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254. 나 고소공포증 있어! (1)
소파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가 시선을 들었다.
“천중명 회장에게 직접 서류를 전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들어선 카리프 부청장에게 그는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천중명 회장에게 적극 협조하길 바란다는 연락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에 전해.”
“예, 청장님.”
“블루크루드를 생산하기 위한 법인 설립은 네가 진행하고, 협상이 중단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은 내가 천 회장과 직접 만나는 것으로 하겠다.”
“알겠습니다.”
무언가를 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카리프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국은 뇌관이 세 개나 있지. 하나는 북한, 다른 하나는 가계부채, 마지막은 부동산.”
그의 질문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마타르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3년 연속 가계부채 증가율 10퍼센트 이상으로 세계 2위, GDP 대비 가계부채율 90퍼센트, 그 상황에서 중산층 대부분의 부채가 부동산에 몰려 있지.”
카리프의 얼굴을 본 마타르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동산 가격을 단숨에 내리자니 중산층이 몰락하는 데다, 외국 자본의 부동산 매입이 두렵고, 지금처럼 버티면 가계부채가 계속 증가하지.”
상황을 설명하듯 늘어놓은 마타르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무리해서 집을 산 사람들이 돈을 번 꼴이니까 그 기회를 놓친 이들이 대출을 받아서라도 부동산을 매입하겠다고 달려들거든. 너의 탐욕이 경제를 망쳤다고 끝없이 서로를 겨누다니, 재미있지.”
“천 회장과 그런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결국, 참지 못한 것처럼 카리프가 질문을 꺼냈다.
“그도 알고 있더군. 나름 대비도 하고 있고. 그런 위기가 온다면 천 회장은 아마 수십 조의 개인 재산을 만들 위치에 있어. 세계 50대 갑부 안에 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런데도 그에게 도움을 주실 생각이십니까?”
“이미 답을 했다.”
카리프의 시선 앞에서 천중명을 떠올렸는지 마타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공사를 포기하겠다고 일어섰을 때, 리베이트를 성과금으로 정식 회계에 올린다고 했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초대한 저녁 식사를 부하 직원이 먼저라며 거절했을 때.”
“거만한 성품이거나, 교만한 사람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으로 그를 대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워.”
답을 건넨 마타르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와 사우디아라비아도 안심할 상황은 아니잖나. 왕족들은 돈이 넘쳐나는데 나라에 돈이 부족해서 공사가 중단될 위기이니.”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들의 다음 목표가 어디일 것 같나? 그러니 천 회장이 우리의 앞에서 먼저 싸우게 한다. 실패하면 지경을 쥐어짜서 받아내고, 승리하면 수익을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올 위험을 해소한 게 되니까.”
이제야 마타르의 생각을 이해한 것처럼 카리프가 안도의 빛을 얼굴에 담았다.
“본인의 이득보다 직원의 행복이 먼저라는 기업인이라니. 국민을 위한 기업을 만들겠다는 경영인? 그 말을 할 때의 눈빛이 가식이라면 참으로 무서운 인물이고, 그것이 진심이라면 그것대로 굉장한 인물인데.”
“어떻게 보셨습니까?”
카리프의 질문에 마타르는 “흥!”하는 묘한 웃음을 먼저 터트렸다.
“눈앞의 이익에 혈안이 된 왕족들을 모두 그에게 보내 교육시키고 싶은 심정이다.”
카리프가 힐끔 문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지금 마타르의 발언은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위험한 상황에 빠트릴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수준이었다.
“그 나이에, 그 위치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내가 졌어. 깨끗하게.”
혼잣말을 쏟아내던 마타르가 생각난 것처럼 시선을 들었다.
“이제 가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에 협조를 구해.”
“예, 청장님.”
그의 지시를 받은 카리프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왕족 회의는 예정대로 진행한다. 오늘 다른 짓을 하는 왕가의 인물이 있는지 철저히 살펴.”
문으로 향하는 카리프에게 마타르가 냉정한 지시를 건넸다.
**
객실에서 저녁을 주문한 다음이었다.
마타르가 보내준 자료를 살핀 천중명의 눈빛이 확실하게 변했다. 함께 테이블에 앉았던 유진교가 혹시 자리를 비켜야 하나 싶었을 때 천중명은 자료의 앞부분을 내밀었다.
“트럭 랠리의 일정표인데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대략 2천8백 킬로미터 정도가 되네요. 거길 지나서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를 거쳐 가는 경로고요. 여기가 곽대출 본부장이 있는 곳입니다.”
천중명은 마타르가 보내준 지도 두 장 중에서 넓은 표지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 부근에서 위험한 곳이 있을지를 살피다가 랠리 팀에 합류하기로 했거든요. 그렇게 혼자 있는 곽대출 본부장을 저쪽에서 노린다는 정보입니다.”
지도에서 시선을 든 천중명은 마음을 굳힌 얼굴이었다.
“마타르 청장이 자가용 비행기까지 준비해 두었으니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본부장님은 호텔에서 국내와 이곳 공사 재개 상황을 살펴주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경호원을 부탁하는 것은 어떨지도 고민하시는 게…….”
“설마하니 누가 죽고 죽이는 싸움이야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경호원을 요청했다가 공연히 시끄럽게 일을 만드느니 현지에서 곽 본부장을 만나 의논하겠습니다.”
답을 듣고 나자 오히려 유진교의 얼굴에 더욱 진한 걱정과 근심이 피어났다.
“지사에 연락해두겠습니다.”
“그럼 나는 곽대출 본부장에게 전화해 두어야겠네요.”
둘이서 휴대 전화기를 들었을 때였다.
우우웅.
유진교의 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천중명의 앞에서 내용을 확인한 유진교가 난처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지경제강의 직원 한 명이 굴뚝에 올라가서 농성을 시작했다는 보고입니다. 노조와의 갈등으로 따돌림을 당한 데다 폭력까지 있었다며 회장님과의 면담을 요구한다는 내용입니다. 보도는 이미 나간 상황입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지금이 꽤 늦었을 텐데요?”
“몇 시간을 설득하다가 실패하면서 언론에 보도된 모양입니다.”
왼쪽 눈썹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천중명을 향해 유진교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모든 일에 회장님이 나서실 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이 사례가 되면 누구든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마다 굴뚝에 매달립니다. 직원의 숫자가 19만 명을 넘어선다는 것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런 뒤에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내놓았다.
안다, 저 심정이야. 그룹발전본부장이라면 당연히 내놓아야 할 염려와 조언이기도 했다.
“본부장님. 따돌림과 폭행이 있었는데 그 사실이 왜 내게 안 올라왔을까요? 그 직원이 저렇게라도 날 만나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과정을 세밀하게 조사해서 관련자들을 반드시 처벌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억울함을 호소하는 직원이 굴뚝 위에, 한국의 늦은 시간에 홀로 있습니다. 조사하겠다고 그저 말뿐인 약속을 다른 사람이 전하면 그 직원이 내려올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나와 임원들마저 또 따돌린 꼴이니까요.”
한숨을 길게 내쉰 천중명은 결심한 얼굴로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처음이든, 두 번이든, 열 번이든 손을 잡아줘야 합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엄한 조사가 이뤄지고, 무서운 처벌이 따른다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런 시스템이 정착되면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천중명은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바닷가에서 먹은 라면이 생각나서 천상기는 해물을 종류별로 사 왔고, 심지어 문어도 적당한 놈으로다가 한 마리 담았다.
커다란 냄비에 닥치는 대로 넣고 팔팔 끓인 뒤에 그대로 들어다가 김치와 먹었는데 희한하게 그때의 맛이 나지는 않았다.
“역시 라면은 굴을 까고 난 뒤에 먹어야 제맛이 나네.”
엉뚱한 감상을 터트린 그는 국물과 해물을 억지로 퍼먹어 잔뜩 부푼 배를 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 배부르지요, 몸 편하지요, 거실 쾌적하지요, 까무룩 달려드는 잠에 고개를 한껏 젖힌 자세로 천상기가 입을 삐쭉일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의 휴대 전화기가 심하게 몸을 떨어댔다.
화들짝, 깨어난 천상기는 입가를 쓱 문지른 뒤에 번호를 확인했다.
“어? 뭐야? 여보세요?”
그가 급하게 전화를 받은 뒤였다.
- 나야. 부탁이 있어.
천중명의 음성이 반 템포쯤 느리게 건너왔다.
- 지경제강의 굴뚝에 직원 한 명이 올라가서 억울함을 호소한다는데 거기에 가 줄 수 있어?
“어디?”
- 보도에 나왔다던데? 지경제강 굴뚝에 올라가 있는 직원을 설득해 내려와 줄 수 있겠냐고? 나를 보자고 버티는 거라 다른 사람이 가서는 설득하기 힘들 것 같아서.
천상기는 고개를 빠르게 털었다.
- 가서 책임지고 날 만나게 하겠다는 것과 철저하게 조사하겠다고 약속하고 데리고 내려와.
“그냥 전화로 해!”
- 전화기를 안 들고 올라갔다잖아! 그리고 이럴 때 외면하면 앞으로 중간에서 보고를 숨기려는 일이 자꾸 벌어져.
“나 고소공포증 있어! 베란다에서 아래도 못 내려다보잖아!”
천상기는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캄캄해진 베란다의 창을 가리켜가며 가고 싶지 않은 심정을 전화기 너머로 건넸다.
- 그곳에 올라간 사람이 섬에서 이마를 마주 댔던 대원이었어도 그런 소리 할 수 있어?
그러나 곧바로 건너온 천중명의 질문에 천상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 그 직원도 주먹 있으니 사람 때릴 수 있었겠지. 그런데 왜 굴뚝에 올라갔을 것 같아? 억울하니까, 이렇게라도 알려서 더는 피해자가 없었으면 했을 테니까 그랬을 것 아냐.
볼을 씰룩이던 천상기는 이번에도 답을 하지 못했다.
‘상기 형. 내가 한 번은 꼭 찾아갈게. 정말 잘 살아주라. 나 이제 아무도 없는데 그냥 형 생겼다고 생각할게. 부탁이다, 형. 정말 잘 살아.’
강갑수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목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 놔둬. 내가 다른 직원 시켜서 전화기 들고 올라가라고 할 테니까.
“갈게. 지금 가. 가서 말한 대로 할게.”
어쩐지 정말 강갑수가 굴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서 천상기는 마음이 급했다.
- 부탁해.
“끊어.”
재킷과 지갑, 자동차 열쇠, 휴대 전화기를 주섬주섬 챙긴 천상기가 급하게 뛰어나갔다.
“운동화! 바보야! 굴뚝에 올라가야 한다잖아!”
낮에 신었던 구두를 꺼냈던 천상기는 천호득과 여행에서 신었던 운동화를 꺼냈다.
**
휴대 전화기를 내린 천중명은 미안한 얼굴로 유진교를 보았다. 호텔 바깥 어디선가 앰프를 타고 나온 코란 읽는 소리가 희미하게 객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운하시더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분명 부작용이 있을 겁니다.”
“알죠. 그렇지만 우리 직원들이 바보는 아닙니다. 부작용이 많이 일어나면 이제 그만해라, 시스템을 이용해라, 이런 의견이 나오리라 믿습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때까지 우리는 시스템을 반드시 정착시킬 거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유진교가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웃었다.
“회장님이 방향을 가리키셨으니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다만, 부작용이 보인다면 그때는 제 의견도 반영해 주십시오.”
“제가 제일 조마조마한 게 뭔지 아세요?”
궁금한 시선을 한 유진교를 향해 천중명이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이 없는 지경그룹을 떠올리는 일입니다.”
정말 별거 없는 말이었다. 그냥 농담처럼 건네준 말일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냉정하디 냉정한 유진교는 그 한마디에 울컥하고 말았다.
“이런 말에 감동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좀 더 자주 사용해 드렸을 텐데요.”
“눈에 먼지가 들어간 모양입니다.”
천중명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고 난 다음이었다.
딩동댕동.
주문했던 저녁이 도착했는지 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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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도가 핸들을 꺾으며 베이스 기지에 지정된 장소를 향해 트럭의 머리를 틀었다.
크르르릉! 끼이이익!
그리고 유도하는 직원의 손짓에 따라 정확한 지역에 차를 세웠다.
“굿 잡!”
추일원이 어젯밤에 주워들은 영어를 던지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아론도가 팔을 뻗어 어깨를 툭 쳐주고 차에서 내렸다.
스태프들이 타이어부터 하부를 점검하기 위해 분주한 가운데 조수석 문을 통해 내린 추일원을 신상훈이 맞았다.
“고생했습니다.”
“오늘도 좋은 구경 많이 했습니다.”
“얼른 쉬세요.”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준비된 차량으로 이동하던 추일원이 고개를 돌렸다.
트럭과 탱크로리 사이에 서 있던 대원과 눈이 마주쳤고,
‘수고해.’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쉬세요.’
그 직후에 둘이서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기록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도로에서 앞을 가로막는 느낌으로 속도를 늦춘 트럭이 있었는데 아론도가 항의하지 않아서 추일원은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렇더라도 이상하게 안 보이는데?
숙소로 사용하는 차량 앞에서 주변을 다시 한 번 더 살핀 뒤에 추일원은 안으로 들어갔다.
고단하고 긴장됐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