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241. 너희도 마찬가지야 (2)
다카르 랠리 관련 보고서, 대송그룹 정상화 방안, 대송자동차 리콜 논의, 천중명은 오늘 하루도 19개의 계열사에서 올라온 서류를 검토했다.
오전 8시에 출근해서 퇴근은 대략 자정 근처였다.
그냥 자기 아까워서 이러다가는 아침에 급하게 식사하고 튀어나가기 급해서 천중명은 자정이 넘은 시간에 허선영과 홈바에 마주 앉았다.
“내가 직장을 그만둘까 봐요.”
“왜? 무슨 일인데?”
“중명 씨가 너무 힘들어하는 데다 시간도 부족하니까 내조도 하고, 또 가끔은 회사로 가서 함께 도시락도 먹을까 해서요.”
멜론을 먹던 천중명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가 일요일 오후는 반드시 쉬도록 일정을 짜볼 테니까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
“힘들지 않아요?”
“지금은 틀을 잡는 기간이니까. 그리고 이 틀이 내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으로 굳어질 때까지야. 직원을 아끼는 기업, 그리고 그 직원이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정직한 기업, 거기까지만.”
“난 평생 일요일 오후만 기다리다가 이렇게 늙어버릴 거야.”
허선영이 눈 끝을 아래로 늘어트리는 모습에 함께 웃었다.
“아, 중명 씨. 이거 못 봤죠?”
그런 뒤에 허선영은 스마트 폰을 들어서 SNS를 액정에 올렸다. 상체를 기울인 천중명은 화면에 시선을 주었다.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든 남녀 직원 십여 명이 우르르 몰려 찍은 사진 아래로 글도 적혀 있었다.
[우리 부서도 도시락 먹고 싶습니다! 도시락 사주시면 야근 기운차게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회장님!]
천중명과 같은 나이 또래로 보였다. 그리고 뒤편에는 심지어 팀장급으로 보이는 서른 후반에서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도 있었다.
“중명 씨를 좋아하고 아끼는 게 느껴져서 정말 좋았어요.”
“어디야?”
“지경화재보험이라라던데요. 중명 씨가 다녀간 뒤로 미화 직원분들에게 김치나 마른반찬, 간식을 가져다주는 직원들이 꽤 있나 봐요.”
“부서는?”
스마트 폰을 내린 허선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정말 도시락 선물하려고요? 잘못했다가는 전 계열사에서 신청 들어올 텐데요?”
“청소하시는 분들을 그렇게 챙긴다면 내가 말한 걸 지킨다는 뜻이잖아. 그 점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한 달에 한 곳 정도 정해서 도시락 사면 좋지 않을까? 고생한 계열사 팀이나 그런 곳에. 사비로 사도 좋고.”
허선영은 괜찮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내일 비서실이나 기획실과 의논해보고 결정하지.”
“그래요. 이제 들어가요.”
천중명을 살핀 허선영이 과일 접시를 치웠다. 아무리 체력이 있더라도 새벽이 되자 눈이 충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천중명은 오전 8시에 집무실에 들어섰다.
먼저 컴퓨터를 켰고, 다음으로 전화 메모를 확인했으며, 마지막으로 부속실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셨다.
잠시 비서실에서 추려놓은 오늘의 사건 사고를 확인할 때였다. 어제 허선영이 말해주었던 SNS 내용과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중으로 넘기고.
천중명은 몇 가지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참조하며 30분쯤을 보낸 뒤에 서류를 살폈다.
이제는 노하우도 제법 쌓여서 결재서류와 보고서를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꽤 줄어든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가장 먼저 대송자동차그룹의 리콜 계획서를 펼쳤다. 비용이 7조 원이 넘는 리콜에서 혹시 문제는 없는지를 살피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추 두 시간이 흐른 뒤에 천중명은 서류에 이름을 적어넣었다.
“후-.”
오늘 해야 할 가장 큰 숙제를 마친 느낌이었다.
고개를 든 천중명은 잠시 쉴 겸, 인터폰으로 손을 뻗었다.
[네, 회장님.]
“잠깐 볼 수 있을까?”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인터폰에서 손을 뗀 천중명이 상체를 세울 때 노크와 함께 서른 중반의 부속 직원이 들어왔다.
“어제 지경화재에서 SNS에 도시락을 먹고 싶다고 적었던데 그걸 보내줘도 괜찮을까?”
“직원들이 무척 기뻐할 일이지만, 역기능도 생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 달에 한 곳 정도, 부속실에서 정해주면 어떨까 싶어요. 업무가 힘들었던 부서라든가, 관심이 집중된 부서라든가. 도시락 비용은 내가 개인적으로 지불하는 거로 하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굉장한 권력을 주셨습니다.”
“혹여 말이 나온다거나 부작용이 생기면 바로 알려줘. 가까이에 있는 그룹발전본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은 거니까. 그리고 지방에는 도시락을 어떻게 보내지? 이왕이면 같은 품질로 부탁하고 싶은데?”
“확인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부탁할게. 우선 지경화재보험에 연락해서 직원들과 의논해봐요. 오늘은 아무래도 시간이 이래서 보내기도 어렵고, 그쪽도 이미 약속을 잡은 직원이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나가고 나자 천중명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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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도착한 대원들을 신상훈이 직접 나가서 맞았다. 짧은 인사를 마친 일행은 준비했던 버스에 올라타고 지경리온자동차를 향해 움직였다.
비행이 힘겨울 만도 한데 일곱 명 모두 눈이 부리부리하게 살아 있었고 그런 점이 신상훈은 묘하게 안심되었다.
중국의 삼합회를 상대할 사람들이라고 해서 껄렁댈 줄 알았다. 그런데 검게 탄 얼굴, 날카로운 눈매, 단단한 몸을 가진 일곱 명은 신상훈을 무척이나 조심하는 눈치였다.
공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견학 코스를 돌았고, 다음으로 가볍게 식사를 함께했다.
“사장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때문에 시간을 너무 허비하시는 거 아닌지 걱정됩니다.”
“오늘은 스케줄을 조정해 놓아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식사를 마치면 일정표를 드리고 베이스 기지가 표시된 지도를 드릴 겁니다. 그 뒤에 이동할 트럭을 보시고요. 내일은 드라이버, 스태프와 인사하고, 오프로드 주행을 함께할 생각입니다.”
일정을 설명하는 동안 대원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신상훈은 분명하게 보았다.
“걱정되는 것은 650킬로미터를 15일간 주행해야 하는 점입니다. 헬리콥터로 이동하는 스태프는 그나마 좀 낫지만, 트럭으로 이동하는 분들은 정말 힘겨울 겁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어지간하면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할 텐데 남자는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신상훈은 오히려 염려와 걱정이 훌훌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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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를 마주한 윤세계는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윤병지 회장이 마지막이라도 제대로 일을 풀어보자고, 힘들겠지만 그렇게 하자는 말씀을 전해달라셨습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정말 대송그룹이 삼촌에게 넘어갔나요?”
“정확하게는 지경그룹에 넘어갔다고 보셔야 합니다.”
“흐윽!”
변호사의 답변을 듣기 무섭게 윤세계는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트렸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에게 제 말을 전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변호사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내가 이곳에서 재판부와 협상하면 아버지는, 윤성일 회장님은 어떻게 돼요?”
“윤세계 씨. 이미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윤성일 회장과 윤세계 씨는 처벌을 받습니다. 현명하게 처신하느냐, 끝까지 버티다가 죽어서 이곳을 나오느냐의 차이만 있습니다.”
“흐으으!”
섬뜩한 조언에 놀라서 터진 울음처럼 보였다.
하루가 지옥 같을 이곳에서 죽어서야 나온다는 말을 들었으니 오죽하겠나. 그러나 잘못된 희망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면 남는 것은 최악의 결과밖에 없었다.
“변호사님! 나 좀 살려주세요! 내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잖아요! 왜 이렇게,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죄를 짓고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윤세계 씨는 1억 원씩을 50만 명에게 나눠줄 돈을 빼돌려서 감췄습니다.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할 텐데 뭐하러 그런 일을 했습니까.”
“나는 그냥 지시만 받고 왔어요! 그게 전부예요!”
“그러니까 있는 대로 털어놓고 조사해서 압류하기 전에 내놓으세요. 그러면 형이 줄어듭니다.”
울음을 터트린 윤세계를 변호사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죄송합니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어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시계를 들여다본 변호사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게요. 진술. 협상해주세요.”
그리고 그 직후에 윤세계가 답을 내놓았다.
“협상을 시작했다가 번복하면 오히려 불리해집니다. 사인하시겠습니까?”
다시 자리에 앉은 변호사가 가방에서 서류를, 재킷 안쪽에서 펜을 꺼내 윤세계 앞에 놓아주었다.
“어디에 하면 돼요?”
한글과 영문으로 된 서류였다.
변호사가 검지로 두 곳을 가리켰고, 윤세계가 이름을 적어넣었다.
“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변호사의 말을 듣는 순간, 윤세계는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
검찰 출석을 해결한 윤성일은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얼굴이었다.
“병지 이놈을 어떻게 하지?”
그는 고개를 돌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안소곤을 보았다.
“천 회장에게 매달리셔야 합니다.”
“전화를 안 받잖아! 전화를!”
안소곤의 대꾸를 들은 그는 곧바로 벌컥 분노를 터트렸다.
천중명은 무섭다.
임시주총까지 45일의 시간을 벌 수 있었는데 윤병지를 내세워서 그 길을 꽉 막아버렸고, 그만큼 윤성일은 앞뒤가 꽉 막힌 상황이었다.
“미국 쪽도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아하! 이 사람! 아비가 죽게 생겼는데 자식이 일단 뒤집어써서라도 그쪽에서 시간을 벌어야지! 내가 아무렴 그걸 그대로 두겠나?”
“회장님.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하실 게 아닙니다. 미국에서 죄를 인정하는 순간이면,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내가 비자금을 만들었고, 그걸 빼돌리라고 시켰다, 이렇게 진술하라는 건가? 그래?”
“그렇게라도 해서 국내에서 책임지는 모양새를 만들고, 윤세계 양을 데려올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정말 미국에서 100년이 넘는 형을 받게 됩니다.”
“푸후!”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안소곤을 향해 윤성일이 뜨거운 숨을 뿜어냈다.
“내가 대송그룹을 되찾아 오면 한 달 안에 그 아이를 이리 데려올 거고, 1년 안에 사면받아서 옆에 앉힐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대송그룹을 다시 찾아올지 방법을 찾아! 지금은 그게 우선이야!”
윤성일이 독기 가득한 눈으로 버럭 고함을 질렀고,
“회장님! 충심에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제발 제 말을 들으시고 국내에서 해결해야 병보석이든, 가석방이든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안소곤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평소와 다르게 달려들었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우세환 기획실장이 들어왔다.
윤성일과 안소곤이 의아한 눈으로 볼 정도로 그는 죽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회장님.”
고개를 든 우세환의 동태처럼 죽어버린 눈이 무섭게 느껴져서 윤성일은 재촉도 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윤세계 전 대표가 죄를 시인했습니다. 회장님이 지시하셨다고 진술했고, 탑승권과 호텔 예약을 그룹 비서실에서 했다는 내용과 심지어 현지 주재원을 배정받았다며 직급과 이름까지 모두 진술했습니다.”
“변호사는! 그쪽 변호사 놈은 뭐라고 그래!”
“변호사가 권했답니다. 진술하고 형을 줄이자는 쪽으로.”
털썩.
안소곤이 병실 의자에 커다랗게 주저앉았다.
“다 끝났어. 모두. 우리 모두.”
그의 넋두리 같은 혼잣말이 병실을 떠돌았다.
**
집무실에 들어온 유진교가 무거운 얼굴로 책상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미국에서 윤세계 전 대표가 모든 것을 진술했다는 보고입니다. 검찰에서는 윤성일 회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병원에 진단서류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전했다고 합니다.”
“보도는요?”
“내용 없는 속보로만 나왔습니다. 30분에서 한 시간 안에 방송에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정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내려가 있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유진교가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몸을 일으킨 천중명은 유리를 향한 자세로 책상에 걸터앉았다.
처음 코리아클럽에서 보았던 윤세계가 떠올랐고, 다음으로 삼중호텔 VIP 라운지에서 자신감 넘치던 모습도 생각났다.
이게 시작일 거다, 윤세계.
앞으로 어떤 재벌가든 잘못됐던 걸 바로잡지 않고 버티면 모두 너처럼 될 텐데 하필이면 네가 가장 앞에서 가장 미련한 방법으로 버텼던 거지.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자본. 너희도 마찬가지야.”
집무실을 둘러본 천중명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