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58화 (258/315)

# 258

258.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데? (3)

천호득은 연륜이 있었고, 본사를 방문한 목적도 분명했다.

“발전본부로 가야지! 주인 없는 회장실에 함부로 들어가? 비서실은 지금껏 일을 이따위로 했어!”

그는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비서실 직원을 꾸짖는 것으로 그룹발전본부로 향할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밝혔다. 그러고는 비서실 직원의 안내와 장만섭이 미는 휠체어의 도움으로 그룹발전본부에 도착했다.

직원들이 줄줄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누구야? 누가 감히 회장에게 올라갈 메일을 삭제했어!”

천호득은 독기가 펄펄 나오는 눈빛으로 발전본부를 둘러보았다. 천중명의 눈빛이 강렬하고 총기 넘친다면, 나이를 먹어 흐릿한 천호득의 눈은 어딘가 집요하고 야비한 독기를 품은 느낌이었다.

“그룹발전본부가 이렇게 부족했던 게야? 아직 그것도 못 알아냈어?”

천호득이 다시 그룹발전본부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천상기를 방문했던 상무가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 끝에서 안신우 부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왜 그랬어? 무슨 생각이었던 게야!”

“제가 모셨던 부회장이 알아서 잘 무마하실 거라고 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회장의 가장 큰 힘이 되어야 할 그룹발전본부의 직원이 눈속임을 해? 너는 직급이 뭐야!”

천호득의 고함이 쨍하고 울린 직후였다.

이번엔 천상기와 진우정이 그룹발전본부에 들어섰다.

“저 왔습니다.”

멈칫했던 천상기는 오늘 처음 보이는 공손한 태도로 천호득에게 인사한 뒤에 발전본부 안을 둘러보았다.

“저 인간이 전에 따르던 부회장의 지시로 메일을 삭제했단다. 알아서 잘 무마할 거란 약속을 받았다고 들었다.”

고자질처럼 천상기에게 내용을 전한 천호득이 고개를 좀 더 돌렸다. 장만섭이 눈치가 있어서 휠체어 방향을 틀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그는 우직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저 직원이야? 굴뚝에 올라갔던 직원이?”

“예, 총수님.”

천상기가 답을 하자 천호득은 떨리는 손짓으로 그를 가까이 불렀다.

그룹의 총수요, 명예회장인 천호득이었다. 그런 그가 손을 뻗어 쭈뼛쭈뼛 다가간 진우정의 손을 잡았다.

“회장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나도 나섰고, 여기 둘째도 움직였으니 곧 일이 바로 잡힐 게야. 서운한 게 있으면 남김없이 여기 둘째에게 말해.”

다독여주는 천호득의 말이 고마워서, 아버지처럼 손등을 덮어주는 그의 왼손이 따듯해서 진우정은 왈칵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바로잡자. 지난 세월 동안 잘못되었던 걸 이렇게라도 바로잡아 보자. 알았지? 너는 내가 회장의 바지를 붙들어서라도 직장을 잃는 일이 없게 할 테니까 마음 풀어.”

“예, 총수님.”

자리에서 서 있는 그룹발전본부 직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이었다. 울리는 전화를 급하게 마무리하는 직원이 있었고, 아예 휴대 전화기의 전원을 꺼버리는 직원도 있었다.

“둘째 너는 저 인간 처리하고, 곧바로 제강으로 가. 회장이 관심을 두는 일이다. 한 점 허투루 넘어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예, 총수님.”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독하게 처리해.”

변화무쌍한 건 집안 내력이지 싶을 정도로 천호득은 다시 부드러워진 얼굴로 진우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음 풀어. 알았지?”

“아닙니다, 총수님. 이제 정말 서운하거나 억울한 거 없습니다. 굴뚝까지 올라와 주시고, 총수님께서 직접 움직여 주셔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흐헤헤헤. 회장이 화를 내니까 둘째부터 나까지 나섰지 뭐냐? 나도 이제 회장에게 할 말이 생겼다. 그리고…….”

천호득은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진우정에게 건네주었다.

“총수님! 이런 걸 바란 것이 아닙니다!”

“아무렴 굴뚝에 올라가고 아무 일 없이 처리되길 바랐어? 3개월 정직이나 감봉처리는 받아야지. 그것까지는 나도 어쩌지 못할 테니 그동안 생활에 보태.”

억지로 봉투를 건네준 천호득이 천상기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노려본 뒤에 고개를 돌렸다. 확실한 신호였다. 장만섭은 이제야 휠체어를 움직였다.

“거기! 당신은 자술서 써서 제출하고, 이 시간 이후로 업무에서 손 떼! 유진교 본부장이 와서 후임을 정하기 전까지 상무! 당신이 신문고를 직접 챙기고!”

“예, 회장님.”

그룹발전본부를 나서는 천호득의 뒤에서 천상기의 지시가 풀려나오고 있었다.

“전산실에 연락해서 혹시 추가로 삭제된 메일이 있는지 확인하고, 법무팀에는 메일을 삭제한 직원에게 최고로 내릴 수 있는 처벌이 뭔지 확인해 봐. 아니면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든가. 처리 후에 바로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예, 회장님.”

문을 나선 천호득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고,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뒤에는 알 듯 말 듯 한 웃음을 지었다.

**

두 시간을 달린 지프가 황량한 둔덕에 멈췄다.

“푸후-!”

곽대출이 좌우로 숨을 뱉어낼 정도로 거친 흙먼지가 지프를 덮친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지붕을 벗겨낸 지프의 뒤쪽과 문을 짚고서 훌쩍 밖으로 뛰어내렸다.

“우리 위치가 여기쯤 됩니다. 베이스 기지는 여기에서 두 시간 정도 더 달리면 나옵니다.”

둔덕에서 지프의 앞을 가리킨 곽대출이 지도를 꺼내 천중명의 앞에 펼쳐주었다.

“빅 보스! 워터! 보스! 히어!”

그 사이 막심은 물 두 병을 꺼내와서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막심, 괜찮아요-오.”

그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답을 내놓았다.

“담배 가져왔냐?”

“여기 있습니다.”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막심? 시가렛?”

“막심, 괜찮아요-오.”

2개 국어를 섞어 사용하는데도 정말이지 이해가 쏙쏙 되는 대화를 들으며 천중명은 지도와 베이스 기지가 있는 방향을 천천히 살폈다.

“대출아, 우리 대원이 일곱 명이라고 그랬지?”

“예, 회장님.”

연기를 길게 뿜어낸 천중명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을 살폈고, 이어서 시간과 태양의 위치를 확인했다.

“우리가 훈련했던 방식대로 하자.”

“추격입니까? 잠복입니까?”

“우리가 다치지 않아야 하고, 랠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가등섭을 잡으려는 건데 그걸 정할 필요가 뭐 있어? 상황 봐서 결정하면 되지.”

“놈들이 이리 몰려오게 할 방법은 있으십니까?”

곽대출의 질문을 들은 천중명은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나 정도면 저놈들이 욕심낼만하잖아.”

물을 마신 천중명의 답에 곽대출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일부터 시작한다. 오늘 총기를 구한 걸 저놈들도 충분히 알았을 테고, 트럭이 이곳에 도착하는데 사흘 남았으니까 놈들이 욕심내기 딱 좋다.”

“밤에 합니까?”

“낮에 하면 놈들이 오겠냐?”

“흐하하하.”

만족한 듯 웃는 곽대출을 막심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 시작하자. 돌아가는 대로 준비물과 적당한 옷 좀 사와. 신발도 그렇고.”

“예, 회장님. 그런데 몸이 그래서……?”

“용인이랑 포구에서 일을 보고도 그래?”

“하긴 뭐.”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천중명은 남은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

호텔에 있던 가등섭을 향해 다가간 남자가 상체를 굽힌 채 내용을 전한 다음이었다. 가등섭은 매섭게 눈알을 돌렸다.

“천중명이 직접?”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했습니다. 사진을 보십시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 폰을 꺼내 사진을 찾았다. 호텔 앞에서의 모습과 지프에 타는 사진이 차례로 액정에 올라왔다.

“옆에 있는 눈 찢어진 인간이 그놈인가?”

“남부증권에서 양서평의 하부 조직 아이들을 상대했던 인물입니다.”

입술 끝을 닦는 것처럼 손을 턱으로 쓸어낸 가등섭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거기까지 트럭이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사흘 뒤입니다.”

“그렇다면 직접 현장을 지키겠다, 이런 의미인가?”

“총기류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자리가 베이스 기지에서 두 시간 거리였습니다.”

의심이 많은 가등섭은 시간을 끌었다. 저러다가 한번 정하고 나면 더없이 잔인해지는 인간이 또 가등섭이었다.

“내일도 그곳에 나온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습니다.”

“내일까지 지켜보고 결정하지. 혹시 우리를 끌어들여서 언론에 공개하려는 건지도 모르니까. 오늘 무얼 하는지 확실하게 살펴.”

가등섭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지시를 내린 직후였다.

찌이잉. 찌이잉.

두 번의 진동이 연속해서 스마트 폰으로 들어왔다.

뭐야, 하는 가등섭의 눈꼬리 앞에서 남자가 급히 상체를 다시 숙였다.

“시장에 나가서 캠핑 도구를 구입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남자는 스마트 폰을 들어 곽대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흐호! 흐호호!”

가등섭의 첫 번째 반응은 독특한 웃음이었다. 그런 뒤에 그의 눈 끝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쭉 찢어졌다.

“자신 있으면 달려오라고? 흐호호! 배포가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회장 나부랭이가 감히 우리 조직과 내가 데려온 아이들을 우습게 여길 줄은 몰랐다!”

고개를 뒤로 젖힌 가등섭이 “흐호호호호!” 하며 이가 드러나도록 과장된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을 준비해서 보내!”

“어느 수준으로 할까요?”

“우리 아이들을 먼저 보내 봐.”

“예!”

지시를 받은 남자가 객실을 나섰다.

“이런 시건방진 인간이 있나? 그 만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제대로 알려주마! 후회는 그 어딘가에 파묻힌 뒤에 해라!”

남자가 나선 문을 향해 혼잣말을 뱉어낸 가등섭이 이를 꽉 깨물었다.

**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는 불편한 기색으로 둘러앉은 왕족들을 돌아보았다. 이틀에 걸쳐 회의를 진행 중이었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다.

회의를 통해 마타르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왕족 대부분이 이미 재산을 불릴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긴, 천중명을 만나기 전이라면 아마 마타르도 그쪽의 손을 잡지 않았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를 우리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한국의 재벌로 보아서는 곤란해. 리베이트를 정식 회계로 돌릴 만큼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도 명심해야 하고.”

마타르가 마지막 경고처럼 입을 열었다.

“블루크루드를 손에 쥘 기회를 정말 버릴 생각인가?”

그리고 던진 질문에 반응은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기와 수소 차량을 두고 굳이 블루크루드로 가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한국인은 반드시 뒷돈을 요구합니다.”

“그 말은 내가 이면 계약이라도 체결을 했다는 뜻인가?”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한국인이 그렇다는 뜻이지요.”

이죽거리는 반대파의 수장을 바라보며 마타르는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대 자본과 손을 잡은 왕족들을 반역죄로 구금했었지. 우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뜻입니까?”

왕족들이 설마 하는 시선으로 마타르를 바라본 다음이었다.

고개를 돌린 마타르는 문 앞에 대기하던 카리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신호에 카리프가 고개를 끄덕였고,

우르르르!

원피스 차림에 권총과 소총을 든 친위대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유대계와 손을 잡은 왕족들이 있다는 정보를 어떻게들 생각하나?”

“이건 모함입니다.”

“그렇겠지.”

지금껏 거만하게 마타르를 대하던 왕족들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아랍에미리트의 부족을 대표하는 왕족들이 설마 유대계와 손을 잡았을 리가 있겠나.”

마음을 굳힌 것처럼 마타르는 냉정한 얼굴이었다.

“이곳에 있는 왕족들을 모두 호텔에 구금하도록. 반항하면?”

놀란 왕족들을 마타르가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사살해도 좋다.”

“우리는 부족을 대표하는 왕족들이오! 아무리 왕세자에게 권한이 있다고 해도 우리를 감금할 권리는 없소!”

“알아드 알 사리마! 네가 유대계와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감히 나와 왕족의 권위를 의심하겠다는 거냐!”

쨍하는 고함이 터진 뒤였다.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라. 그쪽이야 형제간이라 재산만 정리하고 끝낼지 모르지만, 나의 선택은 바로 저거다.”

검지를 왼쪽으로 기울인 마타르가 바로 옆에 서 있는 친위대의 소총을 가리켰다.

“유대계와 손을 잡았던 왕족은 신께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 좋아.”

침묵이 흐르는 사이에서 마타르가 몸을 일으켰다.

“한국의 천중명 회장을 보고 느낀 것이 있지. 사심 없는 사람은 겁날 것이 없어. 그러니 그의 목적과 목표에 당당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은 믿을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이오!”

알아드의 반항을 본 마타르가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개인의 부를 위해 유대계와 손을 잡은 왕족과 거대자본에 대항하는 천중명 회장 중에서 누가 우리의 친구일까? 한 가지만 분명히 하자. 나 역시 이번 일에는 사심을 버렸다.”

대꾸가 없는 왕족들을 보며 마타르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나라에 돈이 말라가는데 왕족들은 배를 불리기 위해 유대계와 손을 잡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차가운 시선을 던진 그가 몸을 돌리려는 참이었다.

“협조하겠습니다.”

알아드 알 사리마가 시선을 떨군 채 마타르가 원하던 답을 내놓았다.

“알아드!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신의 이름을 걸고 마타르 왕세자의 결정에 협조하겠습니다.”

마타르는 그제야 카리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얼마 뒤에 너희는 신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될 거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먼저 천 회장과 선이 닿았다면 우리에게는 기회조차 없었을 테니까.”

말을 마친 마타르가 몸을 돌렸다.

두 가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심 감사하고 안도했다. 일어서 나가려는 천중명을 붙든 것과 자가용 비행기를 제공한 일이었다.

그가 보고 느낀 천중명은 절대 고마움을 잊을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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