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57화 (257/315)

# 257

257.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데? (2)

곽대출이 스위트룸으로 바꾼 호텔의 객실에서 세 시간을 겨우 자고 난 다음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천중명을 곽대출은 테이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하십시오.”

“둘만 있는데 그렇게 깍듯한 척하는 거 불편하지 않냐?”

“그냥 드십시오, 회장님.”

테이블에 물을 올려놓는 곽대출의 대꾸가 재미있어서 둘이 킬킬대며 웃었다.

3인분의 미국식 아침 식사였다.

베이컨, 달걀 프라이, 토스트, 콘플레이크, 우유, 주스, 커피 등을 앞에 놓은 뒤에 둘이서 마주 앉았다.

“회장님. 뭔가 있지?”

“빤히 같은 메뉴인데 다른 게 있을 턱이 있냐?”

“어라? 말 돌리는 거 보니까 진짜 뭐가 있나 보네? 뭐야? 궁금하잖아?”

“뭘?”

버터를 토스트에 바르며 천중명은 곽대출을 보았다.

“천상기 회장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고 오늘 아침은 돌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여유까지 있잖아? 무슨 일이야? 회장을 그만두려고?”

토스트를 베어 문 천중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뭔데?”

“랠리 결과가 전보다 좀 중요해졌어. 가등섭을 확실히 눌러야 할 이유도 생겼고.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텐데 한국이 비잖아.”

“확실히? 확실히 누른다고?”

“도깨비에게 대가리를 디미는 놈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박살을 내줘야지.”

“알면서 그래?”

포크와 나이프를 든 곽대출이 영화에 나오는 귀신 인형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회장님. 나 미치게 흥분돼요.”

곽대출의 대꾸를 들으며 천중명은 느닷없이 시간을 뚝 떼서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앉은 장소가 호텔이고, 전에 비할 바 없이 고급스러운 모양새였지만, 이후에 해야 할 일이 과거에 받았던 훈련과 비슷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곽대출과 함께 웃고 난 천중명은 커피를 마신 뒤에 시선을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앞에 앉은 곽대출에게만큼은 솔직해야 한다.

“어쩌면 지경그룹을 천상기에게 맡길지 몰라.”

“그렇지? 어째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본부장이란 자리, 급여, 그따위 것 전혀 관계없는 곽대출은 그저 천중명의 다음 계획이 궁금한 눈치였다.

“나는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아직은 준비만 하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영어 공부 좀 더 하고.”

“여기서도 현지인 기사와 둘이서만 움직일 정도로 회화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계획이란 게 뭔데 지경을 천상기 회장에게 넘길 생각을 하셔?”

곽대출이 노른자를 흘리며 계란프라이를 입에 욱여넣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질 수 있어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곽대출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침 먹고 두 시간쯤 서류 검토한 뒤에 출발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예, 회장님.”

“무기는?”

“총기는 암시장이 따로 있다던데 함부로 권총을 샀다가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서 대검만 세 자루 사놨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곳에서 우선 가등섭부터 해결하자.”

“확실히?”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였고, 곽대출이 만족한 미소를 그려냈다.

**

법무팀에서 작성한 위임장을 천상기는 지경저축은행에서 받았다.

“앉아요. 거기.”

천상기는 위임장을 들고 온 그룹 발전본부의 상무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오느라 수고했다, 차 마셔라, 한 마디쯤 해주면 오죽 좋을까.

빤히 상무를 소파에 앉게 한 천상기는 그대로 책상에서 휴대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나 천상기인데 지금 어디야?”

농성을 벌였던 지경제강 진우정을 대하는 천상기는 원래 생겨 먹은 대로 겸손한 맛이 전혀 없었다.

- 지금 막 경찰서에서 조서 받고 나왔습니다.

“경찰서에? 왜?”

- 업무방해로 고발당했습니다.

“지랄들은! 지금 만나야 하는데 서울로 좀 와. 와서 나한테 억울한 거 쭉 이야기하고 함께 그룹발전본부 들어갔다가 지경제강으로 가자.”

- 예?

놀라서 묻는 진우정의 대꾸에 천상기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말 몰라? 올라와서 그룹발전본부 들렀다가 지경제강에 가자고. 설마 겁나는 거 아니지? 그 정도 용기도 없이 굴뚝에 올라갔었어?”

- 가겠습니다.

진우정의 답에 천상기는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택시 잡아타고 지경저축은행으로 와. 요금은 내가 내줄게. 시간 줄여야 오늘 끝내.”

통화를 마친 천상기는 뾰족하고 못마땅한 눈으로 그룹발전본부의 상무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지금 가서 왜 진우정이란 사원이 올린 신문고가 동생회장에게 보고되기 전에 삭제되었는지 확인해서 이따가 내가 갔을 때 보고해.”

“예?”

느닷없는 지시에 상무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당신이 가져온 위임장이 뭔지 몰라? 동생회장님이 내게 이 건과 관련해 해임과 해고를 포함한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는 증명이야. 해보겠다는 거야?”

“아닙니다. 바로 들어가서 조사한 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상무라고 했지?”

천중명이 경영을 맡은 이후로 이렇게 거친 상황은 처음이어서 상무가 포기한 얼굴로 “예.”하고 답을 했다.

“나는 이 건만 조사해서 처벌하면 끝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미친놈처럼 칼춤 추면서 관련자들 모가지를 뎅겅뎅겅 잘라도 불편할 게 없다는 거야. 두고 봐. 내가 우리 갑수를 괴롭힌 놈들의 모가지를 그냥…….”

“갑수가 누구인지……?”

아차 했던 천상기가 고개를 홱 돌렸다가 잠시 뒤에 고약한 눈으로 상무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얼른 발전본부 가서 누가 며칠, 몇 시에 신문고를 삭제했는지 분명하게 확인해.”

“알겠습니다.”

어차피 천중명이 있었더라도 이 정도 사건이라면 그룹발전본부가 벌컥 뒤집히고 남을 일이었다. 상무는 군소리하지 않은 채 천상기의 지시를 받아 들고 돌아갔다.

**

천호득은 서재에서 이어셋을 귀에 걸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 예, 총수님. 어제 아랍에미리트 마타르 청장의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해 이집트로 이동했고, 곽대출 본부장과 함께 있다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윤만석의 보고를 들은 천호득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 지시가 단순히 자리를 비우게 돼서 내린 지시라고 보나?”

-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을 통해 둘째 아드님을 돋보이게 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흐음.”

윤만석의 의견을 들은 천호득은 몹시 궁금하고 답답한 얼굴이었다.

- 총수님께서도 신임회장이 둘째 아드님을 그룹의 중심으로 옮긴다고 보십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수 없는 일인데 어쩐지 그래 보여. 전에 나더러 어디 멀리 가느냐고 달려든 적이 있거든. 지금 내 심정이 꼭 그러네. 회장에게 그렇게 묻고 싶거든.”

같은 생각이란 의미처럼 윤만석은 대꾸가 없었다.

“나중에 통화해.”

- 예, 총수님.

통화를 마친 천호득은 이어셋을 책상에 올려놓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모질게 사람 만들었던 것이 이러려고 그랬던 게야?

내가 아파하는 걸 알아서 그룹 회장 자리를 둘째에게 넘겨주려고?

평창동을 들어서는 입구를 바라보던 천호득이 왈칵 올라온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저곳을 통해 천중명이 들어설 때마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강승애가 패악을 부릴 때, 천상기가 들이닥쳤을 때, 출장을 떠나기 전날에, 천중명은 늘 저기를 통해 들어와서 천호득을 챙겼다.

이 사람아, 나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냐.

이제 둘째고 자네고 잃고 싶지 않다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얼른 돌아와서 비자금 조성했던 거 화내고, 그 뒤에 어깨도 주물러주고 떡국도 먹으러 가고 해.

“후-. 후우-.”

몇 번이나 길게 숨을 뱉어 호흡을 고른 천호득이 독한 눈빛을 억지로 찾았다.

이대로 있으면 회장의 결정을 반기는 꼴이 된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게다.

“밖에 있지?”

“예, 총수님.”

문을 향해 고함을 버럭 지르자 곧바로 장만섭의 답이 있었다.

“본사에 들를 테니까 준비해.”

“예에, 총수님.”

천호득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

호텔 앞에 나가 출발 준비를 마친 곽대출이 다시 올라왔다.

“준비 끝났습니다, 회장님.”

노트북을 통해 주요한 결재서류를 살핀 천중명은 진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소 분명하게 확인했지?”

“운전기사가 알고 있답니다.”

곽대출이 정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긴 한 모양인가?

나가면 바로 확인될 일이어서 천중명은 잠자코 객실 문을 향해 걸었다. 여벌의 옷과 대검, 잡다한 소지품을 넣은 넉넉한 가방도 챙겼는데 그건 곽대출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른 다음이었다.

“막심이라고 회장님의 지시대로 우리 주재원이 모르던 안내원 겸 기사입니다.”

곽대출이 나직하게 운전기사에 관해 설명했고, 이어서 지경의 주재원이 고용한 기사에게 주는 공식 일당 5만 원을 지급한다는 말도 전했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엘리베이터 버튼 앞에 서 있는 곽대출의 뒤통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던 천중명은 호텔을 나선 뒤에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막심! 마이 보스!”

“헬로우, 빅 보스! 나는 막심입니다.”

곽대출이 급하게 가르친 것이 분명한 우리말로 막심이 자신을 소개했고, 천중명이 내민 손을 제법 공손한 태도로 맞잡았다. 척 보기에도 5만 원의 일당에 행복이 넘쳐흐르는 길가의 기사였다.

막심에 비해 지프의 상태가 워낙 좋아서 천중명은 궁금한 눈으로 곽대출을 보았다.

“지프는 주재원이 구해주었습니다.”

더 말해서 무얼 하겠나.

“가자.”

“예, 회장님.”

천중명이 뒤편으로 들어가 앉자, 곽대출이 “막심, 고우!”라고 외치며 조수석에 앉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아랍에미리트의 마타르가 건네준 주소였다. 곽대출의 지시를 받은 막심이 바로 지프를 몰아 호텔을 빠져나갔다.

큰 도로를 벗어난 그는 좁고 혼잡한 도로를 15분쯤 달린 뒤에 회백색 건물들이 촘촘하게 서 있는 골목에 차를 세웠다.

“히어, 보스!”

막심이 바로 앞의 2층 건물을 올려다본 직후였다.

건물에서 허름한 이슬람 복장의 남자가 나와서 천중명이 들고나왔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가방을 조수석 창문으로 밀어 넣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곽대출이 가방을 받기 무섭게 남자는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쩔걱. 털썩.

천중명의 옆으로 가방을 넘긴 곽대출이 “고우! 고우!”라고 외쳤고, 지프가 곧바로 출발했다.

AK 소총 두 자루, 탄창, 글록 권총 두 자루, 역시 탄창이 든 가방을 돌아본 곽대출이 안심된다는 표정으로 천중명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두 시간은 달려야 합니다!”

“출발해!”

오늘은 특별한 일이 생기기 어렵다.

저들이 천중명을 확인하고 내일 동선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일은 남의 식탁에 허락 없이 젓가락을 올린 벌을 받아야지?

그렇지? 가등섭?

흙먼지로 창이 뿌옇게 변한 지프의 뒤에서 천중명은 픽 웃었다.

**

굳이 속보라는 타이틀을 달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도방송은 패널들과 나누던 대화를 뚝 자르고는 지경그룹의 본사 앞을 보여주었다.

[이조한 기자? 지경그룹과 관련한 소식이 있다고요?]

[지경그룹 본사에 나와 있는 이조한 입니다. 천호득 명예회장이 본사에 도착해 그룹발전본부로 향했습니다.]

화면에는 독한 표정으로 장만섭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의 모습이 나왔다.

[신임회장이 해외 출장을 간 상황에서 명예회장이 본사에 나타났습니다. 이 기자, 이게 어떤 의미인가요?]

[네. 천호득 명예회장의 오늘 행보는 크게 두 가지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본사 앞에서 마이크를 앞에 든 기자가 빠르게 말을 전했다.

[천상기 회장에게 일 처리를 맡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거나, 아니면 공식적인 행보를 통해 이번 지시에 힘을 실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군요.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 계열사에 주는 메시지가 굉장히 강렬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후자라면 신임회장의 지시를 엄하게 받아들이라는 압력으로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이는 또한, 천호득 명예회장까지 움직일 정도로 천중명 신임회장의 그룹 장악력이 완벽하게 정착되었다는 증명이 되겠습니다.]

기자의 보도를 접한 앵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상기 회장의 움직임은 어떤가요?]

[예. 천상기 지경저축은행 회장은 조금 전에 농성을 벌였던 진우정 사원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현재 이곳 본사를 향해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이 기자.]

앵커는 지금의 보도로 인해 중단되었던 대화를 잇기 위해 패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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