 삼합회의 간부를 따라다니며 매달릴 때부터 이미 거양자동차의 앞날은 결정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부와 삼합회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상대해야지 믿고 매달릴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고함을 지른 류서열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이마를 매만졌다.
“이만 들어가. 그리고 혹여 기회가 된다면 양서평 부총재를 직접 만나서 방법을 물어봐. 이미 늦은 것 같다만, 마지막 한 번이라도 좋으니 누구 뒤에 숨어서 이름과 힘을 빌리려 하지 말고 직접 일을 해결해. 직접.”
말을 마친 류서열은 종료 버튼을 누른 뒤에 툭 테이블에 휴대 전화기를 던졌다.
완벽한 함정이었다.
중국에서 갑부로 성장했다는 말은 알게 모르게 당국의 지원을 등에 업었다는 의미였다. 자동차 산업을 지원한 중국 정부의 정책만 해도 노트로 한 권을 채울 정도로 많았다.
“후-!”
그걸 덜컥 삼합회를 믿고 날리다니.
무서운 인간.
류서열은 미간을 또다시 눌렀다.
어쩌면 삼합회의 총재인 진광효는 랠리 시작 전부터 이런 계획을 세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양이 우승을 차지하면 대송을 빼앗아왔다며 공을 앞세우고, 실패하면 이렇게 국유화를 통해 당국에 업적을 쌓는 일 말이다.
**
마지막 하루를 남겨놓은 랠리에서 신상훈은 드라이버 아론도 지안테와 파크 피터슨을 숙소로 사용하는 캠핑카로 불렀다.
“내일 달릴 경로를 확인한 보고서입니다. 날씨나 바람, 그리고 주변 상황은 양호합니다.”
신상훈은 먼저 두 사람에게 클립으로 묶은 서류를 두 장씩 건넸다.
“엔진과 하부 점검은요?”
“내일부터 랠리를 다시 시작해도 문제없는 상태입니다.”
신상훈의 질문에 파크 피터슨이 내놓은 답이었다. 아론도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바라보면서 셋이서 함께 웃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랠리가 결국 내일 끝나는군요. 처음이라 그런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 얼굴을 보면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파크의 농담섞인 대꾸에 신상훈이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점잖게 콧수염을 기른 파크와 깔끔한 인상의 아론도 모두 햇볕에 탄 데다 바싹 말라서 당장은 힘겨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건 신상훈도 다를 바 없었다.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피부와 깊어진 주름, 거기에 볼이 움푹 패서 피곤에 절여놓은 느낌이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 할 수 있는 인사입니다. 최선을 다해 우승을 차지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지금까지 함께 달려준 것에 감사합니다.”
“사장님. 지금 그 말이 나와 여기 연구소장님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럴 리가요? 나는 그저 두 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유럽 최고의 베테랑인 내게는 내일 우승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론도가 씨익 웃는 것이 고마워서,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주는 파크 피터슨이 듬직해서 신상훈은 먼저 그들과 비슷한 미소를 그려냈다.
“아론도. 우승을 부탁합니다.”
“이제 내가 아는 총괄사장님 같군요. 우승을 차지하면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점만 알고 계십시오.”
궁금한 얼굴의 신상훈과 파크 피터슨을 남겨둔 채로 아론도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저 친구가 무슨 꿍꿍이지?”
아론도의 뒤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질문을 던졌던 파크 피터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같이 나가죠. 나도 밖을 돌아볼 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캠핑카를 나섰다.
파크는 엔지니어를 향해 걸었고, 신상훈은 추일원을 찾아 움직였다.
“커피 한잔 드릴까요?”
신상훈이 대원들의 캠핑카를 향해 걷는 도중에 추일원의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든 신상훈의 눈에 캠핑카 지붕에 앉아 있는 추일원이 들어왔다.
“올라오세요. 경치도 괜찮습니다.”
“그럴까요?”
신상훈이 캠핑카의 옆에 달린 사다리를 올라가는 동안, 추일원은 대원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어차!”
지붕에 올라간 신상훈은 그제야 확실히 알았다. 추일원은 20미터쯤 떨어진 주유 차량과 신화를 감시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팀장님! 커피요!”
그리고 곧바로 사다리에 매달린 대원 한 명이 커피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올려주었다.
별, 모래, 바람, 냄새, 내일이 지나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것들이 주는 아쉬움이 묘하게 감정을 흔드는 밤이었다. 거기에 들고 있는 잔에서 풍기는 달달한 커피 냄새까지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지게 어울렸다.
“고마웠습니다.”
턱없는 인사를 건넨 신상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일이 남아 있지만, 지금처럼 여유가 있을지는 몰라서 미리 드리는 인사입니다. 이렇게 매일 밤 지켜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희야 사장님께서 이끌어주신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신상훈의 인사에 추일원은 짧은 대꾸와 함께 그 정도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후로 신상훈이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10분쯤 뒤에 신상훈이 일어섰다.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예.”
고개를 끄덕여준 신상훈은 사다리를 내려와 숙소를 향해 걸었다.
“사장님!”
그리고 열 걸음쯤 걸었을 때, 지붕 위에서 추일원이 신상훈을 불렀다.
신상훈이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직장인이 멋있다고 느낀 건 지경그룹 회장님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두 번째로 멋있습니다.”
신상훈은 대꾸 대신 환하게 웃었다.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칭찬보다도 추일원의 말이 기분 좋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