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255. 나 고소공포증 있어! (2)
자정이 다 된 시간에도 천호득은 TV를 켜놓은 채 서재에 있었다. 꽤 많은 자료 화면을 포함한 트럭 랠리 소식, 아랍에미리트에 천중명과 유진교가 도착한 이후에 바로 공사가 재개되었다는 보도를 흐뭇하게 본 그는 잠자리에 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람 일이란 것이 어디 사소한 것 하나 뜻대로 되는 것이 있던가. 이어서 나온 지경제강의 농성 소식에 잠이 깔끔하게 달아나고 말았다.
가뜩이나 대송그룹의 노조가 천중명의 방침에 반기를 들면 어쩌나 싶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쪽은 잠잠한데 지경의 계열사인 지경제강에서 농성이 벌어졌다.
[올해 서른세 살인 진우정 씨는 계속해서 천중명 회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높이 27미터의 굴뚝에 매달려 있습니다. 건물의 높이를 계산하면 37미터의 높이입니다.]
어둠을 배경으로 굴뚝에 매달려 있는 진우정은 실제로도 위험해 보였다.
천중명이 국내에 있었다면 달려갈까 봐 걱정했을 일인데, 외국에 있는 지금은 저러다 사고라도 덜컥 나서 책임이 몰려들까 걱정되었다.
[임원과 가족들이 설득하고 있습니다만, 지경신문고에 호소한 뒤로 폭행까지 당했다며 천중명 지경그룹 회장이 직접 오기 전에는 절대 내려갈 수 없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쯧!”
천호득은 눈가를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이번 일이 어떻게 해결되든, 앞으로 갑갑한 일이 생길 때마다 저렇게 회장에게 직접 달려들 게다.
그걸 감당할 일에 대한 염려가 앞섰고, 이어서 저 직원 하나를 설득 못 해서 일을 크게 만든 지경제강의 회장과 임원, 담당 부서장을 어떻게 벌해줄까 싶어 천호득은 눈매를 고약하게 떴다.
[현재 천중명 지경그룹 회장은 아랍에미리트로 출장을 가 있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농성이 길어지는 것은 아닌지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카메라가 망원렌즈를 당겨서 진우정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냈다.
[허리에 찬 작업용 벨트를 굴뚝의 볼록 나온 손잡이에 걸어놓고는 있지만, 밤을 저렇게 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기자는 말끝에 천중명이 그동안 직원들을 위해 했던 여러 가지 일화들을 소개했다.
“크흠.”
천호득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실 때였다.
화면이 거칠게 움직였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랍에미리트로 출장 간 천중명 회장을 대신해서 천상기 지경저축은행 회장이 도착했습니다!]
기자의 흥분한 음성과 승용차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천호득은 상체를 급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천중명 지경그룹 회장의 형인 천상기 회장이 지경제강의 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화면에서 천상기를 확인한 천호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천상기는 확실히 천중명과 성품이나 성격이 좀 달랐다.
섬에 갇혀 꺾이긴 했지만, 몸에 배었던 모든 것이 다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당신들은 뭘 어떻게 했던 거야!”
지경저축은행의 회장으로 복귀한 천상기에게 누구도 함부로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 자리에 앉혀준 사람이 회장단과 임원을 단숨에 갈아치울 정도로 단호한 천중명 회장인 데다, 사건을 은폐하려다 벌어진 일이라서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에이, 씨!”
까마득한 굴뚝을 올려다본 천상기가 거친 말을 뱉었다.
“진짜 고소공포증 있는데!”
“저기를 올라가실 생각입니까?”
“그럼 어떻게 해! 동생 회장이 전화해서 나더러 올라가라는데! 내가 떨어져 죽으면 귀신이 돼서 당신들 자려고 누울 때마다 발바닥 간지럽힐 거니까 그렇게 알아! 잘 때마다 간지러울 거다!”
오랜만에 눌러두었던 성격을 팍팍 내뿜은 천상기가 위를 쳐다보고는 다시 “에이, 씨!”를 반복했다.
경찰과 구조대원, 임원들이 몇 차례 의논한 뒤에 직원 한 명이 허리와 사타구니를 연결한 벨트를 가져왔다. 굴뚝의 손잡이에 거는 고리가 달려있었다.
“아니 왜!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도 많은데 하필 여기야!”
연달아 불평을 토해내면서도 천상기는 꾸역꾸역 벨트를 몸에 걸었다. 강갑수라면 어떨 것 같냐는 천중명의 말이 계속 뇌리에 맴돌아서였다.
“아버지! 동생 회장이 전화해서 올라가라고 시켰습니다!”
고자질처럼 버럭 지른 고함이 TV를 타고 전국에 방송되었다는 사실을 천상기는 몰랐다. 올라가야 하는 굴뚝의 높이가 그는 그 정도로 두렵고 무서웠다.
“아, 진짜!”
첫 번째 손잡이를 붙들고 발을 올린 천상기가 지른 비명 같은 짜증이었다.
“갑수야! 나 이렇게 열심히 살아!”
그는 마치 주문을 외우듯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 고함은 TV를 시청하는 많은 사람들과 지경그룹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네가 저기 있다고 생각하고 올라가는 거야!”
오른발을 올리고 한 칸, 다시 또 손을 올려잡고 한 칸, 천상기는 정말이지 정직하고 바람직한 동작으로 계단을 올랐고, 정확하게 세 칸을 오른 뒤에 고리를 위에 걸었다.
시간이 참 오래 걸리는 꼼꼼함이 돋보였는데 천상기의 고함과 그 동작이 또 묘하게 어울렸다.
“없다고 기죽지 마! 돈 좀 있어 봐야 사람 안 되면 어떤 모습인지 몰라서 그래!”
이게 정말 뭐라는 걸까?
기자들은 아예 보도조차 잊은 채 어둠을 향해 악을 바락바락 써대는 천상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 회장이 말했어! 갑수 네가 저기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달캉. 달캉, 달캉, 철컹.
세 칸을 올라간 천상기가 벌벌 떨면서 고리를 머리 위의 손잡이에 걸었다.
휘이이이익-!
바람은 또 왜 이렇게 부는지 그의 머리칼과 셔츠가 거칠게 흩날렸다.
“나 이렇게 열심히 산다!”
굴뚝을 껴안듯 몸을 바싹 붙이고도 천상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꼭 보자! 나 약속한 대로 산다고!”
거칠게 달려온 바람이 벌벌 떨고 있는 천상기를 휘감은 뒤에 어둠을 향해 세차게 달려갔다.
**
근무를 교대한 대원이 특별한 일이 없나를 뒤지다가 우연히 찾았다. 그렇게 달려와 스마트 폰을 가로로 들고 보여주는 대원 옆에서 강갑수는 굳은 표정으로 화면에 집중했다.
[갑수야! 나 이렇게 열심히 살아!]
고함이 고스란히 스마트 폰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나왔을 때,
“이 양반이 이렇게 마음잡을 줄 알았으면 그때 조금 더 잘해줄 걸 그랬네.”
함께 보고 있던 다른 대원의 혼잣말이 나왔다.
솔직히 모양새는 더럽게 웃겼다.
대원들이라면 벌써 꼭대기에 닿고 남았을 거리를 벌벌 떨며 올라가는 천상기의 모습은 그랬다.
[나 이렇게 열심히 산다!]
저렇게 고함을 꽥꽥 지르는 이유를 대원들은 모두 안다. 한계를 느낄 때 저렇게 토해내는 고함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보고 있어, 형! 고마워, 형!’
강갑수가 붉어진 눈을 수습하려 깜빡이지도 못한 채 스마트 폰을 들여다볼 때였다.
[우리 꼭 보자! 나 약속한 대로 산다고!]
천상기의 음성이 또다시 울렸다.
코를 훌쩍이는 강갑수를 누구도 비웃거나 탓하지 않았다.
거친 바람을 이기며 고함을 지르는 천상기와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삼키는 강갑수를 누구도 우습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휘이이이이-잉!
거칠게 휘날리는 바람에 고리를 걸기 위해 위로 뻗은 천상기의 손이 덜덜 떨렸다.
“내려가세요!”
여섯 칸 위에서 진우정이 고함을 지른 직후였다.
철컹.
고리를 겨우 건 천상기가 독하게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야, 이 나쁜 인간아! 나 고소공포증 있다고! 여기까지 오는데 죽는 줄 알았어!”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쩍쩍 갈라진 천상기의 고함이 또다시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내려가시라고요!”
“당신이 동생 회장 만나야 내려온다고 했다며! 동생 회장이 전화했더라고! 전화기도 없이 올라갔는데! 임원이 가봐야 안 될 테니까 내가 직접 올라가서 철저한 조사를 약속하라고!”
휘이이이이-잉!
“에이, 씨발!”
바람에 휘청했던 천상기의 욕설이 그나마 좀 작았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된 거 아냐! 아니면 동생 회장하고 통화해 볼래! 그걸 원해!”
천상기는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진우정을 노려보았다.
“나, 손에 힘이 빠져! 그러니까 얼른 내려가자, 좀!”
망설이는 진우정을 향해 천상기가 곧바로 고함을 버럭 질렀다.
“당신도 주먹 있으니까 사람 때릴 수 있었을 텐데 굴뚝에 올라간 거! 억울하니까! 이렇게라도 해서 더는 피해자가 없었으면 해서 그런 거라면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동생 회장이 그러더라! 나한테!”
진우정은 그때 손잡이를 붙든 천상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내려갈게요!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얼른 내려가세요!”
겁이 나서 지른 고함이었다. 저러다 천상기가 힘이 완전히 빠지면 고리에 매달리기야 하겠다만, 정말 위태로울 수 있었다.
“야! 나 아래로는 못 내려가겠어!”
그런데 뜻밖의 답이 들렸다.
“올라오는 건 어떻게든 했는데 발아래를 내려다볼 생각을 하니까 몸이 안 움직여! 힘도 없고!”
“거기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안 움직인다니까!”
아래에서 듣는 사람들을 단숨에 멍하게 만든 고함이 오간 뒤에 상황은 더 어처구니없이 변했다. 구하러 올라간 천상기를 위해 진우정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다리차 올려! 서둘러!”
그리고 몸을 바싹 붙인 천상기의 옆으로 움직인 진우정이 그를 꼭 끌어안은 채 아래로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댔다.
“사다리차! 뭐해!”
누가 누구를 구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다리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사다리차가 와요! 저걸 타려고 해도 조금은 내려가야 돼요. 내가 고리를 아래로 걸어줄 테니까 발을 천천히 내리세요!”
진우정이 천상기를 다독이며 내려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15분쯤 지나서 구조대원과 진우정이 천상기를 품다시피 움직여서 사다리차로 옮겼다. 그리고 그것으로 농성은 끝났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아래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박수를 보낼 때 사다리차의 네모 칸 안에 털썩 주저앉은 천상기가 진우정을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억울해서 그런 거라면서? 됐어!”
천상기는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지친 얼굴이었다.
**
천호득은 휠체어에 기댄 자세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천중명이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사람을 기절시키더니 이번엔 돌아온 천상기가 까마득한 굴뚝을 타고 올라가서 사람 피를 말린다.
“흐.헤.헤.헤.”
힘이 완전히 빠져서 천호득의 웃음은 슬프게 들렸다.
천중명의 부탁을 저렇게 들어주는 천상기를 생각이나 해 보았나. 아무리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서운함이야 남아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 말이다.
천상기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왜 이런 순간에 천중명의 당찬 얼굴이 떠오르며 목이 메는 건지, 천호득은 울음처럼 들리는 특유의 웃음을 다시 지었다.
**
천상기가 바닥에 내려서는 장면에서 대원들은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나는 저 양반, 네 형으로 인정한다. 앞으로 혹시 보게 된다면 그렇게 대할 거다.”
누군가 말을 건넸고,
“나도 인정한다.”
그 옆에서 다른 대원이 같은 소감을 토해냈다.
“저러기 진짜 쉽지 않을 텐데 너한테 어지간히 고마웠던 모양이지?”
“아까 들었잖아? 나도 가슴이 찌르르하던데 뭐!”
바닥에 내려서면서 기자들이 떠들어댈 때 스마트 폰을 들고 있던 대원이 동영상을 중단했다.
“세상 참 좋아졌다. 여기에서 한국의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어?”
“그만 자자. 우리는 또 우리 할 일에 충실해야지.”
감정을 털어낸 대원들이 간이침대에 몸을 눕히면서 언제 TV를 보았던가 싶을 정도로 차 안이 고요하게 변했다.
어느 순간에도 잘 수 있도록 훈련했던 강갑수는 참 오랜만에 뜻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벌써 나직하게 코를 고는 대원도 있었다.
‘약속 지켜줘서 진짜 고맙다, 형.’
마음이 그나마 홀가분해진 강갑수는 그제야 잠을 청했다.
바깥에서 스태프들이 움직이는 소리, 어른대는 불빛 따위는 대원들의 잠을 방해하지 못했다.
쏴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부는 바람이 섬에서 울리던 파도 소리처럼 차창을 쓸고 갈 때, 누군가 부르는 ‘어부의 노래’ 한 구절처럼 나직하게 고는 콧소리가 차 안을 맴돌았다.
꿈에 천상기를 만났는지 히죽 웃는 강갑수의 잠꼬대가 아련한 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