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68화 (268/315)

# 268

268. 드디어 시작이군요 (1)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간 뒤에 천중명은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뒤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내부통신망의 급한 메모들을 살폈다.

움직일 때마다 팔꿈치와 무릎, 허벅지의 상처들이 쓸리며 통증이 몰려들었는데 그게 오히려 피곤과 잠을 쫓아내는 느낌이어서 나쁘지 않았다.

샌드위치와 커피에 이어 물도 마셨다.

연필을 든 천중명은 쌓여 있는 보고서들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이 책상에 올라온 결재서류는 모두 담당 직원과 해당 팀장, 계열사의 임원 결재를 거친 것들이었다. 결재를 기다리며 가슴 졸일 그들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시간을 끌기는 어려웠다.

유진교가 이미 결재한 서류들을 한쪽으로 넘겨놓은 천중명은 당장 급한 결재들을 처리했다.

집무실의 창밖으로 높다란 빌딩 숲이 펼쳐졌고, 그 사이의 도로를 온갖 종류의 차들이 가득 메웠다.

뿌연 사막의 흙먼지와 AK소총, 도깨비 출신 대원들, 신상훈과 지경리온자동차의 스태프, 드라이버들까지, 몸 곳곳에 남은 상처가 아니었다면 한바탕 꿈이 아니었을까 싶었을 정도로 창밖의 서울은 평온했다.

사각사각.

천중명은 결재서류에서 궁금한 부분을 메모했고, 내부통신망을 통해 혹여 참고할 자료가 있는지를 살폈다.

떠나오기 직전에 호텔 주차장에서 빨개진 눈으로 곽대출을 안던 막심이 떠올랐고, 공항까지 함께 움직여서 마지막에 고개 숙이던 통역의 모습도 생각났다.

거대자본이 움직이면 평화로워 보이는 저 서울에 전쟁만큼 끔찍한 충격이 밀려들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싸움이 시작된다.

천중명을 회장으로 만든 하늘의 요구가 닥쳐올 위기를 막으라는 것이었을까?

그걸 왜 나한테?

결재를 마친 서류를 한쪽으로 내려놓은 천중명이 픽 웃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곽대출입니다.

“혼자 있으니까 편하게 말해.”

- 대원 둘이 오늘 출발한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서 회장님 지시대로 귀국해서 치료하겠답니다.

천상기가 들었다면 정말 좋아할 만한 소식이었다.

“오면 알지?”

-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다음 결재서류를 펼쳤다. 보고서와 결재서류에 매달렸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결재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이 다행이었다.

잠시 요르단의 벌판을 떠올렸던 천중명은 나직한 숨과 함께 처리해야 할 결재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

양서평은 중국의 강남을 차지할 정도로 강단과 근성, 그리고 그 정도의 두뇌를 지닌 인물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고도 배부른 소가 발 앞을 지나가는 닭 보듯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던 그는 랠리가 끝난 날 저녁에 류효양을 숙소로 불렀다.

어차피 이미 선두인 지경리온의 신화와 거양의 황금룡은 두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승부는 정해진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앉아.”

“예, 부총재님.”

맞은편에 앉은 류효양을 냉정하게 바라본 양서평이 시선을 돌렸다.

“나가 있어.”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조양회가 깍듯하게 인사한 뒤에 캠핑카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부총재님.”

“가등섭과 함께 내 목을 노린 부사장에게서 사과를 듣다니, 역시 살아 있고 볼 일이지? 그렇지?”

양서평을 향해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류효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류 부사장. 나는 조직원으로 시작해서 강남의 주인이 된 사람이야. 다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곤 하는데 답은 간단해. 나를 노린 놈을 그냥 두지 않았거든.”

커다란 머리, 퉁방울만 한 눈, 그리고 드럼통 같은 상체를 움직인 양서평이 굵직한 손가락으로 담배를 집어 들었다.

찰칵.

“후우.”

담배 연기가 나오기 무섭게 캠핑카 안에 설치한 공기청정기가 붉은색을 띠며 요란하게 울었다.

“총재께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거양자동차를 국유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고, 나는 너를 산 채로 갈아서 메기 밥으로 뿌려주면 어떨까 하고 고민하는 중이지.”

경련처럼 류효양의 고개가 떨리는 가운데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이마와 볼, 목덜미에서 땀이 올라오고 있었다.

“차입금? 방만한 경영? 여자 문제? 거양과 관련된 류 씨 집안은 모조리 조사 대상이 되겠지? 너 때문에?”

끄드등! 털썩!

의자를 밀어낸 류효양이 벌리고 앉은 양서평의 다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이번엔 나와 손을 잡고 총재의 목을 노리자?”

“시키시는 일은 뭐든 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부총재님!”

담배를 빨아들인 양서평이 꿇어앉은 류효양의 머리 위로 연기를 길게 뿜었다.

“돈 좀 있고, 서양문물을 접했다는 인간들은 다 이런 식인데 그런 공부를 따로 하나? 중국의 방식을 무시하다가 힘을 보게 되면 무릎을 꿇거든.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데, 아니! 너희는 그저 울타리에서 사는 오리와 같아. 언제 화덕에 들어갈지 모르는 오리.”

양서평은 담배를 앞에 둔 종이컵에 툭 던졌다.

“이곳에서 망명하자니 가족들이 걸리고, 버티자니 목숨을 잃게 생겼고, 류효양 부사장의 선택이 궁금해.”

“시키시는 일은 모두 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양팔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굽힌 류효양이 이마를 찧듯이 고개를 처박았다.

“천중명 회장님께서 내게 그러시더군. 멀리 보라고. 그래서 나도 한 번쯤은 은혜를 베풀 생각인데.”

“살려주십시오!”

“랠리에서 거양자동차의 트럭이 우승을 차지하면, 그래서 우리 인민들이 자부심을 느끼게 만든다면 총재께 말씀드려 보겠다.”

지경리온을 이기고 우승을 가져오라고?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슬며시 시선을 들었던 류효양이 악귀처럼 웃는 양서평을 보고는 급하게 고개를 처박았다.

당장 류효양은 양서평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결재서류와 함께 오전을 보낸 천중명은 점심시간을 앞두고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 어이쿠! 회장님!

걷다가 넘어졌나 싶을 정도로 박승양의 대꾸는 과장의 끝을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 어디십니까, 회장님? 아랍에 출장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회장님께서 이 박승양이를 잊지 않으시고!

“오늘 오전에 귀국해서 집무실에 있습니다.”

- 아랍에 번쩍! 서울에 번쩍! 회장님께서는 역시 홍길동이 뺨을 좌우로! 홍길동이 아시지요? 심청이가 아빠, 일어나 할 때 너는 아빠라고 부르는구나, 하며 부러워했다던 그 길동이!

천중명의 전화가 반가웠던지 박승양의 너스레가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점심을 같이했으면 싶은데, 시간이 어떠세요? 아니면 오후나 내일 오전에 시간이…….”

- 지금 본사로 가도 됩니다. 도시락이 좋던데, 이번에는 좀 다른 반찬으로 꾸며주시면 더 좋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1시까지 오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 12시 30분이면 도착합니다, 회장님!

박승양과 정신없는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인터폰을 눌렀다.

[네, 회장님.]

“박승양 회장이 12시 30분에 방문할 텐데 도시락을 다른 종류로 준비했으면 싶어. 지난번을 봐서는 밥도 더 필요할 것 같고.”

[준비하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천중명은 잠시 휴대 전화기를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황성규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싶었는데 지금 가장 속이 타들어 갈 사람에게 굳이 부담을 줄 필요는 없었다.

박승양은 정확하게 12시 30분에 부속실에 도착해서 직원과 함께 집무실에 들어왔다.

“회장님!”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시죠.”

소파에 앉은 박승양은 버릇처럼 상체를 숙여 테이블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차를 준비할까요?”

“회장님께서만 괜찮으시면 점심을 해결하고 마셔도 됩니다.”

부속실 직원의 질문에 박승양이 시원하게 대답했고, 곧바로 도시락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한식과 일식으로 하나씩 준비해서 반찬이 겹치지 않았다.

아침을 샌드위치로 때운 뒤에 하는 점심이었고, 박승양이 워낙 맛있게 먹어서 천중명 역시 밥을 하나 더 먹을 정도로 식사는 좋았다.

저축은행의 운영에 관한 이야기, 명동과 대치동 쪽 사채업자들의 동향, 현금을 많이 가진 이들의 투자성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대략 40분에 걸친 식사가 끝났다.

둘이서 커피를 앞에 놓은 다음이었다.

“명동에서 7백억 원을 굴리는 재일교포 영감이 한 명 있습니다. 이 양반이 앞마이를 세워서 돈을 굴리는데 짜장면 한 번 안 살 정도로 지독한 데다 어지간한 곳은 전철을 타고 다닙니다. 예!”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신 박승양이 말을 이었다.

“그런 양반이 그동안 부동산을 담보로 했던 돈을 모두 빼서 현찰로 쥐었습니다.”

말을 마친 박승양이 뭔가 짚이는 것이 없냐는 투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아랍에미리트에서 투자요청이 있을 겁니다. 박 회장님이 관리하는 저축은행들이 나서서 부동산 투자 회사를 별도로 설립했으면 합니다.”

“리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택저당채권을 인수할 목적이긴 한데, 긴급한 상황에서는 부동산을 아예 매입해서 임대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확한 내용은 법무팀과 의논해서 결정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제야 천중명이 부른 목적을 이해한 것처럼 박승양은 눈매를 좁혔다.

“어쩌면 지경저축은행도 박 회장님이 맡게 될지 모릅니다.”

“그럼 천상기 회장은 어떻게 됩니까? 지난번에 굴뚝까지 올라갔었는데요? 아! 제가 끼어들 문제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다른 일을 부탁할 생각입니다. 총수님께 의논드리고, 결정 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시작이군요.”

돈 냄새를 맡은 것처럼 박승양은 코를 좌우로 돌려가며 천중명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천중명의 가벼운 미소밖에 없었다.

**

투박하게 전화를 끊었다고 하더라도 천호득이 천중명을 안 보고 싶을 리가 있겠나. 그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임회장이 얼른 집에 갈 수 있도록 베푼 배려쯤 되겠다.

오후의 중간이었다.

평창동 저택의 정원으로 나온 천호득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굵은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돌아왔으니까 조만간 보겠지.

며칠 지나면 또 저 대문 안쪽의 계단을 올라와서 떡국 먹으러 가자고 할 테니까 그때 보면 되고.

신임회장이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천호득이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저택의 정문에 차가 멈추는 소리가 나더니 직원이 건네는 인사가 연달아 들려왔다.

혹시나 싶은 천호득이 고개를 빼꼼히 내민 직후였다.

계단 위로 천중명의 얼굴이 보였다.

“저 왔습니다.”

“회장이 어쩐 일이야? 떡국 먹으러 갈 때나 보자니까!”

“오늘 뵙고, 떡국 먹으러 갈 때 또 뵈면 되지요. 어머니는요?”

“잠시 나갔어. 앉아.”

“예.”

인사하는 장만섭과 송달순에게 눈인사를 건넨 천중명이 천호득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난번에 마셨던 음료수 좋던데 그거 있을까?”

“준비하겠습니다.”

송달순이 센스있는 태도로 답을 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쓸데없이 속 썩이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없어.”

천중명의 질문에 천호득이 투박하게 대꾸했다. 그래놓고는 또 서운한가 싶었는지 슬쩍 시선을 돌렸는데 천중명은 그저 웃고 있었다.

“왜? 무슨 좋은 일 있어? 혹시 손주 소식이 있는 거야?”

“아뇨. 아버지 뵈니까 좋아서요.”

“흐헤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꾸 찾아와야 한다는 부담을 줄까 봐, 억지로 참았던 천호득의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음료수가 나와서 그걸 마시느라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아버지. 유진교 본부장을 부회장에 임명할 생각입니다. 어떠세요?”

“그런 걸 왜 자꾸 나한테 자꾸 물어? 회장이 알아서 해야지.”

관심 없다는 투로 천호득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부회장을 두 명 둘 생각인데 다른 한 명은 형을 임명하고 싶습니다.”

퍼뜩 천호득의 시선이 날카롭게 천중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제가 없는 동안 대송자동차그룹의 일을 제대로 처리했습니다. 마음도 잡았고요. 그러니 유진교 본부장과 그룹을 맡을 기회를 주었으면 합니다.”

“회장은 뭘 할 건데?”

천호득의 시선이 떨어진 뒤였다.

“저는 회장으로 그룹을 관리해야죠.”

숨도 안 쉰 것처럼 천중명이 답을 내놓았다.

“이제는 계열사가 어떻게 도는지, 어느 정도는 흐름을 익혔습니다. 그러니 책임을 나누면 좀 더 빠르고 유기적으로 운영될 겁니다.”

“정말 그런 거야? 혹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쓸데없는 생각이라니요?”

“내가 마음 쓰는 게 걸려서 형에게 양보한다거나 그런 거 아니냐고?”

가볍게 웃는 천중명을 천호득이 삐죽하는 시선으로 보았다.

“형은 아버지 모시고 여행 다녀왔는데 저는 아직 못 갔으니까 그건 꼭 다녀와야 하는 거 아시죠? 그 여행 말고는 이제 양보할 마음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서도 그건 도리가 아니고요.”

“정말이지?”

“예.”

“진짜지?”

“의심이 느셨어요.”

툴툴대는 천호득의 앞에서 일어선 천중명은 걸음을 옮겨 그의 목과 어깨에 손을 올렸다.

“출장 다녀와서 힘들 텐데 뭐하는 거야?”

“이게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요.”

“흐헤헤헤헤헤.”

결국, 꾹꾹 눌러두었던 천호득의 웃음이 나왔다.

“이제부터는 회사 일은 내게 말하지 마. 회장이 이렇게 곁에 있는 것으로 난 됐어.”

천호득이 손을 들어 어깨를 주무르는 천중명의 손을 덮었다.

“참 좋네요, 아버지.”

“뭐가?”

“전부 다요.”

답을 들은 천호득이 모처럼 행복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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