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270. 드디어 시작이군요 (3)
집무실에 도착한 천중명이 메모와 서류들을 살필 때였다.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며 천상기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여보세요?”
- 동생회장님. 오늘이나 내일 시간 돼?
“어제 내가 했던 질문과 똑같은데?”
- 뭘 또 그걸 마음에 담고 있어? 그러지 말고 시간 좀 내주라.
이렇게 조심스러운 천상기의 전화는 또 참 오랜만이구나 싶은 음성이었다.
“오늘 오전 10시 30분 이후에 전화하고 들러.”
- 그냥 11시!
“알았어.”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픽 웃었다. 결재서류 하나를 처리한 다음이었다. 이번엔 노크와 함께 부속실 직원이 들어섰다.
“황성규 씨가 방문했습니다.”
“들어오시게 해요.”
책상에서 일어선 천중명이 소파에 도착할 때쯤 황성규가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오전 9시 30분에서 정확하게 1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앉으세요.”
천중명이 소파를 권해 둘이서 앉았고,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준비해주었다.
“출장은 어떠셨습니까?”
“나쁘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안부를 전한 황성규가 메고 온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천중명의 앞에 놓았다. 정보를 일찍 찾아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그의 부담감이 얼마나 큰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천중명은 커피잔을 한쪽으로 밀고서 서류를 펼쳤다.
“중국이 보유한 채권 현황입니다. 이 정도 내용은 어지간한 경제신문 기자라면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다음 페이지에 보시면 실제 채권을 소유한 회사의 명단이 있습니다.”
페이지를 넘긴 천중명의 눈에 주황색과 녹색, 그리고 노란색으로 표시된 회사의 이름과 금액, 기간이 들어왔다.
“주황색은 중국의 보유라고 인정한 채권 소유 회사, 녹색은 중국의 자금을 이용했지만, 개별적 인수라고 주장하는 홍콩의 회사, 마지막 노란색은 거대자본이라고 의심되는 회사의 명단입니다.”
천중명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 뒤로는 매입날짜, 만기, 현재 이자율 등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워낙 목록이 많아서 일련번호만 기재한 것도 제법 있었다.
“회장님께서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한 이후에 녹색으로 표시된 채권이 시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나오면 대략 3천억 달러 수준입니다.”
이게 시작이구나!
시선만 위로 든 천중명을 향해 황성규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를 최대치로 잡았을 때 4천억 달러 수준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국이 녹색의 채권을 전량 인수한다고 쳐도 노란색에 적힌 3천억 달러 규모의 채권이 시장에 더 풀리면 감당하지 못할 금리 인상 쓰나미가 아시아 시장을 덮치게 됩니다.”
“중국과 일본만 견딜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통화스와프로 막기 어려운 공격입니다. 금리가 인상되면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달러를 빌려오기도 곤란합니다.”
“이걸 막을 방법은요?”
천중명의 질문을 받은 황성규는 결심이 필요한 사람처럼 숨을 짧게 내쉬었다.
“필리핀이나 태국, 인도네시아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습니다. 호주나 인도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최악의 상황은요?”
“공격을 받은 나라 경제가 무너집니다. 1천 퍼센트 이상의 인플레이션, 화폐가치 상실로 빈곤층 대부분이 생계를 완전히 잃을 수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조차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천중명은 서류를 향해 기울였던 상체를 세우고 서류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채권이 나오고 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금리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최소 석 달의 여유는 있다고 봐야겠네요.”
“금리는 순서대로 올라갑니다. 그러니 실질적인 충격으로 다가오려면 금리 인상까지는 6개월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환율입니다. 3개월 뒤에 환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면 금리를 감당하기 전에 한국이 보유한 외환고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됩니다.”
달러를 빌려올수록 환율과 금리 인상으로 인한 피해가 커지는 방식이었다. 이게 단순하기는 한데, 생각해보면 효과는 죽여주는 계획이었다.
천중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나라로 공격 방향을 틀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식이죠?”
“동원할 수 있는 자금으로 우리가 먼저 목표로 정한 나라에 투자하는 방법입니다.”
“원, 달러 환율에 대한 헤징을 그렇게 돌리자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세고 강한 놈에게 한 대를 맞기 전에 주변에 있는 나보다 약한 놈을 두 대쯤 때리자는 계획이라니?
천중명은 픽 웃으며 서류를 보았다.
멀리 있어서 그렇지, 막심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계를 송두리째 망가트리는 방법이 과연 올바를까?
“중국이 채권을 내놓는 이유는요?”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아시아 경제를 뜻대로 주무르며 중심에 서겠다는 계획과…….”
“이익이겠죠.”
“그렇습니다.”
황성규의 답을 들은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에서 이 계획을 추진하고, 승인한 사람은요?”
“삼합회가 깊숙하게 개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개를 갸웃한 천중명을 향해 황성규가 말을 이었다.
“전에 모사드의 테드 케블린이 홍콩물고기라는 황채산과 연결된 적이 있습니다. 그 연결점 역시 삼합회였습니다.”
“흠.”
신음 같은 한숨을 흘려낸 천중명이 고개를 들었다.
“황채산과 천상기 회장이 연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지경그룹을 노렸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나요?”
“의도적인 접근이었다고 판단하시면 적당합니다. 총수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평창동을 포함한 회장님의 주변에서 수상한 연락이 없는지를 계속 살폈는데 의심할 만한 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계속 살펴주세요.”
“예, 회장님.”
그 뒤로도 대략 30분 정도 시간을 더 보낸 뒤에 황성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천중명은 지경연구소에서 올려놓은 리포트에서 채권 관련 내용을 전부 찾았다. 분량이 제법 많아서 당장 읽기는 어려웠다.
‘이건 오후에 시간을 내서 살피기로 하고.’
목록을 추린 천중명은 다시 결재서류에 집중했다.
한 시간이 훌쩍 흐른 모양이었다.
얼핏 책상 앞에 부속실 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노크를 못 들으셔서 들어왔습니다. 천상기 회장이 와 있습니다.”
“그 성격에 밖에서 기다려? 얼른 들어오라고 해요.”
“네, 회장님.”
문으로 걸어간 부속실 직원이 곧장 천상기와 함께 들어왔다.
“바쁜데 방해한 거 아냐?”
“내가 먼저 보자고 했었다니까. 앉아. 차는?”
“그냥 물 줘.”
기다리던 부속실 직원의 성의를 가볍게 밀쳐내며 천상기는 물을 요구했다.
둘이서 물과 음료수를 앞에 둔 다음이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천중명이 툭 던지는 것처럼 질문을 건넸다.
“섬에 있던 직원들 있잖아. 그 친구들을 내가 관리했으면 싶어서.”
“어떻게 하려고?”
재킷에 목 단추 하나를 푼 셔츠 차림의 천상기가 특유의 뾰족한 눈매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벤처사업부에서도 특별히 할 일 없잖아. 보안회사로 보내거나 아니면 새로 가르치거나 해 보려고.”
“보안회사로 보내려면 바로 보내면 되지. 굳이 저축은행에서 관리할 이유가 있어?”
“파견직이나 그런 거 해도 되는 거 아냐?”
“그 친구들은 따로 해 줄 일이 있어.”
답을 건넨 천중명은 잔을 들어서 음료수를 마셨다.
“위험한 일이지?”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번에도 다쳤던데 계속 그런 일을 시켜야 돼?”
“오해하는 게 있는데.”
유리잔을 내려놓은 천중명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 친구들은 가둬두면 갑갑해서 못 견뎌. 특기를 살리게 해야지. 형도 경험했잖아. 섬에서 그렇게 활동하던 직원들을 책상에 앉혀둔다고 그걸 이겨낼 거 같아?”
못마땅한데 마땅히 반박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천상기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편하게 가자. 그러니까 다른 소리 말고 부회장을 맡아. 그래서 부서를 하나 새로 신설해.”
어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라는 투로 천상기는 시선만 주었다.
“지난번 용인 사건 기억나지? 크레인이 꺾여서 위험했던 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은 잊기 어렵잖아.”
입맛을 다신 천상기가 공연히 물잔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렇게 우리 직원들이 위험에 빠지는 경우를 대비해서 자체 구급대를 만들어.”
“뭐?”
“헬리콥터, 비상용 차량 구입해서 자체 구급대를 만들라고. 그렇게 기본을 만들고 나면 인원을 보강해. 계열사가 있는 지역마다 적어도 한 팀씩 상주하게.”
“그게 되나?”
“소방서와 협조하는 것도 고민해 봐. 우선은 우리 직원들이 위급한 상황에 도움을 청할 지경 구급센터가 생기는 거고, 규모가 제대로 정비되면 그 이후에 대송자동차의 긴급 구난 작업에도 투입하면 좋지.”
내용이 썩 내키지 않았는지 천상기는 여전히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건설 현장, 그 외에 유조선 사고도 있을 수 있고. 훈련장소로 그때 그 섬을 정하면 좋잖아. 섬을 매입하거나 임대하면 될 테니까. 그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면 이번에 랠리에 참여한 대원들이 전부 임원이나 간부가 되겠지.”
천상기의 눈이 반짝한 직후였다.
“조건은 형이 부회장을 맡는 거.”
천중명이 마지막 조건을 내놓았다.
“나한테 왜 그래, 진짜! 그러다가 내 눈이 돌면 어쩌려고.”
“그럼 강갑수가 슬픈 선택하는 거지, 뭐.”
퍼뜩 돌아온 천상기의 날카로운 시선을 천중명은 피하지 않았다.
“아직 지경은 시스템이 정착되는 과정에 있거든. 그러니 어떤 일이든 책임을 감당할 오너 또는 가족의 지시가 필요해. 그 역할을 맡아.”
“동생 회장님은? 앞으로 뭘 할 건데?”
“나는 임원들의 부조리와 전횡을 찾는 역할, 형은 위험에 빠진 직원이나 억울한 직원을 챙기는 역할.”
숨도 쉬지 않은 채 나온 천중명의 답에 천상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난 상대해야 할 버거운 적이 있어서 그 일에 집중할 생각이거든. 그러니 그동안은 누군가 그룹을 맡아줘야지.”
“아버지가 들으면 쓰러지시겠네.”
엉뚱한 대꾸에 천중명이 픽 웃었는데 천상기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교 본부장은? 그 양반이 영향력도 있고, 능력도 있던데? 최만호나 윤병지 회장도 인정하는 사람이고.”
“누가 뭐래도 그룹에는 책임을 감당해 줄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해. 이상하지? 그게 유진교 본부장일 때는 미적거리는데 오너 가족에게는 알아서 고개 숙이는 거. 그리고 이번에 유진교 본부장도 부회장으로 임명할 생각이야.”
잠시 침묵하던 천상기가 뾰족한 눈매로 천중명을 보았다.
“부회장?”
“부회장.”
천상기가 질문을 던졌고, 천중명이 분명하게 답을 건넸다.
“오너가 썩으면 그룹도 함께 썩어.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 형이 잘못하는 일이 생기면 새로 만든 부서의 직원들, 강갑수를 비롯한 대원들이 함께 욕을 먹게 될 테니까.”
“그건 좀 심하다, 진짜!”
천상기는 어느새 평소의 뻔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오후에 발령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저축은행은 박승양 회장에게 맡길 거고.”
“그 인간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형이 했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팩 고개를 떨군 천상기가 또다시 물잔을 이모저모 살폈다.
“계열사를 분리해서 책임을 나눌 생각이거든. 그거 알아둬.”
“근무는?”
“본사에서 해야지. 적당한 공간 챙겨놓을게.”
입맛을 다신 천상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심 먹고 가지?”
“갑수랑 호철이에게 밥 사기로 했어.”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한숨을 푹 내쉰 천상기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고개를 숙인 뒤에 집무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혹시 동생인 회장에게 저렇게 인사해야 하는 것까지 고민해서 부회장 자리를 거절했던 건가 싶을 정도로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내부는 적당하게 조율된 느낌이었다.
천중명은 잔을 치우러 들어온 부속실 직원을 통해 유진교를 불렀다.
3분쯤 지났을 때 유진교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진한 정장, 하얀 셔츠, 그리고 파란색과 붉은색이 가로로 뒤섞인 타이를 한 유진교가 천중명에게 질문을 건네고는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성동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저 신경질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사람이리라 여겼는데, 어느새 유진교가 없는 지경그룹은 상상하지 못할 관계가 되었다.
“천상기 회장을 기계, 중장비, 정유 관련 그룹 부회장으로 임명하겠습니다. 기본적인 결재를 그쪽으로 갈 수 있도록 처리해주세요.”
“예, 회장님.”
부회장을 천상기로 임명한다는 데도 유진교의 표정에는 일말의 서운함도 보이지 않았다.
“대송자동차그룹, 대송그룹, 그리고 금융, 전자를 담당하는 부회장에 유진교 그룹발전본부 본부장을 임명하겠습니다. 역시 해당 계열사의 결재를 그쪽으로 돌려주세요.”
멍한 얼굴로 유진교가 천중명을 보았다. 심지어 답을 하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깜박 잊었습니다. 비서실, 기획실, 그룹발전본부는 계속 함께 맡아주셔야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부회장님.”
“감사합니다,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중명이 내민 손을 유진교가 공손한 태도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