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248.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2)
자리에서 일어선 천중명은 유진교에게 소파를 권했다.
“전기자동차는 전기를 생산하는데 어차피 석탄이나 원유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산유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블루크루드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겠죠.”
“그런 기본적인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죄송할 정도입니다.”
유진교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착잡한 심정을 닦아냈다.
“워낙 빠르게 일이 진행되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블루크루드를 양산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으니 그 점을 염려하기에는 이른 시기였습니다.”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유진교가 결재판을 천중명 앞에 펼쳐주었다.
“세 곳의 공사에 총 공사비 5조7천억 원입니다.”
“미수금이 제법 되네요.”
“기성의 비율을 적게 잡은 탓입니다. 계약을 따내기 위해 무리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다섯 장짜리 계약서 요약본을 천천히 살핀 천중명은 현지 책임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여기 있는 정희배 사장을 먼저 만나고, 결정권을 지닌 아랍에미리트의 책임자와 만나보고 싶습니다. 가능한지 확인해서 알려주세요.”
“직접 움직이시겠습니까?”
“그쪽에서도 아마 이걸 바랄 겁니다. 이번 일만큼은 최대한 서둘러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고개를 숙인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섰다.
쇼핑센터와 호텔을 겸한 복합몰, 휴게소를 포함한 도로, 그리고 마지막은 식수를 공급하는 파이프라인까지, 수주 현황은 나쁘지 않았다.
이 세 곳의 건설 현장 모두 중간 검사에서 규정에 미달했다는 핑계로 중단되었다. 저들이 이렇게 나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천중명은 소리를 죽여놓은 TV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헬리콥터에서 찍었는지 거대한 트럭이 달리는 모습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영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랠리를 통해 던진 블루크루드라는 미끼를 아랍에미리트가 덥석 물었으니 지금은 줄이 터지지 않도록 잘 당긴 뒤에 물 밖으로 끌어내는 일만 남았다.
가볍게 웃은 천중명은 결재판을 들고 책상으로 움직였다.
**
구불구불한 도로의 연속이었다.
양쪽으로 프랑스의 1층 주택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데다, 회전구간에서 차치하는 트럭의 넓은 궤적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좁게 느껴지는 도로이기도 했다.
끼기기긱! 철컹! 크아아아아-앙!
담이 크고 강단이 있는 것과 커브를 섬뜩하게 도는 트럭에 타고 있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홱홱 달려드는 주변의 주택을 피하는 것처럼 아론도는 거대한 트럭으로 120킬로미터의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끼기기기-익!
타이어 타는 소리와 함께 트럭 전체가 휘청했는데,
철컹! 크아앙! 철컹! 크아아아-앙!
추일원이 브레이크를 떠올린 순간마다 아론도는 오히려 속도를 높여서 기울어지는 트럭을 바로잡곤 했다. 바로 앞의 집을 들이받는다 싶어 온몸에 힘을 꽉 주는 것과 동시에 그는 또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트럭의 방향을 틀었다. X자 벨트가 아니었다면 아마 상체가 좌우로 눕다시피 쏠리고 남았을 주행이었다.
철컹! 크아아아-앙!
직선도로였다.
‘젠장!’
점프대 형태로 도로의 너머를 전혀 알 수 없는데도 아론도는 트럭을 타고 하늘로 솟구칠 것처럼 미친 듯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조금만! 속도를 줄여야 한다고!
크아아아-앙!
놀이기구가 아니잖아!
도로의 끝을 타고 트럭의 머리가 붕 떠올랐을 때 추일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밑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아래 도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치솟은 트럭의 운전석으로 파란 하늘과 저 멀리 집들, 그리고 그사이에 오른쪽으로 꺾어진 아스팔트 도로가 들어왔다.
운전석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전면의 유리창에 담겼던 하늘이 빠르게 위로 올라갔으며 앞쪽의 상황이 단박에 추일원의 눈에 담겼다.
콰아-앙! 철컹! 크아아아아-앙!
거칠게 요동치는 트럭의 운전석에서 기어를 변속한 아론도가 이를 악물고 있는 것도 보였다.
추일원은 그때 알았다.
당신도 정말 최선을 다하는 거구나.
아무리 베테랑이라고 해도 아차해서 뒤집히는 순간이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이 주행을 위해 당신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거구나.
크아아앙! 철컹! 크아아아앙!
추일원의 상체가 좌우로 흔들렸고, 그보다 더 심하게 아론도가 앉은 운전석의 좌석이 승용차의 뒤에 얹어놓는 인형의 머리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씨발.”
추일원은 미친 사람처럼 앞을 보며 웃었다.
당신, 내가 지켜줄게.
적어도 당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우승을 빼앗기는 일은 없게 할게.
[01:37:22]
조수석 상단에 걸린 시계가 출발선에서 지금까지 달린 시간을 알려줄 때,
크아아아아아-앙!
트럭의 엔진이 추일원의 각오에 답하듯 거센소리를 터트렸다.
**
천중명은 모처럼 황성규의 번호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황성규입니다.
“잘 지내세요?”
-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숨을 쉬기조차 어렵습니다.
그 젊잖고 무게 있던 사람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런 소리를 늘어놓을까 싶어서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거대자본이 조직을 감추는 데 사용하는 금액이 적게 잡아 몇백억, 많이 잡으면 몇천억 원 수준일 겁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오랜 세월을 지내온 경험도 있을 테고요.”
-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잡아주세요.”
- 예, 회장님.
황성규의 답이 건너온 다음이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우리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 그쪽 실권자와 성향, 기타 관련 정보를 찾아주었으면 합니다. 약점도 좋고요.”
- 감사합니다, 회장님.
“일을 부탁하는 게 감사할 일인가요?”
- 지금 제겐 그렇습니다.
황성규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한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부담을 놓으세요. 황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거대자본의 공격을 모르고 있었을 테니 그것만 해도 이미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그동안 도움을 준 정보에 관해서는 다른 말을 할 필요도 없지요. 그럼 부탁합니다.”
- 준비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천중명이 통화를 마쳤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부속실 직원이 들어 왔다.
“회장님. 도시락을 받은 지경화재에서 부속실로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요란한 반응을 삼가라는 말에 부속실로 보낸 모양이었다.
프린터로 출력한 사진에서 직원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트를 그려냈고, 도시락을 앞에 두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사진을 건네준 부속실 직원이 의아한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직원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렇게 보람되게 느껴질 줄은 몰라서.”
가볍게 웃은 천중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사는 도시락이어서 모든 직원에게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이 사진 속에 있는 직원들처럼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되었으면 싶어서. 이 사진 어디 붙여둘 만한 곳이 없을까?”
사진에서 고개를 들었던 천중명의 앞에서 서른 중반의 부속실 직원이 붉어진 눈시울을 수습하느라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지금껏 이런 경우가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집무실보다는 출근이나 퇴근 때 보실 수 있게 부속실 뒤편 벽에 걸어두겠습니다.”
“그게 좋겠네. 대신 소문나지 않도록 주의해. 안 그랬다가는 도시락 사느라 급여가 다 없어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미소를 담은 부속실 직원에게 사진을 건네준 천중명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
김도정과 점심을 해결한 박승양이 한알저축은행을 나섰을 때였다.
“박승양 회장님?”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의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저축은행 바로 앞인 데다, 무엇보다 돈을 빌려 간 사람이 아니어서 험한 꼴을 당할 걱정은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신가? 바쁜데?”
“시간 주시면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나는 남자, 남자, 이런 거 안 좋아해요. 돈이 필요하시면 안에 들어가 보시고.”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남자의 대꾸를 들으며 박승양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낯선 남자에게서 풀풀 풍겨 나오는 익숙한 돈 냄새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실까?”
“바로 옆으로 가시죠.”
“그럽시다.”
가까이 가자는 말이 주는 안도감에 박승양은 좀 더 편한 심정으로 남자를 따라 커피전문점으로 움직였고, 둘이서 1회용 컵에 담긴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단정하게 만진 머리, 신뢰가 느껴지는 점잖은 인상, 백인과 동양인의 혼혈인가 싶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또렷한 남자가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미국에서 발행한 수표입니다. 국내에서 애쓰실 필요 없이 현지에서 직접 계좌를 만들어 입금하시면 됩니다.”
그리고는 마치 명함을 꺼내듯 처음 보는 수표를 내놓았다.
테이블에 놓인 수표와 남자를 번갈아 본 박승양이 고개를 갸웃한 직후였다.
“우리의 목표는 지경이 아닙니다.”
눈매를 좁힌 박승양을 향해 남자는 말을 바로 이었다.
“박 회장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돈을 벌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줄곧 돈 냄새가 징그럽게 풍기더니 이거였구나.
박승양은 다시 테이블에 올라온 미국식 수표와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내게 이런 걸 내밀었다는 건 천 회장님과 지경그룹을 무너트리는 데 도움을 달라는 거 아니오? 이 사실을 천 회장께 말씀드리면 어떡하려고 그러시지?”
“지경그룹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잘 생각해서 판단하십시오.”
“내가 이 수표를 먹은 뒤에 마음을 바꾸면?”
“미국에서 현금화됩니다. 국내에서 은행에 넣으면 당장 외국환 거래법에 걸릴 테고, 이 정도 돈을 움직일 정도면 배신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협박이오?”
“협박입니다.”
점잖은 태도에서도 남자는 거침이 없었다.
“한 가지 물읍시다.”
그렇게 하라는 것처럼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요?”
“한화로 1천조 원의 돈이 움직이는 계획을 천중명 회장이 방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위험을 제거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들은 얼마나 버는데?”
남자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만 보였다.
“그 수표를 두고 가면 나는 그걸 들고 바로 천중명 회장에게 갑니다.”
이번에도 남자는 재킷 안쪽에 손을 넣어서 사진 두 장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본 직후에 박승양의 눈이 하얗게 변했다.
“자녀분이 행복하길 바라시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제법 자리를 잡았던데요?”
“나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한 것 같으니까 말씀드리지. 내가 명동에서 막내 생활을 한 게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요.”
독이 잔뜩 오른 승냥이처럼 매서운 얼굴을 하고 박승양이 말을 이었다.
“내 앞에서 농약을 처마신 인간도 있고, 회칼을 꺼낸 인간은 더 많고, 아이들을 노린 놈들도 실제로 있었고.”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박승양이 상체를 꺼덕이며 웃었다.
“자신 있는 인간이었으면 절대로 나를 찾지 않아. 천 회장과 담판을 짓지. 괜히 헛짓거리하지 말고 그 수표 들고 돌아가.”
“듣던 것과는 다르시군요.”
“거, 애들 사진은 놔두고 가지? 안 그래도 쓸만한 사진이 없어서 아쉬웠던 참인데.”
말뿐만이 아니라 박승양은 팔을 뻗어 두 장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흘 뒤에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달라질 게 없어요.”
심오한 표정의 박승양을 향해 남자가 자신 넘치는 미소를 그려냈다.
“그래. 들어나 봅시다. 내게 바라는 게 뭐요?”
“수표를 받으시면 그때 말씀드리지요. 그 뒤에 모습을 바꾸면 사진 속의 자녀분들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흠.”
박승양은 더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팔을 내렸다.
“파생상품 거래를 해보셨으니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보다 엄청난 수익이 기다립니다. 답은 사흘 뒤에 듣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마친 남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전문점을 나섰다.
“미국놈 수표라 얼마인지 정확하게 못 봤는데!”
불만을 툭 쏟아낸 박승양이 1회용 컵에 담긴 커피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10조 원 정도 되는 거 같은데? 그거로 파생상품보다 더한 거래를 하면 도대체 얼마를 버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박승양은 홀짝 커피를 마셨다.
“에이! 돈 냄새가 워낙 진해서 커피 맛도 안 느껴지네!”
그런 뒤에 그는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