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265. 미안해, 상기 형 (1)
중단할 때만큼이나 기습적으로 나온 중국의 발표였다.
[중국 정부는 안전점검에 문제가 없었다는 발표와 함께 대송자동차그룹의 중국 공장과 판매시설의 재개를 공식 허가했습니다.]
경제 관련 채널은 물론이고, 보도방송, 인터넷 매체는 이 소식에 관심을 집중해서 다뤘다.
지경그룹과 대송그룹, 대송자동차그룹이 바삐 움직였고, 중국에 남아 있던 대송자동차그룹의 임원들이 당국의 방침을 확인한 뒤에 서류를 보내주면서 상황은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다.
멈춰 있던 공장과 판매시설을 재개하는 것은 쉬 판단해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에서도 특정 모델의 생산을 중단하고 리콜을 시행하는 과정이어서 당장 가동하기보다는 그에 걸맞은 대책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홍보실장, 보고받았지? 이번 조치를 환영한다는 내용과 당분간은 리콜을 진행하며 추후 일정을 정하겠다는 발표문 초안을 작성해서 올려줘.”
공식입장을 준비하면서도 유진교는 이후의 대책을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송자동차그룹의 회장단 회의는 본사 회의실에서 하는 것으로 준비하고, 천상기 회장님께 참석이 가능한지……. 아니, 그 전화는 내가 직접 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지금처럼 생산과 판매가 재개될 때를 대비해 놓은 방안은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과거에 세워놓은 방침대로 무작정 움직일 수는 없었다.
유진교는 퇴근 시간 무렵에 천상기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유진교 본부장입니다. 중국 당국이 대송자동차그룹의 생산과 판매를 재개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 회장단 회의지? 어디요, 장소가?
어딘가 힘이 부족한,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이 거침없는 천상기의 대꾸가 넘어왔다.
“지경그룹 본사 회의실입니다.”
- 몇 시?
“한 시간 뒤로 예정해 놓았습니다.”
- 알았어. 큰 틀이 바뀌는 일 없도록 우리 동생회장님이 전에 지시했거나 결재한 내용 있으면 준비해 놓고. 아!
이게 무슨 일이지?
순순히 나오겠다는 수준을 넘어서 적극적인 천상기의 반응에 유진교는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 현재 생산을 중단한 차종 있지? 중국에서 그 때문에 가동을 중단한 계열사가 몇 곳인지도 파악해서 자료 준비해. 그쪽에 물량을 넘겨줄 방법을 찾아야지.
심지어 꼼꼼할 정도의 지시가 이어지고 있었다.
침묵을 깨달은 유진교가 퍼뜩 입을 열었다.
“예, 회장님.”
-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할 테니까 그렇게 준비해주고. 유진교 본부장.
“말씀하십시오.”
- 내가 바라는 건 두 가지야.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동생회장님이 제시한 큰 방향이 바뀌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생산이 중단된 차종을 담당했던 계열사가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 아시겠지?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놀란 감정을 누르며 유진교가 묵직하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 불편하겠지만, 우리 동생회장님이 돌아올 때까지 나를 임시로라도 부회장으로 불러줘. 혹시 발표할 때나 임원들이 부를 때도 그렇게 할 수 있게.
“알겠습니다.”
답과 동시에 전화가 끊겼다.
휴대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던 유진교가 “후우-.”하며 숨을 뱉어낼 정도로 천상기의 반응은 놀라웠다.
신임회장의 뜻이 이런 거였나?
비록 자리를 비울 때라도 그룹은 언제고 신임회장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이제 혼란은 없다.
누구도 천상기 회장이 대신한 회의에 반감을 갖지 못할 테고, 신임회장이 잠시 자리를 비웠답시고 신문고의 메일을 삭제하는 장난 따위 상상하지 못한다.
감탄과 놀라움, 그리고 감동이 뒤섞인 상태에서 유진교는 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얼른 돌아오십시오.’
천중명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삼킨 유진교는 천상기가 지시했던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
선을 그어놓은 지도와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직선으로 달리는 길이었다. 벌써 4시간을 거의 최고 속도로 달려오는 동안, 천중명은 조양회와 두 번 통화했고, 추일원, 조호철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가고 있으니까 절대 무리하지 마! 벌판이라니까 어떡해서든 트럭을 이용해 빠져나오는 것이 최선이야!”
-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무엇보다 도로에서 벌판을 향해 빠져나오는 정확한 지점을 확인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아쉬운 것도 있었다. 국경을 통과하고 한 시간이 지난 뒤부터 휴대 전화기가 먹통으로 바뀌어서 더는 통화가 안 된다는 점이었다.
“20분만 달리면 목표 지점입니다! 이러면 우리가 먼저 도착합니다! 이집트 국경수비대의 도움이 컸습니다!”
흥분한 곽대출이 고함을 꽥꽥 질렀을 때였다.
그드등! 그아아-앙! 부드등!
지프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야산을 앞에 두고 지프가 멈췄다.
“뭐야?”
“노 패트롤, 보스!”
천중명은 이를 깨물며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
가득 채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연료가 떨어졌다. 거친 운전과 최고 속도를 유지하며 달린 탓에 예상보다 연비가 훨씬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렇더라도 이건 좀 심했다.
“지도!”
이곳은 휴대 전화기도 사용하지 못한다.
천중명은 앞에 두었던 지도와 내비게이션을 확인해서 현재의 위치를 살폈다.
“저 앞에 있는 산만 넘으면 목표 지점이다.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칼과 권총만 준비해서 가자.”
“예, 회장님.”
지프에서 내린 천중명은 두 번이나 막심을 향해, “유 스테이 히어!”를 외쳤다. 그러면서 허리에 대검과 권총을 찼고, 등 뒤로 AK소총을 돌려 멨다.
“보스! 마이 머니?”
그 와중에 일당을 걱정하는 막심에게 천중명은 백 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주었다.
“가자!”
천중명이 달렸고, 그 옆을 곽대출이 따랐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진 요르단의 벌판이었다.
쩔걱쩔걱! 쩔걱쩔걱!
모래가 깔린 바닥을 거칠게 밟으며 달리는 동안, 등에 매달린 AK소총이 일정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런 모습으로 요르단을 달리게 될 줄은 몰랐다.
“허억! 허억!”
뭐라도 상관없다.
지경그룹의 회장이면 어떻고, 요르단이면 또 어떤데?
가슴이 뻑뻑할 정도로 숨이 가쁜 거?
위기에 처한 대원이 앞에 있는데 어쩌라고?
천중명은 이를 악문 채로 빠르게 황야를 달렸다.
**
오른쪽의 산을 커다랗게 돌고 난 직후에 벌판이 펼쳐졌다.
“고우! 고우!”
앞에 앉은 강갑수가 거양자동차의 트럭 옆을 가리켰고,
그아앙! 철컹! 그아아아-앙!
말귀를 알아들은 드라이버가 방향을 틀면서 급하게 속도를 높였다.
크아아앙! 덜컹! 덜커덩!
앞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두 대의 트럭 사이를 파고들며 드라이버가 멋지게 빠져나온 직후였다.
크르릉! 철컹! 크아앙!
거양자동차의 트럭 두 대가 위협적으로 달려들었다.
엔진 소리, 급하게 변속하는 소리, 그리고 도로와 전혀 다른 거친 벌판의 진동 속에서 드라이버는 이를 악물며 트럭을 몰았고, 그만큼 거칠게 두 대가 따라붙었다.
부아-앙! 덜컹! 콰드등!
한 대의 트럭이 들이받을 듯이 달려드는 것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 대의 트럭이 저 앞을 향해 치고 나갔다.
시선을 들었던 강갑수는 이죽대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양쪽의 산이 관문처럼 막아선 틈을 먼저 빠져나간 거양자동차의 트럭이 막아서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드라이버까지 교체했었나?
유럽의 드라이버라면 저렇게까지는 못할 텐데?
“형님! 준비하세요! 먼저 출발하시면 됩니다!”
상체를 뒤로 돌린 강갑수가 커다랗게 외쳤다.
누군가 남아야 할 상황이 오면 남는 사람이나 떠나야 하는 사람 모두 주저하지 않는, 이런 순간을 천 번쯤 훈련했지 싶었다.
“트럭을 들이받지는 못할 거잖아!”
그런데 관문을 향해 달리는 그 짧은 틈에 조호철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 새끼들의 목표는 그냥 우리 둘인 거야! 그러니까 둘이 남으면 트럭은 무사히 도착하는 거지!”
“형님!”
“시끄러워, 이 새끼야! 아까 회장님 말씀 못 들었어? 저놈들 악에 받쳐서 달려드는 거라고! 그런데 나더러 먼저 가라고? 여기에서 다른 말 하면 너부터 죽여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이런 조호철은 절대 못 말린다.
아마 반대 상황이면 강갑수도 비슷했을 거다.
둘이서 픽 웃으며 각오를 다진 직후였다.
콰가각! 끼이이익!
드라이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가로막은 거양자동차의 트럭 앞에 차를 멈췄다.
“유 고우! 오케이?”
어떻게, 하는 눈으로 드라이버가 바라본 직후였다.
찰칵. 찰칵.
안전벨트를 풀어낸 강갑수와 조호철이 트럭에서 내렸다.
크르르릉!
두 사람이 내리자 마치 먼저 가라는 것처럼 거양자동차의 트럭이 움직여 산 사이로 난 길을 열었다.
“고우! 고우!”
강갑수가 하는 손짓을 본 뒤에 지경리온 트럭이 움직였다.
지경리온의 트럭이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네 명이 내리고 난 뒤에 거양자동차의 트럭도 관문을 향해 움직였다.
“아니, 이 새끼들이 자존심 상하게 고작 넷이었네요?”
“독이 바싹 올랐을 거란 회장님 말씀이 맞나 보다. 저 새끼들, 눈을 짜면 독물도 나오겠다.”
흙먼지가 길게 피어오른 속에서 조호철과 강갑수는 다가오는 네 놈을 향해 픽픽 웃었다.
스걱! 스걱!
네 놈이 칼을 뽑아 든 직후에,
스응! 스응!
강갑수와 조호철도 허리에 걸어두었던 칼을 뽑아 들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다가오는 네 놈의 의도쯤 걸어오는 동작이나 몸짓, 눈빛, 손에 든 대검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목적을 이루게끔 제대로 훈련받은 놈들이었다.
“개새끼들! 백랑대 같지요?”
“씨발놈들! 비무장지대 선배들에게 꼼짝도 못 하던 새끼들이!”
강갑수와 조호철은 양손을 앞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것처럼 네 놈도 칼을 든 오른손과 왼손을 가슴 앞으로 들고서 다가왔다.
‘어쩌면 약속을 못 지킬지도 몰라. 미안해, 상기 형.’
5미터쯤 앞에 다가온 적을 노려보며 강갑수는 짧게 천상기를 떠올렸다.
**
양서평이 탄 승용차를 향해 저 앞에서 동양인 남자 한 명이 손을 커다랗게 아래로 내려 보였다. 더 앞에 멈춰 서 있는 두 대의 승용차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멈춰.”
양서평이 지시했고, 조양회가 영어로 말을 전했다.
왼쪽으로는 잡목들이 뜨문뜨문 박힌 야산이, 오른쪽으로는 울퉁불퉁한 황야와 저 멀리에 바위로 된 산이 전부인, 그야말로 인적이 완전히 끊긴 외길이었다.
멈춰 선 승용차로 다가온 남자가 조수석 뒤편의 양서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등섭 부총재께서 기다리십니다. 지경리온의 직원 두 사람을 먼저 보내시는 것이 어떠시냐는 말씀을 전하라십니다.”
“이것들이 어디에서 돼먹지 않은 수작을 부려? 부총재 혼자 너희를 다 상대하라고?”
그래도 조직에 몸담았다고, 조양회가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지경리온의 드라이버와 조수석의 스태프가 몸을 돌려 바라보는 앞에서 창밖의 남자는 조양회의 반응을 예상했던 눈치였다.
“총재께서 지시한 일입니다. 원하시면 통화를 연결하겠습니다.”
양서평은 창을 향해 상체를 숙인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총재와 통화하겠다.”
“알겠습니다.”
남자는 순순히 휴대 전화기를 꺼내 번호를 입력했고, 통화 버튼을 꾹 누른 뒤에 차장 안으로 건네주었다.
- 여보세요?
“총재님. 양서평입니다.”
- 가등섭을 만난 모양이구나. 그곳에 있는 놈의 말을 믿어도 좋다. 내가 보장하지.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총재는 거침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 일이 마무리되면 전화해.
“예, 총재님.”
통화를 마치면서 양서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양서평이 이길 것을 확인하는 듯한 총재의 말투가 거슬려서 그랬다.
“너는 이 차와 함께 출발해.”
“형님!”
“함께 내렸다가 함정에 빠지면 너까지 죽는다. 총재의 말씀대로라면 내가 가등섭을 해결하고 이 친구들과 따라가게 될 거고, 아니라면 너는 천중명 회장님께 곧장 달려가.”
양서평은 작정한 것처럼 조수석의 뒷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상체를 차 안으로 넣은 양서평이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을 모시고 사업을 할 거라면 이런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아. 그러니 출발해.”
거기까지였다.
문을 닫은 양서평이 재킷의 앞을 매만지며 조수석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는 출발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부으으응!
분위기에 놀란 드라이버가 조양회의 말이 없었는데도 곧바로 차를 움직였다. 그들이 보기에 양서평이 더 높은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자.”
양서평이 움직이자 두 대의 승용차에서 가등섭을 포함해 모두 네 명의 남자가 내렸다.
10미터, 5미터,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인사를 잊었나, 양서평?”
“그럴 사이가 아닌 줄 아는데?”
“흐호호! 양서평이 이렇게 컸을 줄은 몰랐군. 여기까지다.”
가등섭이 눈짓을 하자 두 명이 대뜸 가슴에서 권총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총재가 만든 함정이었구나!
이렇게 양서평과 가등섭, 두 사람을 모두 제거하고 다루기 쉬운 놈을 앞세울 계획이었어!
이를 꽉 깨문 양서평을 가등섭이 재미있다는 투로 바라보았다.
“제거해.”
푸슝! 푸슝! 푸슝! 푸슝! 푸슝!
총소리는 모두 다섯 발이었다.
털썩! 콰등!
남자 한 명은 곧바로 길가에 자빠졌고, 승용차의 트렁크를 붙든 가등섭은 놀라고 분한 얼굴로 부들거리며 버텼다.
푸슝! 푸슝!
다시 두 발의 총성이 가등섭의 머리를 망가트리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총재님의 지시였습니다. 시체를 알아서 처리한 뒤에 전화하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양서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빠진 가등섭과 그를 따르던 부하를 바라보았다.
뭔가 있구나!
조직원이 아니라 퇴역 군인들인 놈들이 가등섭을 배신했다면 이건 완벽하게 총재의 지시야!
나에게 원할 것이, 혹시 천중명 회장?
그래! 총재가 천중명 회장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그래서 이렇게까지 한 거지!
생각을 정리한 양서평이 부리부리한 눈을 들었다.
“처리해.”
“예, 부총재님. 모시겠습니다.”
남자가 문을 열어주는 승용차로 움직이며 양서평은 옅은 웃음을 그려냈다. 그가 중국의 밤을 지배하는 두 번째 서열에 오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