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271. 따따블로 갚아줘야지 (1)
지경그룹 본사에서 나온 천상기는 소공동에 있는 유명한 한식 식당으로 들어갔다. 시설부터 직원들의 태도가 남다르다 싶었는데 메뉴판을 본 강갑수와 조호철이 시선을 교환할 정도로 가격이 셌다.
“상기 형. 여기 너무 비싼 거 아뇨?”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부탁이 있어.”
이제는 좀 더 편안한 관계가 된 조호철의 질문에 천상기가 뾰족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이런 곳에 혼자 와서 밥 먹으면 맛있겠냐?”
이게 뭔 뚱딴지같은 질문이야.
강갑수와 조호철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내가 섬에서 나온 뒤에 가장 먹고 싶었던 고기가 이거였거든. 그런데 혼자 이걸 먹을 생각을 하니까 갑수랑 거기 식구들 걸려서 계속 못 왔어. 그러니까 오늘 미친 사람들처럼 먹어주라.”
뭐가 걸려서 뭐를 못 먹었다고?
천상기가 꺼낸 당부를 맞은편의 두 사람은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에이, 씨!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지? 폼 한번 잡아보고 싶어서 그랬다!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 상기 형이 원래는 잘 나갔구나! 이런 것도 배 터지게 사주는구나, 해보고 싶었어! 왜? 싫어? 그래도 불편하면 그냥 나가! 나가서 편한 거 먹어!”
솔직하게 감정을 터놓는 천상기를 보며 강갑수와 조호철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 좀 많이 먹을 건데 괜찮겠어, 형?”
“나 좀 나가던 사람이야! 이런 거 아무리 먹어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그럼 형. 진짜 마음 놓고 먹을 테니까 갈비 한번 실컷 사주라. 한우 갈비.”
“그거지! 그래!”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손을 든 천상기는 한우 갈비를 10인분 주문했다.
“드셔 보시고, 더하시는 게…….”
“그냥 가져와요. 그거 먹고 등심 먹을지 모르는데 뭘.”
천상기를 알고 있는 매니저가 곱게 고개를 숙인 뒤에 물러났다.
“어, 형! 주문하는 거 보니까 세 보여.”
“음핫핫핫핫!”
천상기의 웃음에 앙금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좋았고, 갈비를 주문하면서 행복한 표정인 게 고마워서 강갑수와 조호철이 비슷하게 웃었다.
“랠리 끝나고 대원들 들어오면 부서 하나 만들 거다.”
“부서?”
줄줄이 나오는 밑반찬을 보면서 천상기가 말을 꺼냈다.
“그때 우리가 있었던 섬을 임대하거나 살 생각이거든. 그곳을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앞으로 인원을 더 보강해.”
“그래서 뭘 하는데?”
숯불이 들어왔고, 쟁반에 담긴 갈비도 그 옆에 놓였다.
“그건 고기 먹고 말해줄게.”
“아, 또 상기 형이 사람 궁금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얼른 먹어! 먹는 거 봐서 말해주든가 할 거니까.”
세 사람이 함께 젓가락을 들었다.
“형, 얼른 먼저 먹어.”
“어? 뭘 그런 걸 따져, 진짜!”
툴툴거리면서도 천상기는 얼른 샐러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젓가락을 들고 기다리는 강갑수와 조호철을 위한 배려였다.
**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 말에 따르면 양서평은 지금 마지막 기회를 앞에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삼합회에 몸을 담그고 홍콩의 반란이라 불리는 조직원들의 배신을 정리한 일일 테고, 두 번째는 모시던 강남 책임자를 끝까지 지켜내면서 버틴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 강남 책임자가 병원에서 죽어버리는 바람에 양서평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내일이면 랠리가 끝난다.
숙소로 사용하는 캠핑카의 창밖에서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본 양서평은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이겨내기 어렵던 가등섭을 천중명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단숨에 제거했다. 그런 그에게 대들었다면 지금 양서평은 어떤 모습일까?
천중명을 믿고 따른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내일 랠리를 마치고 중국에 돌아가면 양서평은 삼합회의 2인자로 우뚝 서고, 조양회는 사업가로 변신하는 것이 그렇다.
히죽 웃는 양서평을 조양회가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살필 때였다. 양서평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조양회가 차를 준비하는 앞에서 탁자에 앉은 양서평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조양회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천중명 회장님이십니다. 먼저 받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조양회가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천중명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창을 향해 서 있었다.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랠리여서 양서평과 조양회가 있는 곳의 시간이 자꾸 변한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오전 7시 30분쯤 되었을 시간이었다.
- 조양회입니다, 회장님.
신호음이 여러 번 울린 뒤에 조양회의 대꾸가 있었다.
“긴 일정인데 컨디션은 어때?”
- 저희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별일 없습니다.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이쪽도 잘 지내.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전에 황채산이라고 있었는데 기억하지? 홍콩물고기.”
- 예, 회장님.
양서평과 얽히게 된 이유가 황채산이어서 조양회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쪽 천상기 부회장과 황재산을 연결한 사람이 삼합회의 조직원이라는 정보가 있어. 그게 누구인지 조용히 알아봐 줄 수 있을까?”
-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비밀을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귀국 후에 보고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아. 다만, 조심스럽게 알아봤으면 해. 절대 말이 나오지 않을 수준으로. 마지막까지 건강 챙기고.”
- 감사합니다, 회장님.
무언가 묻고 싶었던 조양회가 충직한 부하처럼 통화를 마쳤다. 휴대 전화기를 든 천중명은 창밖을 향해 서서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
조양회의 의문쯤 이해한다.
굳이 삼합회를 파고들기 전에 천상기에게 직접 물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천중명도 했었다. 심지어 천상기는 천호득의 교통사고와 관련돼 의심스러운 정황도 있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나가서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황성규가 나서서도 꼬리를 제대로 못 잡는 놈들이 천상기에게 무언가를 남겼을 리도 없었다. 게다가 천상기가 이쪽에서 떠들면 저들이 바로 상황을 짐작할 테고.
무엇보다 황채산이 이미 죽었다.
그 상태에서 마음잡고 새 출발 하는 천상기를 다시 괴롭히고 싶지도 않았다.
“천상기 부회장님. 내가 이렇게 배려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줘야 한다, 진짜!”
천상기의 말투를 흉내 낸 천중명은 픽 웃은 뒤에 책상으로 움직였다.
점심을 먹은 천중명은 유진교와 천상기를 그룹 부회장에 임명하는 서류에 사인했다. 그런 뒤에 아랍에미리트 마타르의 통역에게 전화를 넣었다.
천중명이 통역에게 전화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화 내용을 생각했을 때 지금 새로운 통역을 함부로 고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 예, 회장님.
“청장과 통화를 했으면 싶은데 시간이 가능할 때를 알려줘.”
- 바로 확인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오전에 골라두었던 리포트를 읽었다.
20분쯤 지난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회의가 있었습니다. 바로 연락하지 못했던 점을 이해해주십시오.
마타르의 음성 아래로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통역의 음성이 반 박자 느리게 건너왔다.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은 것 같습니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통해 황성규의 보고를 시작으로 양서평과 통화했던 내용을 알려주었다.
- 천 회장의 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당장 누가 개입되어 있는지를 좀 더 정확하게 알아볼 생각입니다. 목표가 정확해질 때까지 지난번에 정했던 투자를 준비하면 어떨까 합니다.”
- 천 회장님. 혹시 동남아시아 국가로 방향을 바꿀 계획도 준비하고 있습니까?
평소보다 묵직하게 부르는 마타르의 음성과 질문이 곧바로 건너왔다.
“청장님. 나는 탐욕스러운 거대자본을 상대하려고 합니다. 그들을 막아냈으면 싶고, 가능하다면 무너트렸으면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붙이더라도 힘없는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중명의 답을 통역이 아랍어로 전달한 다음이었다.
- 후후후.
착 가라앉은 웃음이 들렸다.
- 신의 뜻이 우리 천 회장과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천중명이 정답을 내놓았던 모양이었다.
마타르의 웃음과 이어진 대꾸는 그런 느낌이었다.
- 천 회장을 방문하고 싶은데 일정이 어떻습니까?
그리고 이어진 뜻밖의 질문도 있었다.
“당분간은 국내에 있을 것 같습니다.”
- 내일 랠리가 끝나면 그 핑계가 적당하겠군요. 조만간 일정을 정해서 문의하겠습니다. 좋은 분을 소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대하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고 리포트에 시선을 주었다.
**
베이스 기지를 앞에 둔 류효양은 목숨을 건 수수께끼를 둔 사람처럼 머릿속이 복잡했다.
덜컹! 그아아앙! 덜컹!
트럭을 따라 달리는 길이었다.
거양자동차의 황금룡은 1위인 지경리온자동차의 신화와 누적 랩 타임으로 2시간 10분가량 뒤처졌다.
당장 그 시간을 뒤집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양서평은 거양자동차의 트럭으로 우승을 차지해 인민이 자부심을 느끼게 하라는 요구를 건넸다.
뿌옇게 피어나는 흙먼지처럼 류효양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늘이 지나면 승부를 뒤집을 길은 내일 하루 남는다.
신화가 느닷없이 뒤집히거나 엔진이 꺼져서 주저앉지 않는다면 거양자동차의 우승은 이미 물 건너간 이야기였다.
과연 양서평이 요구한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스핑크스 앞에서 선 여행자처럼 류효양은 정답을 찾기 위해 인상을 찌푸려가며 문제에 집중했다.
원망스럽다, 가등섭이.
그리고 정말이지 살고 싶다.
중국 정부가 거양자동차를 국영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에 류효양이 대항할 방법 따위 없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외 없이 경영진의 부정, 부패라는 이유가 따라붙어서 실제로 류효양은 사형 아니면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낼 확률이 높았다.
거칠게 튀어 오른 지프가 요란하게 내려앉으며 다시 앞쪽에 거대한 모래 언덕을 향해 달렸다. 어쩐지 저 언덕을 올라서면 느닷없이 양서평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나타나서 ‘내가 답을 알아내라고 했지!’ 하면서 앞발로 류효양이 탄 지프를 콱 눌러버릴 것만 같았다.
베이스 기지가 보일 때 류효양은 이를 꽉 깨물었다.
종일 고민했지만, 역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지프가 베이스 기지에 들어가 거양자동차의 공간에 선 뒤에 류효양은 바로 차에서 내렸다. 그런 뒤에 그는 곧장 지경리온자동차의 베이스 기지로 움직여 안쪽을 기웃댔다.
“조 비서!”
류효양은 마침내 혼자 걸어가는 조양회를 발견했고, 나직한 소리로 급하게 불렀다.
“잠시만! 잠깐만!”
캠핑카를 보았던 조양회가 난처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저쪽으로!”
그런 그를 끌고 류효양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구석으로 움직였다.
“조 비서. 나 한 번만 살려줘.”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총재께 말씀하신 랠리 우승과 인민이 자부심을 느끼게 하라는 두 가지 조건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급해서. 시간이 없다 보니 생각이 멈췄어. 방법! 부총재의 말씀을 따를 방법을 알려주면 내가 이 은혜를 잊지 않을게.”
“흠.”
조양회의 첫 번째 대꾸는 고민 가득한 한숨이었다.
“거양자동차가 국영기업이 되는 것을 막아주면 얼마를 내시겠습니까?”
류효양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벅였다.
“그렇게 되면 류 부사장의 집안도 건재하게 됩니다. 그 두 가지를 지켜내려는 분이 고작 비서인 나를 붙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할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나!”
급하게 답을 내놓은 류효양을 조양회는 ‘네 속이 다 보여.’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를 준비한다고 할까? 조건을 만들어서 부총재를 만나 뵈어도 괜찮을까?”
조양회의 표정을 보았음에도 류효양은 애절하게 매달렸다.
“함부로 부총재께 나서면 뒤를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격을 잘 아실 텐데요?”
“제발 방법을 좀 알려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이 생각이 딱 멈춰서 도저히 모르겠거든.”
캠핑카가 있는 방향을 힐끔 보았던 조양회가 먼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거양자동차에 연락하세요. 지금 부총재를 움직일 수 있는 분은 천중명 회장님, 오로지 그분 한 분입니다.”
“천…. 천중명 회장?”
“존칭 없이 함부로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내가 놀라서 그렇지! 다른 뜻은 없어요! 천중명 회장님! 그래! 그분께 연락하면 되겠지?”
“나머지는 류 부사장님의 능력이겠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방법을 찾았다는 투로 고개를 연신 끄덕인 류효양이 후다닥, 숙소를 향해 뛰어갔다.
“아차!”
고맙다는 인사를 잊은 그가 몸을 돌렸을 때, 조양회는 이미 캠핑카로 몸을 움직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