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247.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1)
출발 지점을 의미하는 사각의 틀이 서 있고, 주변으로 제조사의 플랜카드가 걸렸으며, 응원하러 나온 이들과 기자들이 뒤엉킨 스타트 라인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마지막 점검을 위한 목록을 손에 든 엔지니어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드라이버와 의견을 교환했다.
출발 한 시간 전이었다.
지난밤 내내 지경리온의 트럭을 지켰던 추일원이 대원들을 불렀다.
“긴말 할 것 없다. 우리 같은 놈들이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았으니까 솔직히 우리는 운이 좋았다. 지경그룹과 곽 선배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깔끔하게 끝내자.”
추일원이 대원들을 쭉 둘러본 뒤에 픽 웃었다.
“완주 못 하는 팀은 문어 백 마리 잡아올 때까지 바다에 처넣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어? 차량 결함으로 그렇게 되면 억울하잖습니까?”
“그럼 끌고 밀어서라도 완주해.”
대원들이 실없이 웃은 다음이었다.
숨을 가볍게 내쉰 추일원은 손을 뻗어 가장 옆에 있는 강갑수의 뒤통수를 당겨서 이마를 붙였다.
반드시 살아서 보자.
중국에서 어떤 놈이 왔든, 어떤 특수부대 출신이 앞을 막든, 결승선에 들어와서 다시 보자.
이 의미를 모를 사람이 있을까.
추일원과 대원들이 돌아가면서 뒤통수를 당겨 이마를 붙였고, 그러면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각자 포지션으로 이동해.”
“예.”
대원들이 그렇게 흩어졌다.
엔지니어들이 각자 맡은 파트의 마지막 점검표를 넘겨주었고. 신상훈은 집게가 달린 커다란 판에 그 서류를 하나씩 끼워 넣었다.
“엔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파크 피터슨이 또 다른 기록지를 가지고 다가왔다.
“다 끝났군요.”
“배터리 점검은 어떻습니까?”
“눈치를 살피느라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파크 피터슨이 자리를 떠난 뒤였다.
“이상 없습니다.”
지경전자 연구소장은 서류를 내밀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배터리 점검 기록이었다.
신상훈이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꿈은 꾸셨습니까?”
“그런 건 모르겠고, 어제 굉장한 통화를 한 건 있습니다.”
궁금해하는 연구소장에게 신상훈은 “끝나고 말씀드리죠.”라며 말을 끊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었다.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연구소장이 몸을 돌렸다.
이제 정말 시작이었다.
헬멧을 옆구리에 낀 아론도 지안테가 신상훈에게 다가왔다. 지경리온자동차와 각종 스폰서의 표식을 상체에 잔뜩 붙여놓아서 무척 화려해 보였다.
“베이스에 가장 먼저 도착하겠습니다. 첫날이니 사장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아론도 지안테 정도면 네임밸류로 신상훈의 훨씬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베이스에 도착하면 사장님이 준비한 커피를 마시고 싶습니다.”
신상훈이 고개를 갸웃한 직후였다.
“사장님이 준비한 커피가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가속페달을 더 밟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천중명에게 우승을 지시해 달라던 신상훈이었다. 당연히 아론도가 지니고 싶어 하는 사명감을 이해했다.
“마침 한국에서 합류한 팀에게서 최고의 커피를 몇 개 받아놓은 것이 있습니다. 베이스에 있는 그 어떤 커피보다 맛있는 커피를 준비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론도가 오른손을 위로 세워 내밀었고, 그 손을 신상훈이 마주 잡았다. 그런 뒤에 서로 어깨를 붙인 채 등을 두드렸다.
“드라이버와 스태프를 이렇게까지 하나로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한 팀이란 느낌, 참 오랜만에 가져봅니다.”
손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 아론도가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다음으로는 무엇보다 소중한 내 딸을 위해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적이 있습니다. 목표가 생기면 나는 누구보다 강해지니까요.”
눈과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 상태에서 전하는 진심이었다.
“이번엔 리온자동차를 다시 제 모습으로 돌려준 사장님을 위해서입니다. 트로피를 진열할 케이스를 미리 준비하시는 게 좋습니다.”
신상훈이 씨익 웃었고, 아론도가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
양서평과 가등섭은 호텔의 전면 유리가 보이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곳에서 두 테이블 떨어진 곳에서는 조양회와 가등섭이 데려온 남자가 마주했다.
“양 부총재. 사람에게는 그릇이라는 게 있어.”
얇은 가등섭의 음성이 양서평의 귀를 자극적으로 파고들었다.
“너무 무리한 걸 담으려고 들면 그릇이 깨지지.”
때앵.
가등섭은 앞에 놓인 찻잔을 중지로 튕겼다.
“하필이면 한국인가? 그들은 오래가지 못해.”
삐딱하게 앉은 가등섭이 재미있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총재의 조언도 있고 해서 내가 마지막 기회를 줄까 하는데?”
“필요 없소.”
“랠리에서 지고 나면 그 기회가 없어져.”
“우리 회장님께서 승리하실 거요.”
“우리 회장님? 흐하하! 흐호호호호!”
주변 사람들이 슬쩍 돌아볼 정도로 가등섭의 웃음은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하나만 묻자. 도대체 그 우리 회장님이란 사람이 어떤 능력을 지녔기에 양서평이 내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는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거지?”
“나는 지금까지 내 힘으로 이 자리에 섰고, 누구도 믿지 못한 채 살았소.”
“불우한 자네의 과거야 뭐.”
가등섭이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보스를 만나본 적 있소? 내가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고 반가워하는 보스?”
“흥! 재벌과 우리 조직은 삶의 방식이 달라.”
“그게 문제요. 내가 성장하자 사방에서 제거할 이유와 기회를 노리지. 끝없이 의심하는 보스 보다는 나를 믿어주는 보스를 선택했을 뿐이오.”
찻잔을 향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가등섭이 하얗게 눈을 치켜떴다.
“그 끝이 죽음이라도 말이지?”
“누가 죽을지는 랠리가 끝나봐야 알지 않겠소?”
“흐흐! 흐호호호!”
독특한 웃음을 쏟아낸 가등섭이 마지막에 비웃음을 다시 던져냈다.
“양서평과 한국에서 데려온 그 촌스러운 것들이 얼마나 능력을 발휘하는지 지켜보마.”
그런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은 늘 중국의 저력을 의심하지. 그러면서 시장을 탐내. 결국, 너도 그쪽으로 넘어갔을 뿐이야.”
“우리 중국도 제대로 된 기업을 가질 때가 되었을 뿐이오. 베끼거나 훔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뒤에 함께 성장하는 기업.”
“흐호호! 조직원이 기업가 흉내를 내다니. 모든 것을 내놓고 중국의 돈 앞에 한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한국과 지경그룹을 네 앞에 보여주마.”
말을 마친 가등섭이 찬바람이 쌩하게 보는 태도를 끝으로 몸을 돌렸다. 로비를 향해 걷는 그를 따라 기다리던 남자가 함께 움직였고, 조양회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랠리는?”
“30분 뒤에 출발입니다.”
“지난번에 천중명 회장님이 목숨을 걸 정도로 커다란 부탁을 할지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지?”
무슨 소린가 싶었던지 조양회가 로비 쪽을 힐끔 바라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가등섭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다.”
의미심장한 답을 내놓은 양서평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스타트 시간이었다.
출전하는 트럭 별로 시간을 체크할 수 있도록 스톱워치가 장착되었고, 대기 구간에는 엔진들이 뿜어내는 소음이 심장을 자극하고 있었다.
[앞으로 15일간의 대장정을 앞둔 트럭들이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제조사의 트럭이 최고 성적으로 결승점을 통과할지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스타트 라인은 흥분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이크를 든 기자가 흥분한 음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경리온자동차의 미트입니다! 랠리 내내 유해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을지에도 세계적인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엔지니어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이 TV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고, 미트의 앞에서 파크 피터슨과 서 있던 신상훈이 드라이버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는 뒷모습도 나왔다.
크르르릉.
신상훈은 드라이버 아론도 지안테를 먼저 보았고, 이어서 조수석에 앉은 추일원과 시선을 마주쳤다.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음직한 시선을 교환한 다음이었다.
띠이이이-.
스태프들이 철수하라는 의미의 부저가 커다랗게 울렸다.
크르르릉! 크아아아앙!
아론도 지안테는 X자로 걸린 벨트를 당겨본 뒤에 시선을 조수석으로 돌렸다.
“유 오케이?”
“오케이!”
이 남자와 함께 보름간을 함께 달린다. 시커멓고 동양인 특유의 낮은 코를 지녔는데 눈빛만큼은 그 어느 세상에 던져두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느낌이었다.
띠이이이이-!
두 번째 신호음이 울렸다.
“후! 후!”
아론도는 숨을 크게 두 번 내쉰 뒤에 룸밀러에 걸어둔 아내와 딸 사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베테랑이라고 꼽히는 그도 늘 출발 직전에는 이렇게 긴장을 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띠! 띠! 띠! 띠이-!
신호음이 떨어진 직후였다.
크아아아아앙!
앞쪽에서 거대한 엔진 소리와 함께 트럭들이 출발하는 것이 보였다.
크르르르릉. 철컹. 크르릉. 끼이익.
스타트 라인에 선 아론도가 운전석 바깥쪽에 있는 행사 스태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띠! 띠!
저 신호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출발이다.
동양인들은 참 신기한 감정과 정서를 지녔다.
자부심으로 이겨낼 수 없는 희생정신을 지녔고, 자신의 이익보다 우리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띠!
아론도는 가속페달에 발을 얹은 채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지경리온이 부를 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영 실패로 인한 패배감에 물든 리온자동차에 새로운 의지와 신념을 심을 기업이 있을 줄을 상상하지 못했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
그것까지는 솔직히 잘 모른다.
띠이이이-!
크아아아아앙! 철컹! 크아아아앙!
고개가 뒤로 홱 젖혀질 정도로 거친 출발이었다.
크와아아앙! 철컹! 크아앙! 철컹! 크와아아앙!
그러나 신상훈 총괄사장의 열정과 조수석에 앉은 동료에게 실망을 안기지는 않는다.
크아아아아앙! 철컹! 크아아아앙!
아론도는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
스타트라인의 풍경과 출발 모습이 한국의 TV에서도 나왔다.
“뭐야? 트럭 랠리가 처음부터 저렇게 전속력으로 달려나가는 거야?”
“매일 구간 성적을 체크해서 합계로 성적을 매긴다잖아.”
“그래도 그렇지. 저거 좀 봐. 벌써 시속 170킬로미터가 넘었어.”
화면에 트럭이 보일 때마다 아래에 제조사와 속도가 떠올랐고, 10킬로미터 지점에서는 랩타임을 재듯 통과 속도로 순위를 매긴 도표도 올라왔다.
“와-!”
지경그룹 계열사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20킬로미터 랩타임입니다. 현재 지경리온의 미트, 우리말로 신화라는 이름을 지닌 트럭이 선두를 차지했습니다! 랩타임 오른쪽에 0이라고 찍힌 숫자가 유해물질 배출을 측정하는 장치에서 보내준 신호입니다.]
중계를 맡은 앵커가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흥분한 음성으로 상황을 전해주고 있었다.
[2위는 일본의 사무라이, 3위가 중국 거양자동차의 황금룡입니다. 두 번째 랩타임 구간의 선두를 아시아권에서 휩쓸고 있습니다.]
[이제 2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지점의 기록이지만, 좋은 결과입니다.]
천중명 역시 집무실에서 TV를 켜놓고 랠리의 출발을 지켜보았다.
거대한 트럭이 있는 대로 속도를 높인 채 줄줄이 달리는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웅장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물론이고, 세계의 관심이 지경리온의 미트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주최 측도 전에 없이 중계권료가 많이 들어왔다며 흥분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의 전환점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면서도 유해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 차량은 무엇보다 기존의 충전소를 그대로 이용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앵커의 말을 해설자가 받았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와 함께 유진교가 들어왔다.
최소한 랠리와 관계된 이야기는 아닌 게 분명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회장님.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진행되던 우리 공사현장에 모두 공사중지 명령서가 도착했습니다.”
짐작했던 일이다. 이것 때문에 랠리에 합류하지 않았었다.
“이제 왔네요.”
“알고 계셨습니까?”
“화석연료를 생산해서 부를 얻는 나라들이 블루크루드를 얌전히 받아들이는 게 이상하죠. 상황을 지켜보고 움직일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반응이 늦게 왔네요.”
유진교는 정말이지 얼이 빠진 듯한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회장님. 정말, 이걸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본부장님도 충분히 예상하셨을 일인 것 같은데요? 아니었나요?”
이번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유진교가 결재판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