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53화 (253/315)

# 253

253. 양손을 보여드리지요 (2)

정희배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내려간 다음이었다.

팔을 뻗어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한 마타르를 따라 천중명, 유진교는 통역과 함께 다시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크림을 담뿍 넣은 차가 새롭게 나왔는데 앞에 있는 두 잔 모두 천중명은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차를 드셔 보십시오.”

마타르가 아까와는 다른 표정과 손짓으로 차를 권했다.

“고맙습니다.”

천중명이 잔을 들자 유진교가 보조를 맞추는 느낌으로 크림색이 진한 차를 마셨다.

“공사를 중단하는 방법으로 만나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경그룹이나 회장님을 무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유진교의 시선 앞에서 천중명은 가벼운 웃음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이해한다는 의미와 이제는 할 말을 꺼내놓으라는 뜻이 그 웃음에 확실하게 담겨 있었다.

“괜찮으시면 우리 측 통역을 이용해 회장님과 조용하게 의논하고 싶습니다.”

“청장의 제안대로 우리 측 통역은 보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재 시에 유일하게 일을 대신할 분이 여기 본부장입니다. 그러니 본부장은 자리에 남는 게 좋겠습니다.”

힐끔 유진교를 살핀 마타르가 고개를 돌려 카리프 부청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중명의 뒤에 있는 통역에게 눈짓을 했고, 대기하고 있던 한 명의 수행원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그 사이 마타르의 뒤에 있던 통역이 가운데로 자리를 옮기며 집무실에는 네 사람만 남았다.

“청장님.”

자리가 정리되고 나자 천중명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완벽한 한 편이 될 수 있고, 영원한 앙숙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어떤 쪽으로 결정되든 나는 청장님과 개인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통역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마타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하는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면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감정이 남지 않습니다.”

양손을 팔걸이에 올린 천중명은 깍지를 낀 자세로 마타르를 바라보았다. 그레이 계열의 슈트, 파란색 타이가 천중명의 냉정함과 차분함을 잘 받쳐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맡은 지경은 리베이트를 원하지 않습니다. 기존에 약정돼 있던 10퍼센트의 리베이트는 성과금으로 회계에 반영하겠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청장께서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통역의 말을 들은 마타르가 만난 이후 처음으로 감정이 담긴 미소를 보였다.

이 사람은 뭐지?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데?

그의 미소에 담긴 감정은 그런 느낌이었다.

“블루크루드의 양산화 계획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질문을 들은 천중명은 시선을 돌려 유진교를 보았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랠리에 사용하는 블루크루드는 리터당 생산단가가 한화로 6천 원 이상입니다. 리터당 생산단가 5백 원 수준으로 양산화되려면 대략 2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개발이 산유국을 자극하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천중명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가진 부를 이용해 새로운 세대를 준비할 것인지, 아니면 막아보려 애쓸 것인지만 결정하면 됩니다.”

“우리가 지경에 지분참여를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까?”

“함께 공동의 적을 상대한다면 더 끈끈한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천중명의 말이 떨어진 다음이었다.

움찔했던 마타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냈다.

“듣던 것 이상이군요. 그렇지만, 지경은 아직 적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가벼운 웃음을 먼저 보였다.

“돈이 움직이는 일이니 청장께도 제안이 왔을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택하시면 됩니다. 미래를 함께할 친구냐, 당장 주머니를 불려주겠다는 적과 손을 잡을 것이냐.”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천 회장님.”

“그 길지 않은 인생의 목적이 돈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외롭고 힘들 때 돈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천중명의 답을 전해 들은 다음이었다.

“흐하하하하!”

마타르가 커다랗게 웃음을 토해냈다.

“양손을 보인다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드려야겠군요. 괜찮다면 천 회장께 어울리는 새로운 여자를 한 명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그런 뒤에 그는 천중명의 고개가 절로 저어지는 농담을 내놓았다.

“부인이라면 저는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제안은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천 회장의 소중한 사람과 관련된 일입니다.”

유진교가 슬쩍 바라보는 옆에서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곽대출 본부장을 말씀하십니까?”

“역시 날카로우십니다.”

그리고 알 듯 모를 듯한 대화가 이어졌다.

**

곽대출 인생 참 드라마틱하다.

“푸!”

황야를 달리는 지프에서 입에 들어온 흙가루를 뱉어내며 곽대출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통쾌하게 지프를 모는 드라이버 막심은 흑인이었다. 두건으로 코와 입을 가려서 완벽하게 비적 떼의 느낌인 그는 더할 수 없이 신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부으으응! 덜커덩!

굴곡을 타고 넘어간 지프가 허공에 잠시 떠올랐다가 거칠게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오케이? 보스?”

이제 스물다섯이라는 막심은 얼핏 서른 중반으로 보였다. 그의 외모보다는 저 나이에 이미 아이가 넷이라는 말에 곽대출은 좀 놀랐다.

끼이익!

거칠게 달리던 지프가 작은 둔덕에 올라서서 멈췄다.

그 직후에 뒤편에서 달려든 흙먼지가 화악 지프와 두 사람을 덮쳤는데 막심은 또 그것마저 만족한 눈치였다. 하긴 하루 일당이 우리 돈 1만 원이 안 되는 막심을 5만 원에 고용했으니 흙먼지가 그에게는 돈 가루로 보일만도 하겠다.

“히어! 보스!”

막심은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에 달아놓은 내비게이션을 검은 피부의 검지로 가리켰고, 다시 지프의 약간 왼편을 향해 연달아 손을 뻗었다.

이 길로 두 시간을 달리면 사막에 들어서는 첫 번째 베이스 기지가 나온다. 트럭들이 도착할 때까지 일주일의 여유가 있었는데 곽대출은 지역을 직접 돌아보며 가등섭이 문제를 일으킬 구간을 살피고 있었다.

지프에서 내린 곽대출이 지도를 보닛에 올려놓자 막심이 다가와 함께 들여다보았다. 키가 190에 가까워서 기린처럼 머리를 곽대출의 어깨 위로 훌쩍 넘긴 모양새였다.

“물 좀 줘! 물! 워터!”

“오! 워터!”

큰 키로 후적후적 걸어간 막심이 뒷좌석에서 물병을 꺼내왔다. 물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곽대출의 뒤에 딱 붙었을 때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견디기 어려워서 부탁했던 심부름이었다.

“히어! 워터!”

곽대출은 너는 왜 안 마시냐는 투의 턱짓으로 막심을 가리켰다.

“막심, 괜찮아요-오.”

지랄, 말 한마디 가르쳐 준 걸 종일 써먹는 막심을 보며 곽대출은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한국말을 알면 우리 관광객을 안내할 수 있지 않겠냐며 졸랐던 막심은 오케이 대신 쓸 말이 뭐냐고 묻더니 그때부터 “괜찮아요-오.”를 남발했다.

물병을 입에 문 채 곽대출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뜨문뜨문 달리던 트럭 두 대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띌 염려 없이 맞붙을만한 곳이 어디일까? 베이스 기지까지 직선주로를 계산했을 때 위험한 곳은?

베이스 기지까지 다녀오려면 아무래도 서두르는 편이 좋았다.

“막심! 가자! 고우!”

“예쓰, 보스!”

태어나 처음으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한 곽대출과 이집트 출신 흑인 막심은 영어 구사 능력이 비슷해서 좋았다.

지경의 주재원이 영어에 능통한 드라이버를 추천했는데 곽대출은 호텔 앞에서 목을 길게 빼고 앉아 슬퍼 보이도록 새하얀 눈동자를 끔벅이는 막심을 선택했다.

브르릉! 부으으응!

지프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보스 기브 미 머니! 막심 해피! 막심 와이프, 칠드런 해피, 투!”

힘껏 달리는 지프의 운전석에서 막심이 고함을 질렀다.

행복에 겨운 막심을 보며 곽대출은 트럭을 타고 달려오고 있을 대원들을 떠올렸고, 이어서 천중명을 생각했다.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의미가 지금 막심을 바라보는 곽대출의 심정으로 이해해도 되는 건가?

덜컹! 부으으응! 덜커덩!

생각이 많아진 곽대출의 옆에서 막심은 흥분한 만큼이나 거칠게 지프를 몰았다.

콰가가가각! 쿠다당! 덜컹!

“야, 이 씨!”

하마터면 옆으로 자빠질 뻔한 지프의 조수석에서 곽대출이 버럭 인상을 찌푸렸고, 그 뒤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흙먼지가 두 사람과 지프를 흥미롭게 따라붙고 있었다.

**

트럭은 유럽을 관통하듯 달렸다.

사람은 확실히 적응의 동물이어서 추일원은 무섭게 달리는 트럭의 조수석에서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산다는 게 참 별거 없다.

크아아아아-앙!

추레한 복장의 사람들과 낡은 주택들,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유럽의 한적한 도로 주변을 보며 추일원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간혹 보이는 파란 풀밭과 동화에서 나올 법한 집들을 향해 독한 눈빛을 흘렸다.

언제든 저놈들이 ‘신화’를 목표로 미친 척 달려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제법 멀리까지를 살필 여유가 생긴 추일원이 슬쩍 오른쪽 다리를 의자에 올렸다.

앞쪽의 주택 너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여기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지 않는다는 데 10만 원 건다.

그러나 방심했다가 당하느니 번거롭지만, 매번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었다.

끼기기-긱! 철컹! 크아-앙! 크아앙!

코너를 돌며 속도를 높이고서야 추일원은 다리를 내렸다.

“후.”

다행히 염려하는 일은 없었다.

**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눈 천중명과 유진교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번에도 마타르가 안내하듯 함께 걸었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아랍 직원이 보이자 그는 바로 무언가를 지시했고, 심지어 직접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친절도 보였다.

“저와 저 앞의 직원이 호텔로 직접 모시겠습니다.”

마타르 측의 통역이 천중명에게 나직하게 조금 전의 지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려준 다음이었다.

“일정이 괜찮다면 내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해 주셨던 본부장을 먼저 찾을 생각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때앵.

알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천 회장님. 내가 연락할 때까지 호텔에 계시다가 그 뒤에 출발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타르의 눈을 바라본 천중명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곽대출의 일이어서 마타르가 주겠다는 도움을 거절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부탁드리죠.”

“내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청장님.”

악수를 마친 천중명이 유진교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로비에 있던 현지 직원 두 명과 통역이 다가왔는데 마타르의 성의를 무시하기 싫어서 그들에게 호텔로 바로 오라는 지시를 전했다.

30분쯤 달려 호텔에 도착한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곧장 객실로 올라갔다.

“샤워를 할 생각인데 특별히 급한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회장님. 그 시간에 저도 안쪽에서 간단하게 씻고 나오겠습니다.”

재킷을 벗은 천중명은 편한 바지와 티셔츠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의 시원한 물줄기를 받자 10시간에 걸친 비행과 신경을 곤두세운 회의의 피곤함이 밀려났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블루크루드의 생산을 염려한 산유국의 경고였고, 그들 역시 거대자본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3천7백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역대 최고 수준인데 그것을 단숨에 먹어치우겠다는 계획을 짜는 인간들이 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정보란 참 무섭다.

곽대출이 홀로 지형을 살피는 동안, 그쪽을 먼저 노릴 거라는 것 역시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공사가 중단되었을 때 당황하던 유진교의 표정이 떠올라 천중명은 픽 웃었다.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마타르의 앞에서 표정을 관리할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푸후-.”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객실은 쾌적했다. 그리고 천중명을 향해 편안한 복장의 유진교가 물컵을 내밀었다.

“회장님. 물입니다.”

“그걸 왜 본부장님이 준비하세요?”

“마타르 청장과의 회의에 저를 참석시켜주신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그런 거라면 이거로 부족한데요?”

“커피도 준비해 왔습니다. 어떠십니까?”

“좋죠.”

지금의 유진교는 편안한 느낌의 삼촌 같았고, 표현을 좀 과하게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 편인 충직한 신하를 보는 느낌이었다.

“블루크루드 생산에 관한 협의는 본부장님이 처리하시는 것으로 하지요. 별도의 법인을 설립해서 지분을 나누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예, 회장님.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그거 믹스 커피인가요?”

“가끔 피곤할 때 마시면 괜찮습니다.”

테이블에 있는 커피포트 앞에서 유진교가 믹스 커피를 들고서 웃을 때였다.

딩동댕동.

객실의 벨이 울렸다.

“커피 준비하세요. 내가 가죠.”

문으로 다가간 천중명이 렌즈로 살핀 바깥에 지경의 현지 직원이 서 있었다.

달칵.

“회장님. 마타르 청장이 회장님께 보내드리라며 전해준 서류입니다.”

직원이 하얀색 사각봉투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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