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50화 (250/315)

# 250

250. 내가 저렇게 살았던 거구나 (1)

저녁 시간이 되면서 일이 더 많아지고, 바빠지는 느낌이었다. 박승양이 도착하기 전에 유진교가 먼저 집무실에 들어섰다. 오후 6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아랍에미리트 현지 시간이 오후 1시입니다. 우리 쪽 일정과 시차를 고려해서 내일 오후에 도착할 수 있느냐는 질의서가 도착했습니다.”

“우리 쪽 일정을 알려달라고 했다면서요?”

“답변서를 아직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서두르라는 독촉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보고서를 받은 천중명은 아예 책상에 기대서서 내용을 살폈다. 공문에 분명하게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저쪽이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요?”

“정희배 현지 총괄사장도 사흘 이상 걸릴 답변서가 한 시간 만에 온 점, 그리고 연달아 내일 오후에 도착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서가 온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라는 반응이었습니다.”

“둘 중 하나겠네요. 실제로 이렇게 급한 일이 있거나, 아니라면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야 하거나. 그것도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분명하게 심어주면서요.”

“두 가지 모두 필요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유진교의 말을 들은 천중명이 가볍게 웃었다.

“냉정한 본부장님으로 돌아오셨군요.”

졌다는 투로 옅게 웃는 유진교의 옆에서 천중명은 잠시 보고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비행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직항으로 10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다섯 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내일 오전에 출발하면 그쪽 현지의 오후 시간에 도착하게 됩니다.”

“내일 오전에 비행편을 확보해 주세요. 도착하면 먼저 정희배 총괄사장을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유진교에게 출장을 지시하려던 천중명이 지시를 잇지 못했다. 최만호가 대송자동차그룹의 회장으로 가 있는 터라 유진교까지 그룹발전본부를 비우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루나 이틀 출장일 테니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일정이 길어지면 그때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리고 이제는 기획실장을 임명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비행편이 결정되는 대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공사와 관련된 자료를 전부 준비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익도 별로 없고, 기성별 지급률도 떨어지는 공사를 수주한 이유, 공사가 중단되었을 때의 손해, 회수 가능 금액, 전부 부탁합니다.”

“예, 회장님.”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5분도 되지 않아서 박승양의 도착을 부속실 직원이 알려주었다.

“회장님.”

안으로 들어선 그를 향해 천중명은 넉넉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마친 다음이었다.

“이리 앉으세요.”

집무실을 두리번거린 박승양이 자리에 앉아서는 테이블 아래로 상체를 기울여 밑을 살폈다. 지금껏 저 자리에 여러 사람이 앉았지만, 박승양처럼 아래를 살피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냥 봤습니다. 뭐 또, 도청은 없나 싶었고.”

도청보다는 박승양의 원래 성격이 그런 것처럼 보였는데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부속실 직원들이 움직여서 물과 시원한 음료, 그리고 도시락을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식사하면서 말씀하시죠.”

“그런데 반찬이 이게?”

천중명의 권유에 젓가락을 든 박승양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두 세트를 주문하면 반찬이 좀 서로 달라야 이거저거 나눠 먹는 맛이 있을 텐데, 융통성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식사에서 박승양은 참 알뜰하게 반찬을 먹었다.

“밥이 좀 더 있을까요? 반찬이 많이 남으니까 아쉬워서.”

그리고 밥을 추가해 달라는 요구도 내밀었다.

20분에 걸쳐 그가 관리하는 저축은행의 상황, 금리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커피, 박승양은 얼음이 담긴 음료를 앞에 두었다.

박승양은 편안해 보이는 재킷 안쪽에서 사진 두 장을 꺼내 앞에 놓았다.

“미국에 있는 자식놈들입니다. 수표를 앞에 내려놓았는데 동그라미 숫자로 봐서 10조 원쯤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걸 받은 뒤에 말을 바꾸면 안 좋을 거란 말을 했었고, 천 회장님께 말을 전해도 뒤탈이 있을 거란 투였습니다.”

천중명은 잠자코 배부른 박승양의 말을 들었다.

“돈을 만들 기회다 싶으면 이미 마음이 그곳에 있습니다. 이해하실까? 저 돈도 내 거, 이 돈도 내 거, 나는 다 벌 수 있는데 하면서 마음이 달려가는 심정을 말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천중명을 힐끔 본 박승양이 시원하게 음료수를 들이켰다.

“그때 회장님만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천중명 회장님의 사람인데 왜 흔들릴까? 이럴 때 달려가서 말해야 충신인데! 충신? 아시지요? 충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억을 벌고 죽어! 그 충신?”

가볍게 웃는 천중명의 시선을 피하듯이 박승양은 테이블에 놓인 사진에 시선을 주었다.

“저 사진을 보면서 죄송하게도 천상기 회장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내 자식놈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아. 그보다 더 괴로운 게 뭔지 아십니까?”

완벽하게 무대를 장악한 주연배우처럼 박승양은 변화무쌍한 표정과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직도 그 수표가 눈앞을 둥둥 떠다니는 겁니다. 그거 있다고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는데 수표가 둥둥! 나 잡아봐라, 하고 떠다닙니다.”

박승양의 독백이 끝났을 때 천중명은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박 회장님이 충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예?”

그런 뒤에 천중명이 건넨 말에 박승양이 뭔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10조 원에 흔들리지 않는 내 편입니다. 그러니 그 큰 금액을 거절할까 했던 상대방이 많이 놀랐을 겁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당하고서 이대로 계실 겁니까?”

“방법이? 그러니까 놈들을 때려줄 방법이 있으십니까? 지난번 윤성일 회장 건처럼?”

가볍게 웃는 천중명을 향해 박승양이 잔인함을 듬뿍 묻힌 미소를 그려냈다.

**

거대한 트럭이 첫날의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뒤에 커다랗게 방향을 틀었다. 지경리온의 베이스에 들어선 아론도는 유도 요원이 팔을 내리는 순간, 정확하게 정지선에 트럭을 세웠다.

우르르,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타이어, 연료, 그리고 배기관을 체크하는 동안 아론도와 어시스턴트, 추일원이 트럭에서 내렸다.

“우리가 선두야! 대략 15분을 앞섰어!”

파크 피터슨의 흥분한 음성에 아론도는 고개를 돌려 트럭을 바라보았다.

“믿고 달렸습니다! 훌륭했어요! 유해물질은 어떻습니까?”

고개를 돌린 아론도가 파크 피터슨 옆에 서 있던 신상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깨끗합니다! 공기 중에 포함된 질소 함량 이하의 질소만 배출됐을 뿐이고요! 종일 우리 신화의 기록과 함께 그 부분이 방송에 나왔을 정도입니다!”

“내일도 기대하세요!”

말을 마친 아론도가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화장실도 들러야 하고, 샤워와 식사도 아쉬울 테니 충분히 이해 가는 행동이었다.

“아! 사장님!”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부탁드린 커피는요?”

“들어가 보십시오. 뜨거운 물만 부으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드시게 될 겁니다.”

신상훈의 답을 들은 아론도가 만족한 미소를 보인 뒤에 숙소를 향해 걸었다.

트럭들이 하나둘 베이스에 도착하는 가운데 ‘신화’에 진단기를 연결한 스태프가 혹시 모를 이상을 체크하고, 그 옆에서는 바닥에 들어간 또 다른 직원이 하부를 살피고 있었다.

“잠시만요.”

파크 피터슨에게 양해를 구한 신상훈은 추일원과 대원에게 다가갔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습니다. 견딜 만하던가요?”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힘들다느니, 고생스러웠다느니 하는 말보다 듣기 좋아서 신상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베이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함께 온 대원 두 분이 계속 탱크로리를 지켜주었는데 특별히 걸릴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오는 길에서도 그랬습니다. 사막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별일 없을 것 같은데 계속 주의하겠습니다.”

“가세요. 얼른 좀 씻고, 쉬어야 내일 또 달립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뒤에 추일원과 대원은 샤워가 가능한 차량으로 이동했고, 신상훈은 ‘신화’를 향해 움직였다.

아침에 받았던 점검표대로 다시 전체를 확인하고, 내일 출발 직전에 또다시 같은 점검을 마친다.

“사장님! 공식 기록이 나왔습니다. 2위 거양자동차보다 15분16초 앞선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때 본부석에 들렀던 스태프가 기록용지를 들고 신상훈에게 다가왔다.

**

박승양이 돌아간 뒤에 유진교가 집무실에 들어온 것이 오후 8시쯤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오전 8시 30분 출발입니다. 시차에 따라 두바이 국제공항에 오후 1시 30분 도착이고, 공항에 정희배 총괄사장이 나올 예정입니다.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 청장과의 약속은 현지 시각 오후 4시로 잡았습니다.”

“그럼 아침에 공항에서 뵙지요.”

“예, 회장님. 그리고 현지 공사 현황을 USB에 담아왔습니다. 첫날 랠리를 마쳤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2위인 거양자동차와 15분 정도 차이로 선두를 유지했다는 보고입니다.”

“나쁘지 않네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막상 돌아보면 딱히 이뤄놓은 것은 없는 그런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공사를 중단하게 되면 돌아올 손해, 그 외에 발생하는 피해에 관한 자료는 내일 비행 동안 확인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나는 평창동에 들렀다가 퇴근할 생각이어서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겠습니다.”

지금 나서도 12시간을 지내고 나가는 길이다. 그런데도 일찍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천중명과 그룹발전본부, 임원들 대부분은 이렇게 지낸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자정을 넘기도록 자료를 준비한 뒤에 내일 오전 공항에 나올 유진교가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

샤워와 저녁을 해결한 추일원이 커피를 앞에 두었을 때였다. 숙소로 사용하는 그의 차량으로 조양회가 들어섰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사이이고, 그만큼 어색한 관계인데 그렇더라도 목표가 같아서 묘한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추일원이 먼저 간단하게 오늘 주행 소감을 전했고, 이어서 조양회가 베이스의 분위기와 가등섭 측의 움직임을 본 대로 알려주었다.

“각 제조사 스태프들이 함께 지내고 있어서 탱크로리는 지금처럼 지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트럭의 경비도 야간만 조심한다면 특별하게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행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앞으로 사흘은 도로주행이라 보는 눈이 많아서 특별히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흘 뒤에 사막에서부터는 어시스턴트 옆에 대원을 한 명씩 더 배치할까 합니다.”

대강 상황을 들은 조양회가 입구를 한 번 바라본 뒤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등섭 부총재가 데려왔다는 인원이 아직 눈에 띄지 않습니다. 트럭에 함께 탄 것 같지도 않고요. 아마 어딘가에서 기다리지 않나 싶은데 특히 조심하셨으면 합니다.”

이어서 그는 호텔에서 가등섭과 만났던 일을 간략하게 전했다.

“잔인한 성격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지경그룹과 맺은 계약 내용까지 발표된 이상 가등섭 부총재는 절대 정당하게 승패를 가를 생각이 없을 겁니다.”

“이미 짐작했던 일입니다. 최선을 다해 경계하고 있으니 조 사장께서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대화를 마친 조양회가 몸을 일으켜 차를 빠져나가자, 추일원은 여태 발목에 걸고 있던 칼을 뽑아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교대는?”

“세 시간씩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럼 먼저 잔다.”

“예.”

외국에 나와서 들뜬다거나 혹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여유 따위 없이 추일원은 바로 안쪽의 간이침대에 몸을 눕혔다.

나중에 따블로 갚으라던 곽대출을 떠올리며 추일원은 누운 상태에서 히죽 웃었다. 그런 그가 만들어준 이런 기회를 방심해서 놓칠 수야 없는 일이었다.

**

평창동 저택에 들어선 천중명은 이은명과 인사를 나눈 뒤에 바로 서재로 들어갔다.

“저 왔습니다, 아버지.”

“앉아.”

천호득은 며칠 사이 힘들었던 눈치였다. 평소와 비슷한 스웨터에 편한 바지를 입었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디 편찮으세요?”

“어쩐 일이야?”

“내일 아랍에미리트로 출장 가는 일정도 있고, 뵙고 싶기도 하고요.”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는 윤만석 실장도 있고, 방송에도 이미 나온 뒤여서 아랍에미리트의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사실 정도는 천호득이 충분히 알만한 일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어떻게 대처할 생각인지 정도 물어보았을 천호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요.”

“다녀와. 다녀와서 떡국이나 먹으러 가.”

“그러실래요? 하루나 이틀이면 돌아올 테니 오는 대로 제가 모시고 갈게요.”

천호득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버지.”

“뭐가 또 있어?”

“서양 사람들 보면 아버지가 아들 안아주고 하던데 우리도 한번 해볼까요? 출장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말을 마친 천중명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상체를 기울인 뒤에 조심스럽게 천호득을 안았다.

샴푸 냄새, 스킨과 로션, 그리고 천호득의 향수 냄새가 넘어왔고, 다음으로 왜소한 그의 상체가 두 팔과 품에 느껴졌다.

거절할 줄 알았다.

뭐하는 짓이냐고 타박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내가 고마워하는 거 알지?”

그런데 천호득은 뜻밖의 말을 건네고는 휠체어에서 팔을 내밀어 천중명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잠시 뒤에 천중명은 다시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 제가 돈이나 자리에 욕심 없는 건 아시죠?”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하는 눈으로 천호득이 바라보는 앞이었다.

“아버지 욕심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장 다녀올 때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계세요. 아니면…….”

“아니면 뭐?”

그래. 이게 진짜 천호득이지.

“다시는 안아드리지 않을 겁니다.”

“흐헤! 흐헤헤헤!”

기운이 부족했지만, 천호득 특유의 웃음을 들으며 천중명은 나직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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