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45화 (245/315)

# 245

245. 승리를 가져와! (2)

증권사가 돈을 만지고, 영업부가 제품을 판매한다면, 법무팀은 법조문을 움켜쥐고 상대방과 맞선다.

이쪽도 저쪽도 유리한 법조문을 쥐었다면 누가 이길지를 예상할 수 있는 근거는 판례가 된다. 전에 비슷한 재판에서 어떤 판결이 나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

지경그룹의 법무팀장 고강도는 사장급 대우를 받는다. 그런 그가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다부진 태도로 부사장급인 부장들과 서류 검토에 집중했다.

거양자동차의 방문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당일 오후 1시 방문을 오전 9시가 갓 넘은 시간에 통보하는 것은 솔직히 치사하고 구차스럽기까지 한 짓이었다.

이미 대강 준비를 마쳤다. 게다가 이런 구차한 방법에 밀려서 언론에 핑곗거리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자존심도 걸렸다.

그러나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했더라도 혹시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들고 오지는 않을지 그것이 걱정이었다.

“팀장님.”

고강도에게 다가온 민사법 담당 부장이 서류를 펼쳐주었다.

“계약금을 지불하지 않은 계약의 위반에 관한 규정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지경자동차가 랠리에서 뒤졌을 경우, 중국은 계약 무효를 선언하고 위약금을 산정하자고 할 확률이 높습니다. 일정표를 보십시오.”

부장은 지금 펼쳐놓은 서류 한쪽의 일정표를 검지로 가리켰다.

“랠리는 사흘 뒤에 시작해서 20일 안에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계약서를 작성해야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에 관해 실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40일은 걸리는 일입니다.”

“회계법인이 산정한 금액을 토대로 위약금을 정할 텐데 이 일정과 상관있나?”

“이번 계약은 당연히 비밀유지계약이 먼저입니다. 거양자동차는 계약 내용을 밝힐 경우 거래금액의 두 배나 세 배를 배상금하자는 문구를 입력했을 겁니다.”

통상적인 요구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게 뭐가 문제가 되지?

고강도는 서류에서 시선을 들어 의아한 눈으로 부장을 보았다.

“랠리에서 패배한 뒤에 거양자동차는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겠다고 버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최후의 선택으로 계약 내용을 토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약불이행으로 법정에 계약서를 제출하는 것은 비밀유지계약 위반이 아니잖은가. 또, 비밀유지를 전제 조건으로 계약서를 제출할 수도 있고.”

“여기를 보십시오.”

부장이 손에 들고 있던 두툼한 서류를 다시 고강도의 앞에 놓아주었다.

“거양이 거래를 위반하면 관할지가 중국 법원이 된다? 우리가 제출한 계약서를 중국 법원이 공개해 버리면 우리는 꼼짝없이 두 배나 세 배의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하는 거로군.”

이제야 알겠다는 것처럼 고강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응방안은?”

“관할법원을 중국으로 하는 건 저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할 테니 회장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계속하라는 뜻으로 고강도가 오른손을 빠르게 돌려 보였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실사의 종료 이전에 승패가 갈리는 관계로 최소 산정 금액을 한화 10조 원으로 지정하는 방법입니다. 공탁 형태로 예치해놓으면 더 좋습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그런 자금을 묶어둘 이유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거양자동차가 그런 변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거는 것이 주식입니다. 경영권을 맡기라고 해도 됩니다.”

부장의 설명을 들은 고강도가 지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중국이 우리의 조건을 거부하면?”

“그 조건이 아니라면 계약서를 작성하지 못합니다.”

“회장님을 봬야겠군.”

“예, 팀장님.”

고강도는 그 자리에서 구내전화를 들고서 번호를 눌렀다.

“법무팀 고강도입니다. 회장님을 급하게 뵈어야 하는데 지금 여쭤봐 주시겠습니까?”

30초가량 기다린 다음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네도 함께 가.”

“저도요?”

“뵙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감사합니다, 팀장님.”

부장이 정말 기쁜 얼굴로 서류를 챙길 때, 고강도는 재킷을 집어 들었다.

**

집무실에 들어온 고강도가 부장을 소개한 뒤에 셋이 함께 소파에 앉았다.

“회장님. 여기 김명식 부장이 검토한 내용입니다.”

차를 받기 무섭게 고강도는 곧바로 서류를 펼쳐놓고 내용을 설명했다.

“설명은 제가 드렸지만, 이 모든 함정을 파악해낸 것이 여기 김명식 부장입니다.”

고강도의 시선을 따라 천중명이 고개를 돌렸다.

“고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큰 목록으로 정리된 서류를 다시 살폈다.

거양자동차 법무팀과의 약속이 이제 겨우 30분쯤 남았다.

“회장님. 계약서 조항에 지금 보고드린 내용에 관한 대책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끝내 고집을 피운다면 이 계약을 진행하지 못합니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진행하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럼 회의 준비를 위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인사하려는 고강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팀장님이 함께 계셔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룹의 총수 중에는 회장단 회의에서 “당신 자리에 깃발을 대신 꽂아둬도 아무 문제없어!” 라며 고함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7조 원이 넘는 리콜을 승인한 회장,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할 수 있다는 보고에도 함께해 줘서 힘이 된다고 말해주는 회장이 고마워서 고강도는 평소보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김명식 부장.”

“예, 회장님.”

그것으로 모자라 젊은 회장은 고강도가 데려온 부장의 손을 따로 잡아주었다. 아들이 물어봤다고 들었다. 아빠도 천중명 회장님을 만나보았냐고. 악수하는 김명식의 얼굴에 담긴 기쁨은 아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긴 아버지의 것이었다.

“내가 보답할 게 있나요?”

“예?”

“우리 김명식 부장에게 내가 고마움을 표시할 게 있을까 해서 묻는 겁니다.”

김명식이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을 때, 고강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뭡니까? 뭔가 있나 본데?”

천중명의 재촉에도 김명식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회장님. 김명식 부장의 아들이 회장님께서 드시는 도시락을 먹어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고강도의 답에 천중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략 10조 원에 해당하는 거래에 공을 세웠으니 도시락을 제대로 대접해야겠네요.”

“회장님. 이렇게 생각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도시락을 안 보내도 됩니까? 이 사실을 알면 아드님이 많이 서운할 것 같은데요?”

천중명의 말을 끝으로 셋이서 함께 웃었다.

계약서 작성을 앞둔 긴박한 순간에 보기 어려운 여유였다.

고강도와 김명식이 집무실을 나서고, 한 시간쯤 서류를 살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나야. 어제 늦게 평창동에 도착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해?”

- 아버지께서 모처럼 휴일인데 전화하면 달려올지 모른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어.

“여행은 어땠어?”

- 고맙다.

질문과 전혀 다른 답이 있었는데 천중명은 잠자코 있었다.

- 조카들을 보살핀다는 말 들었어. 오늘은 그 녀석들 만나보고 내일 오전에 회사에 나갈까 하는데 시간 어때?

“그래. 그리고 근처에 윤 실장 있을 거야. 만나서 진심으로 사과해.”

- 그러려고. 내일 오전 10시쯤 괜찮아?

“알았어.”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사람이란 게 참, 변하기는 어려운 데 또 이렇게 한순간에 변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

다카르 랠리를 위한 출발이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에 지경리온자동차의 모든 직원이 본사 건물 앞으로 나왔다. 고생했던 연구원들이 드라이버와 악수를 나누거나 어깨를 두들기며 응원했고, 한쪽에서는 생산직 직원들이 스마트 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신상훈은 먼저 추일원과 양서평, 조양회 일행 앞으로 움직였다. 신상훈과 양서평, 조양회는 베이스 기지로 이동하고, 추일원 일행은 트럭을 타고 일정을 함께 한다.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상훈이 추일원을 비롯한 대원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눈 다음이었다. 이번엔 양서평이 조양회를 대동하고 추일원의 앞에 섰다.

“이런 싸움에 뒤로 물러나 본 적이 없어서 갑갑한데 회장님의 지시여서 따릅니다. 잘 부탁합니다.”

양서평의 의지를 조양회가 우리 말로 전해주었고, 양쪽이 모두 단단한 얼굴로 악수를 나누었다.

“우와-!”

짝짝짝짝짝짝짝짝!

신상훈이 트럭의 앞으로 나서자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트로피를 가지러 갈 시간입니다.”

파크 피터슨이 내미는 지경리온자동차의 깃발을 신상훈이 받아 들었다.

시작이다, 15일간의 랠리가.

리온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노력할 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회장님. 출발합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우승트로피를 들고 오겠습니다.

깃발에서 고개를 든 신상훈이 먼저 직원들을 천천히 돌아보았고, 다음으로 파크 피터슨과 연구원들, 그리고 이미 트럭에 올라가서 대기하는 드라이버와 추일원 일행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신상훈이 깃발을 위로 드는 순간이었다.

부르릉! 부르릉! 브르르릉!

세 대의 트럭이 시동을 걸었다.

펄럭! 펄럭!

신상훈이 깃발을 좌우로 휘두른 직후에,

크르르릉! 크르릉! 크르르릉!

세 대의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리를 가져와!”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지켜보던 직원들이 승리를 기원하는 고함과 함께 손뼉을 쳐주었다.

**

오후 1시에 지경그룹 본사를 방문한 다섯 명의 거양자동차 법무팀은 김명식의 예상대로 비밀유지계약서의 작성을 요구했다. 모든 계약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라 사실 이걸 거부하면 명분이 저쪽으로 넘어간다.

언론이 어떻게 떠들지는 모르지만, 지경그룹이 공연한 트집을 잡았다는 핑계를 만들 수 있었다.

고약하게도 거양자동차는 중국 기자들과 함께 방문해서 홍보실 직원들이 별도로 상대하게 하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었다.

귀에 통역을 위한 이어셋을 건 고강도가 맞은편에 앉은 거양자동차의 법무팀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기업 간의 계약에서 단순한 비밀유지계약서로는 이후에 발생할 우발적인 상황을 예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신가요? 계약에 앞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인데 다른 대안이 있으시다면 말씀하십시오.”

앞니가 두드러진 상대방이 잇몸이 훤히 드러나는 모습으로 웃으며 여유를 보였다.

“이번 계약의 발단부터 짚겠습니다. 우리 지경그룹이 제안했고, 거양자동차그룹이 이에 응답했습니다. 그 순서대로 계약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계속 말해보라는 투로 상대방이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이미 공개된 내용입니다. 기자들을 동행하신 것을 보면 거양자동차도 그렇게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러지?

상대방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우리 지경그룹 역시 비밀유지계약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이 모든 계약을 공개로 돌리면 어떻겠습니까?”

상대방이 함께 온 동료들을 돌아본 직후였다.

“오늘 비밀유지계약을 철회하는 것을 함께 온 중국 기자분들에게 먼저 발표할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이번엔 또 뭐지?

상대방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관할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국과 중국의 기업이 거래를 합니다. 문제는 지경리온의 소재지가 스웨덴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세 개 나라의 법을 모두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제3의 법원을 지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지경리온은 지경그룹의 소유로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경리온의 소재지가 한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비밀유지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과 관할지를 제3의 장소로 한다는 사실을 제안하고, 이 내용을 중국 기자에게 먼저 전할 예정입니다.”

말문이 막힌 상대방이 고개를 비틀고서 고강도를 노려보았으나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한국의 법은 가장 기본적인 절차조차 지키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중국의 책임자가 꺼낸 도발적이고 무례한 질문이었다. 부장들의 기대하는 시선 앞에서 고강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본적인 절차를 지키자는 의견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다면 비밀유지계약의 전제조건으로 이 계약을 체결할 양 당사자의 책임을 증명하기 위해, 한화 10조 원 또는 동일한 금액의 대주주 지분을 공탁할 것을 요청합니다.”

상대방이 당황한 것을 본 고강도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께서는 이미 결재하셨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안을 제출하기 위해 약속마저 일방적으로 정한 거양자동차 측이 그 정도의 기본을 모른 채 오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고강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에 힘을 꾹 준 김명식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 참 무섭다.

고강도의 어깨에 걸린 저 사명감, 그리고 그의 눈에 달린 저 자부심을 만들어내다니.

그가 볼 때 이 계약은 이미 끝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 또한 지경그룹의 완벽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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