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59화 (259/315)

# 259

259. 미끼가 좋잖아 (1)

호텔로 돌아온 천중명은 홀가분하게 앉아 지경그룹 통신망의 보고를 확인했고, 이어서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가장 먼저 통화한 사람은 천호득이었다.

“힘드셨을 텐데 형에게 맡기지 굳이 나가셨어요?”

- 내가 회장의 권위를 바싹 세워놨어. 그건 그렇고 나한테 화난 거나 서운한 건 없지?“

“비자금 말씀하세요?”

- 크흠.

이런 양반에게 어떻게 화를 내겠나.

“그렇게라도 공사를 따내야 할 시기가 있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번까지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공사를 수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그래. 회장이 알아서 해.

어딘가 고분고분한 천호득은 늘 수상하다.

“어쩐 일이세요?”

- 뭐가?

“뭔가 있으시잖아요.”

- 회장이 이상한 지시를 내리니까 그렇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형에게 넘겨주고 어디 멀리 가는 사람처럼 이게 뭐야?

갑갑했던 속을 털어놓는 것처럼 천호득의 말이 한순간에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

- 나는 더 욕심 없어! 이제 겨우 바로잡아가는 지경그룹이 흔들리는 꼴도 보기 싫고! 얼른 돌아와! 아니면 내가 그리로 갈 테니까 알아서 해!

천중명이 가볍게 웃자 “웃기는!” 하는 천호득의 타박이 날아들었다.

“랠리 확인하고 들어갈게요.”

- 정말이지?

“그럼요.”

- 알았다.

그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천호득다운 통화여서 이제는 제법 적응된 일이었다. 이어서 천중명은 허선영에게 전화를 넣었다.

- 뭐예요? 걱정했잖아요. 건강은요?

그렇게 20분쯤 이야기를 나눈 뒤에 아쉬운 통화를 마쳤다.

허선영이 그리운 감정을 잠시 접어둔 채 천중명은 노트북을 당겨 포털에 올라온 기사를 살폈다. 기사에 올라온 천상기는 기대 이상으로 굉장히 잘해냈고 반응도 좋았다.

[동생회장의 경영방침, 형이 지킨다.]

[지경제강 회장단, 전무와 상무, 해당 부장 대기발령.]

[동생회장의 지시를 외친 천상기 회장.]

[명예회장까지 나선 천중명 신임회장의 지시, 직원들을 감동시키다.]

제목 아래 달린 기사는 대체로 왜 이런 사태가 생겼는지를 잘 설명했고, 직원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지경의 정신이라는 낯간지러운 평가도 달았다.

‘제법인데?’

천중명이 만족한 눈으로 기사를 살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상기의 이름을 액정에 올린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나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어. 최종 보고서에 사인했으니까 바로 동생회장에게 보고할 거고.

“고생했어. 다음에도…….”

- 안 해! 안 한다고! 하여간 이번에 승진시켜주겠다는 약속은 꼭 지켜라, 진짜!

지지 않는 인간 천상기의 성격이 제대로 드러난 대꾸를 들으며 천중명은 웃음이 터졌다.

“들어가는 대로 승진 명령 지시할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 얼른 들어와! 동생회장이 자리를 비우는 건 아직 좀 이른 것 같다. 아버지 아니었으면 회장단이 반발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고.

통화의 마지막에 천상기는 이번 일을 처리하며 느낀 점도 전해주었다. 강단 있는 그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시스템이 정착하는데 아직 많은 시간과 그만큼의 적응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일주일? 아니면 그 이상 걸릴지 몰라. 이쪽 정리하고 갈 테니까 다른 건 몰라도 직원과 관련된 일은 계속 좀 챙겨줘.”

- 안 해!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다른 말을 듣는 것이 두렵다는 것처럼, 확실히 천호득의 아들이구나 싶은 태도로 천상기는 전화를 바로 끊었다. 하여간 변함없는 모습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낮에 돌아보았던 지역의 지도와 마타르가 전해준 정보를 천천히 세세하게 확인했다.

마타르가 전해준 정보에는 가등섭이 데려온 특수부대원의 인적사항, 그들의 위치, 그리고 곽대출을 따라다니는 놈들의 숫자까지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오늘 시장에 나간 곽대출을 추적했다면 정보에 적힌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천중명이 연필을 들어 지도에 몇 곳을 체크한 뒤였다.

장에 갔던 곽대출이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별일 없었어?”

“멍청한 놈들 둘이서 자꾸 사진 찍어대는데 하마터면 V자를 만들어서 웃어줄 뻔했습니다. 뭔 미행을 그렇게 대놓고 하는지, 아후!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양손에 들고 온 커다란 천 가방을 문 안쪽에 내려놓은 곽대출이 냉장고를 열어서 생수를 시원하게 마셨다.

“준비물은?”

“빠짐없이 챙겼습니다.”

“저녁 먹고 푹 쉬어. 내일부터는 제대로 뛰어야 할 테니까.”

“푸짐하게 먹어야겠지요?”

“그게 좋지 않겠냐?”

곽대출이 흐뭇한 얼굴로 객실에 놓인 메뉴판을 들었다. 전생에 늑대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놈은 양고기의 맛에 흠뻑 빠졌다.

“주인영 부장에게 전화는 해줬어?”

“시장에서 오는 길에 통화했습니다.”

곽대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안신우 부장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곽대출, 직장인 다됐네!”

“에이, 진짜!”

천중명의 농담을 들은 곽대출이 단박에 반항하는 표정을 그려냈다.

**

홀로 남은 유진교는 혼이 쑥 빠져나갈 정도로 바빴다.

노트북을 이용해 보고받고, 휴대 전화기로 미흡한 내용을 살피는 것은 번거롭고 분주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 연달아 터진 사건을 수습해야 했다.

공사가 중단된 동안의 손해에 관해 아랍에미리트와 원만하게 협상을 매듭지었고, 정희배 총괄사장에게 비자금을 성과금으로 돌리라는 지시를 하는 것으로 아랍에미리트의 현장은 대강 마무리되었다.

그 뒤로 한숨을 돌리는가 싶기 무섭게 그룹발전본부 소속 직원의 일탈이 보도되었다. 다행히 천호득과 천상기가 나서서 대강 해결되었다만, 어떤 식으로든 본부장인 유진교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었다.

무거운 얼굴로 남은 서류들을 챙기던 유진교의 휴대 전화기가 울렸다.

“예, 회장님. 유진교입니다.”

- 이쪽에서 시간이 좀 길어질 것 같네요. 보고서 확인했으니까 정리되는 대로 먼저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 본부장님.

책임질 부분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려는 유진교의 말을 천중명이 뚝 잘랐다.

- 이번 일은 엄밀히 따지면 곽대출 본부장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다른 말씀 마세요. 본부장님에게 책임을 묻게 되면 곽대출 본부장도 무사히 넘어가기 어려우니까요.

어떻게 알았을까, 유진교가 책임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는 것을 말이다. 저렇게 말해주는 천중명을 위해서라도 이런 일을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회장님. 예외가 생기면 나중에 곤란해지십니다. 이런 일이 파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읍참마속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징계는 있어야 합니다.”

- 그렇다면 내가 들어갈 때까지 다른 일이 없도록 그룹을 살피고 계세요. 그 문제는 내가 직접 결정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전화 통화로 길게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어서 유진교는 일단 천중명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 이번 출장에서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진교는 먹먹한 심정으로 액정으로 바라보았다. 우선 돌아간다. 그런 뒤에 천중명과 의논해서 징계를 결정한다.

휴대 전화기에서 정희배의 번호를 찾은 유진교는 인천행 비행편을 예약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에 서류를 정리했다.

**

저녁을 먹은 천중명이 곽대출과 마주 앉아 내일 필요한 몇 가지 품목들을 적어갈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처음 보는 복잡한 번호가 액정에 올라왔다.

“여보세요?”

천중명이 궁금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은 다음이었다.

- 천중명 회장. 마타르입니다. 예정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왕족과의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관련 조치를 마쳤습니다.

나직한 아랍어 위로 살짝 늦게 우리말이 건너왔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걸까 하던 참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내일 제가 직접 움직일 생각입니다. 몇 가지 도움이 가능한지 알고 싶은데요.”

이어진 대화에서 천중명은 대강 계획을 설명하고 몇 가지의 협조를 요청했다.

- 굳이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습니까? 괜찮다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에서 해결토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중국에게 핑곗거리가 생깁니다. 청장과 손을 잡은 이상, 우승이 더욱 절실해지기도 했고요. 말씀드렸던 도움만 확실히 부탁합니다.”

- 흐음.

마타르의 굵직한 숨소리가 들린 다음이었다.

- 천 회장은 묘한 매력을 지녔군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조치를 오늘 중으로 마쳐놓겠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꼭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으니 그 점을 기억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청장.”

통화가 그렇게 끝났다. 곽대출에게 통화 내용을 전해준 천중명은 필요한 물품 목록을 마저 작성했다.

다음 날, 일찌감치 일어난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눈을 뜨면서부터 곽대출은 모든 것이 급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정도로 급하지 않고, 또 이렇게 흥분하는 것이 위험한 일인 것을 잘 아는 인간이 말이다.

“시장에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일찍?”

“우선 상점을 먼저 들른 뒤에 시장을 쭉 둘러보면 될 것 같습니다.”

테이블에 앉은 천중명의 앞쪽에서 어제 사 온 가방을 챙기며 곽대출이 서둘렀다.

“곽대출.”

천중명의 음성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허리를 굽히고 있던 곽대출이 상체를 세웠다.

“흥분하는 심정은 알겠다만,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경과 아랍에미리트까지 묶인 일이다. 좀 가라앉혀. 무엇보다 흥분하면 반드시 빈틈이 생겨.”

내가 그랬나?

곽대출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소풍 가는 게 아니라, 진짜 적을 상대하러 가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아. 지금은 그거 놔두고 커피부터 타.”

“예.”

멈칫했던 곽대출이 입을 다문 채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믹스 커피를 준비했다.

커피포트에 부은 물이 끓고 이어서 달달한 냄새가 테이블 주변을 가득 메우도록 천중명이나 곽대출 모두 말이 없었다.

이집트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민 스위트룸의 거실이었다.

“커피 드십시오.”

곽대출이 천중명의 앞에 잔을 놓아주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좀 가라앉았어?”

“예.”

“도깨비란 놈이 나서기 전에 흥분한 꼴이나 보이고. 대원들이 지금 너를 보면 뭐라고 했겠냐?”

곽대출은 변명 대신 멋쩍은 웃음을 먼저 내놓았다.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도깨비의 삶이 몸에 아직 남았나 봅니다. 전에 회장님과 움직이던 때가 떠올라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집중해. 어제 너를 미행하던 놈들처럼 방심하는 순간, 한 방에 갈 수도 있어.”

커피를 마시며 곽대출은 눈빛과 태도를 확실히 되찾았다.

“이제 다녀와.”

“예.”

곽대출이 객실을 나선 뒤에 혼자 남은 천중명은 객실의 창가를 향해 앉아 서울에서 넘어온 보고서를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서울은 점심시간을 지나 오후의 중간쯤이었다.

두 시간쯤 지나서 곽대출이 돌아왔다. 서울이 퇴근 시간에 가까울 시간이었다.

“필요한 물품은 차에 모두 실어놓았습니다.”

“그럼 출발해야지?”

천중명은 먼저 노트북의 전원을 껐고, 서류와 함께 개별금고에 넣었다. 출발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곽대출이 뜬금없이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전원을 넣었다.

“커피 한 잔 더 마시겠습니다. 마음을 다잡는 의식입니다.”

금고에 비밀번호를 설정한 천중명이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순간에 말은 필요 없었다. 창에 담긴 이집트의 풍경을 배경으로 조용하게 커피를 마셨고, 잔을 올려놓은 뒤에 어제 사놓았던 짐들을 들고 객실을 나섰다.

이제야 곽대출은 완벽한 도깨비의 모습을 갖췄다.

천중명의 눈빛과 표정,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그의 자세가 그랬다.

“빅보스! 보스!”

호텔 앞에 서 있던 막심이 요란하게 손을 들었는데 시선을 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저래 줘야 미행하는 놈들이 놓치는 일이 없다.

천중명이 뒤편 안으로 들어갔고, 곽대출이 조수석에 앉았는데 짐들이 워낙 많아서 뒷좌석의 절반과 뒷문의 공간이 뻑뻑해 보일 지경이었다.

“고우, 막심!”

“예쓰, 보스!”

곽대출의 지시와 동시에 지프가 묵직하게 출발했다.

도로의 굴곡에 따라 흔들리는 곽대출의 상체를 보면서 천중명은 참 오랜만에 힘겨웠던 과거의 훈련을 떠올렸다.

저놈과 둘이 움직여서 단 한 번도 실패해 본 적 없다.

천중명과 곽대출을 상대로 이겨낸 도깨비도 없었고.

감정이 비슷했던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본 곽대출이 씨익 웃었고, 그를 향해 천중명이 픽 웃어주었다. 그렇게 두 시간 이상을 달린 지프가 황야의 한 곳에 멈췄다.

사막이 시작되는 초입이라 모래와 흙이 뒤섞였고, 여기저기 잡목이 흩어진, 베이스 기지에서 10킬로미터쯤 못 미친 곳이었다.

지평선이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올록볼록하게 보이는 곳에서 천중명과 곽대출은 지프에 실어놓았던 짐들을 내렸다.

“고우, 막심. 투머로우 모닝 커밍, 오케이?”

“예쓰, 보스!”

곽대출의 지시를 받은 막심이 이를 드러내는 미소를 보이고는 지프에 몸을 싣고 떠났다.

“옷부터 갈아입자.”

“예.”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어제 사놓았던 회색으로 염색한 군복 바지에 사파리 느낌의 셔츠를 걸쳤다. 신발은 군화를 연상시키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 작업화였다.

이어서 작업용 벨트로 허리를 조였고, 거기에 대검과 권총을, 또 다른 대검을 오른쪽 발목에 걸었다.

소총은 바로 앞의 모래를 파고 가방째 묻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텐트를 세웠고, 그 앞에 구덩이를 파서 불을 피울 장작도 쌓았다. 물을 끓일 수 있도록 쇠로 된 다리에 주전자까지 걸자 제법 캠핑 분위기도 나왔다. 음식을 담은 아이스박스와 물병을 텐트 앞에 묻어두면서 1차 준비는 모두 끝났다.

군복 바지, 사파리 셔츠, 허리를 잘록하게 조인 허리띠에 매단 무기들, 곽대출, 하늘과 흙, 바람 속에서 서 있자 정말이지 훌쩍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 새끼들 오늘 분명히 오겠지, 회장님?”

“미끼가 좋잖아.”

어딘가 색이 바랜듯한 하늘을 배경으로 천중명이 건넨 답이었다.

“이제 준비해야지?”

휘익! 터억!

곽대출이 던져준 삽을 천중명이 받았다.

알려나 모르겠어, 가등섭.

우리는 한 번 숨으면 일주일씩 땅속에서 버티는 거.

그러게 왜 하필 도깨비를, 그것도 우리 둘을 건드려?

비트를 준비하는 천중명의 눈빛이 곽대출보다 독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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