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243. 거절하겠네! (2)
지경화재보험 리스크관리팀의 팀장은 오전 9시 30분에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네, 리스크관리팀 팀장 정윤옥입니다.”
- 안녕하세요? 팀장님. 천중명 회장님 부속실입니다.
“네?”
- SNS에 도시락 관련한 게시물을 보시고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내용을 전해드립니다. 날짜와 인원을 알려주면 그 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팀장 정윤옥은 눈만 껌벅였다.
- 대송그룹의 일이 있어서 너무 요란하게 자랑하지 않았으면 하신다는 말씀과 이 도시락 비용은 회장님 사비로 지불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언제가 편하시겠습니까?
정윤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날짜만 정해서 알려드리면 되나요? 저희 직원 수하고요?”
- 그렇습니다, 팀장님. 이 번호로 알려주시면 됩니다.
“30분 내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정윤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중! 잠시만 여기 봐요!”
그녀의 고함에 칸막이로 나눠놓은 자리에서 직원들이 몸을 일으켜 정윤옥을 바라보았다.
“회장님께서 우리가 SNS에 올린 글을 보셨다는 연락이 있었어요.”
정윤옥이 짐짓 엄한 얼굴로 둘러보자 사무실에 훅 침묵이 깔렸다.
“지금 회장님 부속실에서 직접 전화를 받았는데…….”
혹시 문제가 생겼나 싶은 생각에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정윤옥을 살핀 직후였다.
“날짜와 인원수를 알려드리면 도시락을 보내주신대요!”
“예?”
“회장님 사비로 우리 도시락을 보내주신답니다! 부속실에서 전화해서 알려주신 내용이에요!”
“와아-!”
“꺄아아-!”
멀리 갈 거 뭐 있나? 오늘 먹자.
고작 5분 만에 모든 결정이 끝났다.
기뻐하는 직원들의 얼굴을 회장님께 전해주자는 의견에 다들 찬성이었으나 분위기상 요란스럽게 하지 말라는 주의가 있었다.
결국, 남자직원들은 머리 위로 하트를, 여직원들은 엄지와 검지를 붙인 단체 사진을 부속실에 보내는 것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하기로 했다.
**
그 시간에 천중명은 집무실에서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두 번쯤 간 뒤였다.
- 여보세요?
늘 투박한 천호득의 대꾸가 있었다.
“아버지. 중명입니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 바쁜 회장이 그게 궁금해서 전화했어?
“너무 오래 계시니까 걱정도 되고, 뵙고 싶기도 해서 그렇죠. 언제 서울에 오세요?”
창을 향해 의자를 돌린 천중명의 질문이 기쁘고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 많이 힘들지?
전에 없이 다정한 천호득의 반문이 넘어왔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형하고만 너무 지내시는 것 같아서 그게 가장 서운합니다.”
- 흐헤헤헤헤.
“건강하신 것 같으니 됐습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둘러보고 오세요.”
마지막에 ‘그래.’ 하는 한 마디 전하면 오죽 좋으련만 천호득은 대꾸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픽 웃은 천중명은 의자를 돌려 보고서에 집중했다.
**
양서평과 조양회가 대원들과 합류했다.
호텔에서 인사를 나눴고,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공항에서 보았다고 그나마 크게 어색하거나 낯설지는 않았다.
“회장님께 말씀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양회를 통해 대원들은 가등섭이 어떤 인물인지와 그가 보낸 열다섯 명에 특수부대를 나온 이들이 포함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양서평과 조양회를 함께 만난 신상훈이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상황을 챙겼고,
“사장님. 죄송한데 산악용이나 군용 나이프를 구해주실 수 있습니까?”
우두머리인 추일원의 부탁을 받고는 여러 종류의 나이프를 준비해 왔다. 호텔 객실의 테이블에 열 종류쯤 되는 나이프를 살피던 대원이 그중 하나를 들어서 추일원에게 내밀었다.
“이거 어떠십니까?”
“무게가 아쉬운 것을 빼면 쓸만하다.”
추일원은 등 쪽이 톱날처럼 파인 나이프와 양쪽 모두 날이 서 있는 나이프, 두 개를 테이블 한쪽으로 빼놓았다.
“사장님. 톱날이 없는 거로 한 사람당 두 개씩 준비했으면 싶은데 수량이 모자라면 톱날 있는 것을 포함해서라도 꼭 두 개씩, 그리고 여분 두 개해서 모두 열여섯 자루를 부탁드립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 될까요?”
“아프리카에서 총을 구할 생각도 해봤는데 어차피 저쪽도 랠리 도중에 총을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같은 생각인지 신상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마 길을 막고서 사고를 유발하거나 그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신상훈은 나이프가 보일 때마다 가슴이 떨리는 눈치였다.
“랠리 영상 보니까 홀로 떨어졌을 때가 위험할 것 같은데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원이 부족한데 정말 괜찮을까요?”
“믿으셔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랠리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추일원의 다짐과 대원들의 눈빛을 본 신상훈이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이는 얼굴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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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커다란 정복 차림의 흑인에게 끌려 법정에 들어선 윤세계의 눈에 한국에서 온 기자들이 들어왔다.
주황색 죄수복에 부스스한 머리와 얼굴이 수치스러웠는데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피고인석에서 기다리던 변호사가 윤세계를 향해 고개만 살짝 숙였을 때였다.
“기립!”
누군가 외치자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고, 섬뜩한 느낌의 재판정으로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백인 남자가 들어왔다.
“앉으세요.”
또다시 우르르 앉았다.
윤세계는 그제야 처음 보는 동양인 남자가 왼쪽에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본 법정은 통역을 통해 피고에게 사실 확인과 판결을 통보합니다.”
왼쪽에 앉았던 남자였다.
그가 윤세계에게 판사의 말을 전해주었다.
“피고인 윤세계 씨. 일어서세요.”
판사가 윤세계를 불렀다. 통역이 전하는 말과 변호인의 눈짓을 받은 윤세계가 겁에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 다음이었다.
“검찰과 합의한 대로 감형 없는 37년을 선고합니다.”
고작 한 마디였다.
그 말을 마친 판사가 망치를 들어 한 번 내리친 것으로 재판이 끝났다. 변화는 없었다. 윤세계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기적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부스스한 머리, 창백한 얼굴, 비쩍 마른 몰골의 윤세계는 그렇게 37년의 형을 받았다.
어떻게 법정을 나섰는지 언제 버스에 올랐는지 모를 정도로 멍했던 윤세계는 교도소로 돌아가는 호송 버스 안에서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혹시 교도소를 옮길 때 한 번쯤 더 볼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37년, 윤세계의 나이 67살이 되어야 저 풍경을 다시 본다.
길을 걷는 사람들, 상점, 길가에 파는 핫도그, 커피, 그리고 햄버거 가게, 지금 저렇게 살 수만 있다면, 아니 저보다 못한 환경에서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수갑 찬 손등으로 닦아낸 윤세계가 악착같이 버스 바깥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아버지. 비자금 그냥 돌려주지 그랬어요?
천중명 회장과의 약속을 지켰으면, 그냥 리콜하고 보상했으면, 지금도 나는 청담동에서 머리하고 백화점 들렀다가 맛있는 거 먹으며 살았을 텐데요.
우리가 살아왔던 모습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봐요.
아버지도 구속되셨다니 살아서 못 볼지도 모르겠네요.
잘 있어, 세상아.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37년 뒤에 보자.
그녀를 태운 버스가 교도소 앞에 도착할 때 윤세계는 가슴이 떨릴 정도로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
점심을 먹은 뒤에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
천중명은 그와 함께 소파에 앉았고, 차도 앞에 두었다.
“이번에 대송의 주식 인수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소문을 타고 고객들이 몰려들어서 예치금과 수익률이 크게 오른 효과도 있었습니다.”
천중명은 그와 함께 10분쯤 대송그룹의 인수와 임시주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송 회장님. 외환 거래의 규모를 키울지 모릅니다. 전에 말씀드렸는데 준비는 어떻습니까?”
그런 뒤에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외환 딜러 세 명을 부사장급으로 스카우트해서 딜링룸을 강화해 놓았습니다.”
“좋네요. 정확한 시기를 확정하기는 어려운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예, 회장님.”
아직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천중명이 따로 불러서 딜링룸의 상황을 챙겼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 송문철은 질문을 내놓지 않았다.
대송자동차그룹의 적대적 인수, 대송그룹의 인수를 함께 진행하면서 천중명의 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한 눈치였다.
“송 회장님. 우리 둘만 아는 일로 하고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이번 외환거래가 지경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준비하셨습니까?”
규모가 큰 건가, 송문철의 눈에 담긴 의문을 본 천중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적게 끝나면 다행이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200조 원 이상 들어가는 거래가 됩니다.”
“꼭 그 정도로 거래를 하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금융감독원에서 가만있지 않을 테고, 손실이 크게 발생하면……, 그러니까 그룹에 타격이 올 정도가 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설마 했던 송문철은 200조 원 이상이라는 거래금액을 듣고는 결국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번 거래는 철저하게 제가 지시했다고 하세요. 그래서 일정 시점이 되면 내가 딜링룸에 나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본사에 딜링룸을 개설할 수 있고요.”
“회장님? 왜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시면서 거래를 추진하십니까?”
지경리온자동차, 대송자동차그룹을 인수했고, 주식보유만 놓고 보면 대송그룹도 인수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을 완성한 천중명이 이토록 무리한 거래, 그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외환거래를 수백조 원대로 할 이유가 있을까?
“회장님. 외람된 말씀입니다. 지금 규모만 지켜도 우리 지경그룹은 앞으로 100년 정도 문제없다고 자부할 정도입니다. 딜링룸을 보강했다고 꼭 그런 거래를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놀라는 송문철을 향해 천중명이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송문철은 젊은 회장의 웃음이 어쩐지 씁쓸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송문철 회장님. 두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송문철은 정신을 바싹 차린 얼굴로 천중명의 말을 기다렸다.
“외환 위기를 겪으셨을 세대이니 잘 아실 겁니다. 그때 국민이 걷어준 금붙이로 살아난 기업들이 대한민국에 한둘이 아닙니다. 대가는 아예 없었습니다. 이자는커녕 원금도 바라지 않은 채 셀 수 없이 많은 분들이 아이들의 팔목과 손가락에 걸려있던 금을 모아주었습니다.”
송문철이 직접 본 장면들이었다.
연일 ‘금 모으기 운동’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TV에서 생방송으로 노인들의 닳고 닳은 가락지까지 거둬들였다.
“그렇게 살아난 기업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계약직, 비정규직, 쉬운 해고를 위해 애썼고, 일반가정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싼 전기를 이용해 배를 불렸습니다.”
이게 지금 무슨 말이지?
도대체 왜 이 순간에 이런 말이 나오지?
“그분들이, 그분의 자녀들이 다시 같은 위기에 빠지는 것을 알았다면, 기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기회를 노려서 큰돈을 벌어야 하나요? 아니면 위험하더라도 위험을 막아야 할까요?”
“회장님? 제가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반항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해 갑갑한 표정에서 나온 송문철의 질문이었다.
“돌 반지, 팔찌를 내놓았던 그 아이들이 비정규직에 몰려 있는데 또다시 거대자본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걸 막으려 합니다.”
입이 벌어진 줄도 모른 채 송문철은 멍한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그널이 점점 붉은색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나는 지경그룹의 모든 것을 걸고라도 국민의 기업이 어떤 것인지, 기업이 사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도전하려고 합니다.”
고개를 떨군 송문철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고, 어찌 보면 예의를 잃은 행동일 수 있었다. 숨을 길게 내쉰 송문철이 그나마 표정을 수습한 얼굴을 들었다.
“거대자본의 위기에 관해서는 금융권에 말이 돌곤 합니다. 회장님께서 이리 말씀하실 정도라면 어느 정도 확신하신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까 당황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송문철은 그사이 차분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제가 제 자리를 걸고라도 이번만은 참아주십사 조언 드려도 되겠습니까?”
천중명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천억 원쯤 빼놓으시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안 되겠습니까?”
아까와 비슷한 미소를 보인 천중명이 또다시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렇다면 말씀하신 거래를 담당하는 증권사의 수장인 제 책임으로 하는 것은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천중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송문철이 얼핏 인자해 보이는 느낌의 미소를 그려냈다.
“금융권에 있으면 돈의 단위에 무뎌지고 무감각해집니다. 딜러들도 비슷해서 몇십억 원을 별거 아니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그런 뒤에 욕심이 생깁니다. 편법으로라도 그런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때가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절대자를 향한 고백처럼 송문철이 속에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는 가족들이 살 수 있을 정도는 벌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벌게 된 계기가 외환 위기가 닥쳤을 때, 금을 모아준 분들 덕분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송문철이 숨을 짧게 내쉬었다.
“준비를 철저히 해놓겠습니다. 그리고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저 혼자만 알고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지경그룹을 이끌어주셔서, 계열사 회장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신 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이 든 계열사 회장이 붉어진 눈을 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