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249.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3)
지경그룹 그룹발전본부로 정부 관계부처의 질문이 담긴 공문과 현황 보고요청,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이 연달아 달려들었다. 그 뒤로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윤병지 대송그룹 회장의 급한 연락이 유진교를 찾았다.
윤병지가 대송그룹의 회장이라면 유진교는 지경그룹의 부회장격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통화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본부장님. 대송건설에서 진행하던 두바이 현장 두 곳이 비슷한 시간에 공사중단 명령을 받았습니다. 정확한 사유를 파악 중인데 아무래도 지경그룹의 현장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문제로 회장님께서 직접 아랍에미리트로 방문하실 계획입니다. 당장 해결책이 되지는 않겠지만, 회장님께서 랠리 시작 전부터 이런 상황을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우선 일정이 정해지는 것을 보고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혹시 블루크루드와 관련한 보복인가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윤병지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유진교는 또 한 번 참담한 심정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윤병지도 짐작했던 일을 유진교가 이토록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였다.
- 본부장님. 제가 전에 대송물산 부회장으로 근무하면서 두바이 쪽에 지인이 몇 명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라인을 한번 찾아보아도 되겠습니까?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회장님께 여쭤보고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고를 위해 공사 현황과 계약 금액, 미수금 현황 등의 자료를 받아보고 싶습니다.”
- 이메일로 바로 보내겠습니다. 이번 공사중단과 관련해 정부 관련 부처에 신고하는 것을 제외하고, 언론을 비롯한 외부 발표는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라고 처리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유진교는 최만호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만약 그가 기획실장으로 있었다면 이럴 때 관련 자료를 챙겼을 테고, 놓친 부분을 짚어주었을 게 분명했다.
혹시나 유진교가 기획실장을 임명했다가 파벌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싶어 미뤄두었던 그 자리를 누군가로 채울 때가 온 것이 분명했다.
역시 천중명과 의논한 뒤에 결정할 문제여서 유진교는 서둘러 메일함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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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양자동차의 1호 트럭 황금룡이 햇볕을 받아 번쩍였다. 붉은색과 금빛을 교차해서 용을 상징하는 형상을 그려넣었는데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그 위용을 더욱 자랑하는 느낌이었다.
크아아아-앙! 크아아-앙!
황금룡을 뒤따르는 지프 안에서 류효양은 랩타임을 확인했다. 지경리온자동차의 ‘신화’에 비해 3분가량 뒤지긴 했는데 첫날이다 보니 전혀 문제 될 것 없었다.
도로를 주행하는 것과 달리 사막에서는 내비게이션이 직선거리를 잘못 가리켜도 15분쯤 훌쩍 잡아먹고, 바퀴가 파묻히면 한두 시간 가볍게 날아가는 데다, 뒤집히기라도 하면 반나절 허비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사막에서 승부다.’
이왕 나선 길이었다.
처음에야 천중명이 두렵긴 했다만, 가등섭이 준비한 것을 알고, 또 거양자동차의 능력을 믿고 나자 잊고 있었던 자신감이 류효양에게 용기를 만들어주었다.
막말로 유해물질이 검출되는 것만으로도 지경리온의 신화는 끝난다. 가등섭이 블루크루드에 흔하디흔한 디젤유 살짝 섞으면? 물론 류효양이 요구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럴 수 있다면 좋다는 거지.
크아아아-앙! 크아앙!
앞에서 달리는 황금룡을 보며 류효양이 볼을 부풀리며 웃었다. 회색의 배기가스마저 그에게는 승리를 상징하는 의미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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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교가 대송건설의 상황을 보고한 뒤였다. 전화를 걸어온 황성규를 천중명은 집무실로 불렀다. 오후 5시가 살짝 넘은 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의 얼굴이 워낙 수척해서 병이 걸린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강제로 휴가를 보내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천중명은 소파를 손으로 가리킨 뒤에 그와 함께 앉았다.
“테드 케블린을 찾은 이후로 꽤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과정에서 너무 시간을 허비하다 보니 자신감을 잃을 정도입니다.”
천중명의 앞에서 힘겹게 말을 꺼낸 황성규가 메고 다니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먼저 사진을 보셨으면 합니다.”
그는 그 안에서 A4 사이즈로 출력한 사진 몇 장을 꺼내 천중명 앞에 놓아주었다.
“박승양 회장입니다. 점심 무렵에 한국계 미국인 타일러 케인이 접근했습니다. 그 역시 모사드 출신입니다.”
천중명이 든 사진에서 점잖은 모습의 타일러가 고약한 표정의 박승양에게 무언가를 내밀고 있었다.
“대화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타일러가 꺼낸 두 가지 중 하나는 미국에서 사용하는 수표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이었던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사진은 박승양 회장이 회수했습니다.”
“생각보다는 치졸하게 나오는군요.”
황성규가 무슨 소리인가 하는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도 나와 황 선생님이 거대자본을 막겠다고 나선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으로 나를 묶는 방법이 정부 부처의 압력, 검찰이나 경찰의 조사로 묶는 것일 테고.”
사진에서 시선을 든 천중명이 말을 이었다.
“다음은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겠죠. 박 회장이 유혹에 넘어가 내게 문제가 될 부분을 증언해도 좋고, 아니면 서로 의심해도 손해 볼 것은 없을 테니까요.”
“저렇게까지 나설 정도로 급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십니까?”
“복잡하긴 한데 일의 바퀴가 이미 구르고 있거든요. 이쪽도 저쪽도 멈추지 못하게 되기 전에 어떡해서든 확률을 높이고 싶었겠지요. 더불어 황 선생님의 시선도 뺏고 싶었을 테고요.”
황성규가 고개를 갸웃한 다음이었다.
“저들이 이렇게 나온 것을 보면, 황 선생님이 잡은 단서가 저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무리해서 박 회장을 만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요.”
“흠.”
“파생거래로 박승양 회장이 손에 쥔 금액이 5조 원 가까이 됩니다. 저축은행도 소유했고. 얼마를 제시해야 박 회장이 솔깃할까요? 최소한 고민이라도 할 금액이요.”
“5조 원 이상이라는 의미군요.”
천중명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속한 표현 중에 돈독이 올랐다는 말이 있습니다. 돈을 손에 쥐다 보면 어느 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 기회가 삶의 최고 가치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승양 회장이 그런 부류라고 느끼십니까?”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 돈이 주는 유혹을 이겨내면 현명한 삶을 살게 될 테고, 돈을 택하는 순간 노예가 돼서 인생을 갉아먹겠죠.”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황성규를 향해 천중명은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윤성일 회장과 그룹을 소유했다는 오너들을 보면서 느낀 점입니다. 목이 마른 데 바닷물을 마시는 사람들처럼 그 많은 돈을 쥐고도 갈증을 느끼며 사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뭔가 감탄한 듯한 시선으로 천중명을 바라보던 황성규가 아차하는 얼굴로 가방의 입구를 당겼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말씀을 듣느라 이걸 바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방에서 또 다른 봉투를 꺼냈다.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입니다. 아랍에미리트의 왕족으로 거의 모든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실무자입니다.”
얼굴이 커다랗게 찍힌 사진과 중동 남자들이 흔히 입은 흰색 원피스에 구트라를 쓰고 아깔이라는 검은색 머리띠를 한 전신사진이었다.
전체적으로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에 심술이 붙은 볼을 지녀서 하여간 만만치 않은 인상이기도 했다.
“미국과 중국인 여성을 포함해 부인이 여덟 명, 자녀는 열한 명입니다. 개방적인 성향과 보수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평입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감정은요?”
천중명은 사진을 넘겨 뒤에 있는 자료를 살폈다.
“특별한 호감이나 반감은 없습니다. 대신 영국과 미국에 진출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인물입니다. 축구 구단이나 호텔, 오피스빌딩을 매입할 때 첫 번째 조건이 영국이나 미국, 그 두 나라에 집중될 정도입니다.”
잠시 서류를 살핀 후에 천중명은 고개를 들었다.
“당분간 박승양 회장뿐만 아니라 내 주변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잦아질 수 있습니다. 참고하시고, 거대자본의 최초 목표가 어디인지를 확인해 주세요. 달러? 엔화? 유로화? 아니면 중국의 위안화. 그 정보가 정확할수록 승산이 있습니다.”
“윤곽은 대강 나왔습니다. 사흘 안으로 반드시 결과물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힘들겠지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천중명의 답을 들은 황성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집무실을 나간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책상으로 움직이는 천중명의 손에서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박승양의 이름이 이렇게 반갑기는 아마 처음이지 싶어서 가볍게 웃은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회장님. 박승양입니다.
“예. 요즘 고생 많으시죠?”
- 회장님. 저녁 식사하셨습니까? 시간이 괜찮으시면…….
“밖에서 먹을까요? 아니면 집무실에서 도시락을 함께 먹을까요?”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 알고 계셨습니까?
그의 음성이 처음이지 싶을 정도로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천중명은 편안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믿는 박 회장님이 전화해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는 것 하나는 분명히 알겠습니다.”
- 회장니-임!
과장된 표현을 자주 쓰는 박승양이지만, 지금 그가 부른 호칭이 그의 복잡했을 속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 제가 정말 1초, 아니 솔직히 한 30초쯤? 아시지요? 그게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그 정도 흔들렸었습니다.
말문이 터진 사람처럼 박승양은 속에 있던 말을 연달아 건넸다.
- 제가 이상하게 돈 냄새를 진하게 맡으면, 의식이 흐려지면서 기름장에 빠진 낙지처럼 힘을 못 씁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우리 박 회장님을 힘들게 했으니 제대로 갚아줘야죠?”
-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세요.”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책상에 있는 인터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박승양 회장이 도착하면 집무실에서 도시락을 먹을 생각이니까 준비 부탁해.”
[네, 회장님.]
지시를 마친 천중명은 뉘엿뉘엿 지는 하루해를 등진 채 책상에 앉았다. 점심도 도시락, 저녁도 도시락이고, 오늘 역시 이 집무실에서 대략 14시간 이상을 지내다 하루를 마칠 게 분명했다.
낮에 보았던 지경화재보험 직원들의 사진을 떠올리며 천중명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이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지경에 속한 모든 직원이 행복한 그룹을 만들고 싶다. 그들이 정년을 마치고 지경이란 이름을 보았을 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감동이 느껴지는 기업이 되었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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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 총괄사장 정희배는 뜻밖의 공문을 받아들고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는 공문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의 면담요청을 넣었는데, 평소라면 사나흘은 너끈히 걸려 도착할 답신이 고작 한 시간 만에 정희배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건 마치 천중명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방문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사를 중단했다고 공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처리였다.
상황이 어떻든 정희배는 급하게 전화기를 들어 유진교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본부장님. 아랍에미리트 정희배입니다. 지금 막 공식 방문 일정을 통지해 달라는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 면담 담당자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었나?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입니다. 이곳에서 3년을 보내도록 한 번밖에 못 봤던 왕족이 직접 면담 일정을 통지해 달라는 공문이었습니다.”
- 고생했어.
흥분한 정희배와 달리 유진교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 비서실과 의논해서 일정을 보낼 테니 후속조치에도 실수가 없도록 부탁해.
“예, 본부장님.”
통화를 마친 정희배는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그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5조 원이 넘는 공사, 거기에 더해 대송그룹의 공사까지 막아버린 아랍에미리트 왕족이 천중명 회장을 만나겠다고 한 시간 만에 답을 줄 리는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의 결과에 따라 지경그룹이 위태로울 수도, 여기에서 한 단계 뛰어오를 수도 있다.
그의 본능이 주는 경고에 따라 정희배는 관련 서류를 전부 다시 추리기 시작했다. 천중명이 도착했을 때 필요할지 모를 브리핑을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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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자동차 메이커 소속 트럭 한 대가 전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직후에 베이스 기지에 있던 스태프들이 우르르 본부석으로 달려갔다. 사막과는 달리 첫날의 도로주행에서 전복되면 차의 형체가 일그러지고 주요 부위의 손상이 커서 더는 랠리에 참여하기 어렵다.
잔인한 과정이요, 장면이었다.
해당 업체 관계자들이 고개를 돌린 채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는 옆에서 타 제조사 스태프들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맴돌았다.
남몰래 숨을 돌린 신상훈은 본부석 한쪽에 놓인 TV를 향해 움직였다.
첫날 도로주행은 일정 중에서도 긴 거리를 달린다.
아직 도착하려면 세 시간쯤 남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와-!”
짝짝짝짝짝!
헬리콥터에서 찍은 영상에서 황금룡이 나오는 순간 중국의 거양자동차 스태프들이 탄성과 함께 손뼉을 쳤다.
빨강과 금색을 저렇게 덕지덕지 바르다니.
‘촌스럽기는!’
화면을 통해 번쩍이는 금빛을 두른 트럭이 보인 순간이었다. 신상훈이 불쑥 튀어나오는 원색적인 비난을 꿀꺽 삼킨 직후에,
“디자인이 굉장히 올드하군요.”
어느 틈에 옆으로 다가온 파크 피터슨이 나직한 스웨덴 말로 거양자동차의 황금룡을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