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69화 (269/315)

# 269

269. 드디어 시작이군요 (2)

황성규는 눈과 눈 사이를 꾹 누른 뒤에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윤성일의 비자금 계좌쯤 쉽게 잡았다.

전화벨 한 번 울리는 것으로 상대방의 전화통화는 물론이고, 문자, 그 안에 담긴 애플리케이션의 저장 정보까지 모두 가로채는 실력도 갖췄다.

그런 그가 사흘이면 되리라는 장담을 지키지 못한 채 눈이 시리도록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사람이 아예 미칠 지경이었다.

모사드 출신의 테드 케블린을 통해 정보를 찾아냈을 때만 해도 일을 반쯤 해결했다고 자부했는데 그 뒤에 가짜 정보에 속은 것만 백 번쯤 될 정도로 상대방은 치밀했다.

시린 눈을 끔뻑인 황성규가 답답한 속을 토해내듯 “후-!”하며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팀장님! 여기 좀 봐주십시오!”

제임스 김이 손을 들어 황성규를 불렀다.

하루에도 이런 일은 몇 번씩 있다. 그리고 매번 실망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뭐야?”

게다가 황성규를 찾는 제임스 김의 표정에는 자신감도 없어 보였다.

“회장님이 아랍에미리트를 다녀오고 나서 홍콩에서 미국 국채가 계속 시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거 중국 소유라고 봐도 무방한 물량이거든요.”

“잠깐만.”

제임스 김의 책상에 팔을 걸친 황성규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채권 물량을 확인했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이 두 나라와 연계가 깨지면서 급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중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가 1조2천억 달러지? 한국 채권은 얼마나 쥐고 있어?”

“17조5천억 원 수준입니다.”

이 건가? 정말? 중국에서 시작해 미국을 거쳐 한국을 때리는 거로?

“타이밍이 절묘합니다. 전에 테드 케블린이 황채산과 손을 잡았던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면 대강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삼합회에 누군가 있다?”

제임스 김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드 케블린이 바쁘게 다닌 이유가 매도 시점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3천억 달러 수준의 미국 국채가 시장에 나온다고 가정하면 6개월 뒤에 한국의 금리가 2에서 2.5퍼센트 상승합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로 어쩌지 못하는 물량이다, 이거지? 이것들이 도화선이라는 거네?”

황성규가 상체를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미국 국채를 내다 팔아서 금리가 올라가면 환율로 때리고, 그 뒤에 부동산 매입?”

“예.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금리가 치솟으면 미국도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선거까지 겹치면 아예 미친 것처럼 날뛸 겁니다.”

“이스라엘 모사드 소속인 테드가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에 그토록 공을 들였던 이유가 한눈에 설명되기는 하네. 채권을 내놓아서 도화선을 만들고, 그걸 매각한 돈을 환율과 부동산에 투자해서 몇 배로 불린다?”

상체를 세운 황성규가 제임스 김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선 이 시나리오로 자료를 뽑아봐. 테드 케블린이 돌아다닌 곳을 중심으로 미국 국채가 나올만한 가능성이 있는 곳 다 추리고.”

“알겠습니다.”

지시를 하는 황성규나 답을 내놓은 제임스 김, 그리고 듣고 있던 팀원들 모두 표정이 밝지 못했다. 환율이 아니라 국채 매도를 이용해 금리를 높일 계획이라면 예상보다 훨씬 잔인한 싸움이 될 확률이 높았다.

**

평창동을 나선 천중명은 삼성동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른 이른 퇴근이었는데, 허선영이 보고 싶었고 긴 출장 끝이라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한 천중명은 샤워를 마친 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거실의 TV를 틀어서 랠리 소식을 찾았다.

[가장 앞에 보이는 트럭이 지경리온자동차의 신화입니다. 어제까지 두 시간 이상을 앞섰는데 오늘은 좀 더 차이가 벌어지는 느낌입니다.]

헬리콥터에서 찍은 영상이었다.

사막을 거칠게 달리는 트럭의 뒤편에서 모래가 튀었고, 흙먼지가 피어나는 장면을 보며 천중명은 어쩐지 매캐한 냄새가 코에서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중국의 거양자동차가 무리하고 있습니다만, 현재로는 역부족입니다. 이제 이틀 남은 랠리에서 관심은 지경리온자동차의 신화가 과연 마지막 순간까지 유해물질을 배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랠리를 마칠 것인가에 쏠리고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어서 거양자동차의 황금빛 트럭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혼자서 목숨 건 랠리를 하려니까 미치겠지? 류효양?

내가 곽대출과 달릴 때의 심정이 그랬거든.

피가 바짝바짝 타는 경험도 좀 해봐야지?

화면을 보며 천중명이 픽 웃을 때였다.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어서 와.”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일찍 온 거?”

정장 차림으로 들어선 허선영이 거실을 뛰어서 천중명에게 달려들었다.

허선영에게서는 늘 지금처럼 풀향기가 난다.

초록의 신선함과 아련함을 담은 것처럼 말이다.

한참을 안고 있던 허선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천중명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

다음 날 아침, 샤워를 마친 천상기는 비장한 얼굴로 냉장고를 열었다. 식사와 청소를 위해 아주머니 한 분이 일주일에 두 번 오기 때문에 밥과 반찬을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다만, 오늘은 각오한 바가 있었다.

“이 자식!”

천상기는 매섭게 눈을 부릅뜨고는 냉장고 한쪽에 들어가 있는 문어를 꺼냈다.

어제 퇴근길에 백화점 식품부에서 사 왔는데 어떻게 조리를 했는지 다리가 예쁘게 위로 말린 놈이었다.

물을 약간 묻힌 뒤에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면 제법 먹을만하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카드를 건넸었다.

아침은 간단하게 토스트와 시리얼을 먹는 천상기가 굳이 번거롭게 문어를 꺼내 든 것은 악몽을 털어내겠다는 집념쯤 되겠다.

밥통의 밥을 꺼냈고, 사각 반찬 통을 꺼내 뚜껑만 열어 식탁에 놓았을 때, 전자레인지가 경쾌한 벨 소리를 들려주었다.

“아, 뜨거! 이 씨, 진짜!”

물기를 뿌려서 그런지 문어에 닿았던 엄지에 후끈한 통증이 몰려와서 천상기는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그래. 이 정도는 반항해줘야 또 먹어주는 맛이 나지!

거칠게 문어가 올려진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은 그는 집게와 가위를 이용해 다리를 썩썩 잘랐고, 이어서 초장 통을 집어서 작은 접시에 짜 놓았다.

“꿈에 다시 나타나서 갑수 뱉어낼 때까지 내가 매일 먹어주마!”

자리에 앉은 천상기는 젓가락을 들어 문어 한 점을 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점원의 말과 다르게 질기긴 왜 이렇게 질긴지, 우걱우걱 천상기가 문어 다리를 씹고 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뭐야, 또?”

젓가락을 뭉쳐 쥔 그가 번호를 확인한 뒤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상기 형. 나 갑수요.

꿀꺽.

천상기는 그 질긴 문어를 그대로 삼켰다.

- 여보세요? 어? 이상하네? 여보세요?

“너 어디야? 다쳤다던데 괜찮아?”

- 인천공항에 도착했어. 형은 잘 지내? 나 굴뚝 올라가는 영상 봤어.

“너,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젓가락을 내려놓은 천상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아까 삼킨 문어가 속에 뻑뻑하게 걸린 탓이었다.

- 형. 여기 호철이 형하고 함께 왔는데 나중에 연락할게.

“시끄러워! 함께 와! 같이 밥 먹자! 밥 먹고 얼굴 보고 움직여!”

- 출근해야 되지 않아?

“알았으니까 내가 가? 아니면 이리 올래?”

정수기에서 물을 받은 천상기가 벌컥벌컥 마신 직후였다.

- 호철이 형하고 함께 갈 테니까 밥 사주라, 형.

강갑수의 말이 건너왔다.

“밥? 내가 정말 배가 터지도록 사준다, 진짜!”

천상기는 최근 몇 년 중에서 지금 가장 환하게 웃었다.

**

천중명은 허선영과 함께 홈바에 앉아 토스트와 시리얼, 프라이, 과일 등을 놓고 아침을 먹었다.

사람 참, 둘이 고작 아침을 먹는 건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게 되는 건 또 뭔지.

“정말 괜찮은 거죠?”

“그렇다니까.”

긁힌 상처들을 보고 놀란 허선영의 걱정을 천중명은 웃는 얼굴로 다독여주었다.

“중명 씨. 어쩌면 내일 어머님과 만날지 몰라요.”

천중명은 시선만 들었다.

“어제 전화하셨어요. 내일 시간이 어떠냐고. 혹시 오후에 두 시간쯤 시간 내줄 수 있냐고 하셨어요.”

“무슨 일이신데?”

허선영은 고개를 먼저 저었다.

“그건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시간 될 것 같으니까 오늘 점심 때쯤 전화 드릴 거예요.”

“내가 모르는 일이 있으신가?”

“인사 자주 못 드리니까 지나가는 길에 보고 싶으실 수도 있죠. 여쭤봐서 가능하시다고 하면 모시고 점심 먹을까 해요.”

“그래. 혹시 곤란한 일이면 말해줘.”

“어머님이 어디 그런 거 말씀하실 분이에요?”

그렇기도 하지, 하는 느낌으로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났고, 허선영이 출근 준비를 위해 방으로 들어간 사이 천중명은 커피를 준비했다.

아침 식사, 차를 함께 마시는 이 시간이 아마 가장 방해받지 않고 둘만 온전히 있는 시간이 아닐까 싶었다.

커피를 마신 두 사람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기다리던 비서실 직원들과 각자의 직장으로 향했다.

천중명이 탄 승용차가 막 올림픽 도로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황성규입니다. 오늘 혹시 시간 되시면 찾아뵙고 싶습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성규의 문자가 휴대 전화기에 올라왔다.

[출근하는 길이니까 9시 30분 어떠세요?]

[그 시간에 뵙겠습니다.]

약속을 정한 천중명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사람들로 도로에 차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

벨이 울렸을 때 후다닥 천상기가 현관으로 달렸다.

도어록의 버튼을 누른 천상기가 급하게 문을 열었을 때 시커먼 얼굴의 강갑수가 얼굴이 익숙한 대원과 서 있었다.

“야, 이 씨!”

“잘 지냈어, 형?”

“뭐야! 들어와! 얼른! 얼른 들어와!”

천상기가 몸을 비켰고, 강갑수와 조호철이 어색한 얼굴로 거실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얼굴에 천상기가 재벌은 재벌이었구나 하는 표정이 올라왔을 때였다.

“밥 먹자.”

천상기가 두 사람을 향해 식탁을 가리켰다.

“나 다른 건 못해서 즉석밥 사다 놨고, 있는 반찬 꺼내놨어. 이거로 아침 우선 먹어. 점심에 죽여주는 거 사줄게.”

그렇게 셋이서 식탁으로 움직였다.

문어와 뚜껑을 열어놓은 반찬통 옆에서 천상기는 인덕션의 버튼을 눌렀다.

“뭐하려고?”

“냉장고에 고기가 있더라고. 그거 굽게.”

“아, 형! 냉동된 게 그냥 구워져? 얼른 와! 아침은 이 정도면 됐어. 차라리 점심때 제대로 된 고기 사주면 되지.”

“그래?”

그렇게 셋이서 연달아 즉석밥을 돌려가며 아침을 푸짐하게 먹었다. 꿈 이야기, 그래서 아침에 문어가 올라와 있었다는 설명에 웃었고, 굴뚝을 올라가던 상황을 떠들며 킬킬거렸다.

푸짐하게 먹고 난 다음이었다.

남의 살림인데도 강갑수와 조호철이 더 깔끔하게 정리를 마쳤다. 심지어 천상기를 밀쳐내고 커피까지 준비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편안한 차림의 세 사람이 잔을 들고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잠깐만.”

그런 뒤에 현관 바로 옆의 오른쪽 방으로 들어갔던 천상기가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내 거 사려고 갔다가 있길래 샀다. 두 사람에게 적당하게 어울릴 것 같은데 한 번 봐.”

“이거 비싼 거 아냐?”

“세일 한다길래 줍다시피 담은 거야.”

천상기가 바라보는 앞에서 강갑수는 쇼핑백 안을 들여다볼 뿐, 마음 놓고 풀지 못했다.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라…….”

“그냥 싸게 산 건데 뭘 그래? 얼른 풀어봐.”

천상기가 별거 아닌 척하자 그제야 두 사람은 옷과 신발을 꺼내며 와, 와, 거렸다.

“안 입어봐?”

“나중에.”

천상기는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눈가를 좁혔다.

“뭔데 그래? 왜 그래?”

달려드는 천상기를 말릴 방법은 없었던 모양인지, “조금 다쳤습니다.” 하고 조호철이 입을 열었다.

“어디를? 왜? 위험하다고 하더니 많이 다쳤어?”

천상기의 질문에 강갑수는 정말이지 머리, 꼬리 다 자른 짧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제 한국에 있는 거지?”

“치료하는 동안 며칠 쉬고, 그 뒤에 일해야지.”

“무슨 일? 또 그렇게 위험한 일?”

“우리야 시키는 일을 하는 거지. 그런데 우리가 할 줄 아는 게 그런 거 말고 있나?”

천상기는 턱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수야.”

천상기는 강갑수를 먼저 불렀고, 이어서 조호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그냥 내 동생 해.”

“들어오기 전에 우리 전부 상기 형으로 정하고 왔습니다.”

“그래.”

다짐을 받은 천상기가 단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절대 옛날처럼 미련하게 안 살 거다. 그러니까 우선 벤처사업부에 있어. 내가 제대로 할 만한 일을 찾아볼게.”

“형. 그거 좀 오바다. 우리는 그냥 이런 일이 마음 편해.”

강갑수의 대꾸가 있었는데도 천상기는 뭔가 각오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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