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239. 뭔가 더 놀랄 일이 있는 것 같다 (2)
정말 길었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벤처사업부의 옥상에 올라간 곽대출은 도깨비들과 벤치에 둘러앉았다.
“스웨덴 공항에 신상훈 총괄사장님이 직접 나오신다니까 조심해서 대해. 기업이라는 조직과 문화에 적응해 보자. 그래야 우리도 남들처럼 한번 살아보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우두머리가 일행을 대표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내일부터 정직원으로 올릴 거니까 호칭도 연습해.”
곽대출의 지시에 다들 어색한 표정이었다. 여태껏 선배님이나 형님으로 지내다가 느닷없이 본부장이라고 부르려니 어딘가 멋쩍어서였다.
“여권들 잘 챙겨라. 괜히 공항에 도착해서 있느니 없느니 하지 말고. 그리고 비행기 타기 전에 신발들 꼭 벗고.”
“설마 저희가 그런 말에 속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그런데 선배님. 아니 본부장님. 왜 손이…….”
커피잔을 든 곽대출의 손을 우두머리가 살폈다.
“기력이 달리시는 거 아닙니까?”
“야, 이 씨! 기력이 달리긴 누가 달린다고 그래! 어제! 그거 뭐야! 그래! 운동! 그걸 좀 요란하게 해서 그래!”
도깨비 출신이 운동 좀 했다고 팔이 떨린다고?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였다.
“본부장님?”
옥상의 문으로 박승양이 나타났다가 흠칫하고는 둘러앉은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가 봐.”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우르르 일어선 남자들이 곽대출과 박승양에게 차례로 인사하고는 옥상을 내려갔다.
“다들 어딜 가시나? 복장이 깔끔합니다?”
“차 드릴까요?”
“내가 탑니다.”
박승양은 곽대출에 앞서서 문 옆의 상자를 열고는 능숙하게 믹스 커피를 만들었다.
“하! 전망은 정말 좋아요!”
너스레를 떨며 다가온 박승양이 곽대출의 옆에 앉았다.
“발표 보셨지? 우리나라에서 해볼래, 하니까 중국에서 대번에 오냐, 해보자, 하고 나선 발표?”
엄지와 검지로 종이컵을 잡은 박승양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셨다.
“솔직히 우리 천 회장님의 그릇이 너무 커서 나 같은 사채업자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지금은 정말 짐작조차 안 갑니다.”
뺀들거리는 이마에 저녁노을을 받은 박승양이 고개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기껏 대송을 먹어놓고 윤병지 회장에게 맡긴 것도 그렇고, 중국 자동차 회사에 터무니없는 제안을 내놓은 것도 그렇지요.”
후루룩, 그는 마치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또다시 커피를 요란하게 마셨다.
“내가요. 전에 홍콩물고기 라는 어류와 돈을 놓고 싸울 때요. 간이 쪼그라들어서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중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진한 돈 냄새가 진동한다는 겁니다. 환장하지요. 이런 냄새를 맡으면.”
곽대출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쏟아내면서도 박승양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청국장 아시지? 청국장? 끓이면 온 집안에 고린내가 펄펄 나는데 막상 한 숟갈 먹어보면 또 이게 입에 척척 감기거든요. 돈 냄새는 그런 겁니다.”
연극 무대에 오른 주인공의 독백처럼 말을 뱉어낸 박승양이 고개를 돌렸다.
“이 진한 돈 냄새의 원인이 뭔지를 알아야 내가 잠이라도 편히 잘 것 같습니다. 심복 본부장님은 알 것 아닙니까?”
길었던 독백의 끝에서 박승양은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회장님이 예전부터 좀 특별하긴 했습니다. 동물적인 감각은 정말 최고였지요.”
언제? 어디서?
박승양이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서 곽대출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이겨보려고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뒷말을 삼킨 곽대출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나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겁니다. 그런데 미치는 건, 그런 회장님이 한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손을 안 놓는다는 겁니다.”
“크흑!”
감동을 이기지 못한 박승양의 탄성이 요란하게 옥상에 울려 나왔다.
“이번에 대송도 그냥 삼키면 끝입니다. 그런데 윤병지 회장을 내세운 거?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삼합회 출신이라는 부담을 안아가며 조양회라는 양반을 임명하신 거? 그 이유도 모릅니다.”
멀리 있는 노을을 향해 말하는 것처럼 곽대출은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는 알 것 같습니다. 아니, 믿습니다. 회장님께 틀림없이 나는 상상하지 못 하는 계획이 있으시다는 거. 그리고 그 계획의 가장 앞에 아끼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거.”
“두 가지인데? 산수를 못하시나?”
곽대출이 뭔 소리냐는 투로 고개를 돌리자,
“아니 뭐, 내가 숫자에 민감하다 보니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요.”
박승양이 얼른 말을 돌렸다.
“뭔가 원대한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그럼요.”
“우리를 빼놓지는 않으시겠지요?”
뭐래, 하는 곽대출의 시선을 받은 박승양이 하늘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아차! 내가 또 이런다! 우리 심복 본부장님이 벤처사업부를 맡으셨잖아. 내가 아이템은 괜찮은데 경영이 안 되는 회사들을 추려왔지요. 이걸 죄 인수하셔서 살려놓으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심 가득한 곽대출의 눈초리를 마주한 박승양이 서운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뭐, 나한테 돈을 빌려 간 인간들도 좀 있고.”
곽대출의 시선은 그래도 풀리지 않았다.
“사실은 다 나한테서 돈을 빌려 간 인간들이긴 하지요.”
그제야 박승양은 진실을 토해냈다.
**
천중명의 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룹발전본부도 마찬가지였다. 대송그룹으로 지원 나간 회계팀과 법무팀의 보고, 대송그룹의 계약직과 파견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비용, 그 외에 지경그룹 계열사를 포함해 보고는 끝이 없었다.
“회장님.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전 6시 이전에 출근해서 12시간 가까이 자리를 지킨 부속실 직원이 집무실로 들어와 건넨 질문이었다.
“그룹발전본부에 도시락을 지원하고 싶은데 본부장 저녁 일정이 있는지, 발전본부에 도시락을 먹을 인원이 몇 명인지 확인 좀 부탁해.”
“예, 회장님.”
“아, 잠깐만!”
고개 숙이는 부속실 직원을 천중명이 불렀다.
“부속실도 포함하지? 저녁은 내가 사는 거로.”
“감사합니다, 회장님.”
“오늘처럼 근무하면 분명하게 돌아가면서 쉬는 거 맞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부속실 직원이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돌아섰다. 아직 확인하고 살펴야 할 보고서가 잔뜩 남아서 오늘도 10시 이전에 본사 건물을 나서긴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우리 회장님께서 사비로 사주신 도시락]
부속실 전원, 그리고 그룹발전본부는 외근 나간 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도시락을 함께 먹겠다고 신청했는데 그 도시락 사진과 밥 먹는 모습이 SNS를 통해 올라왔다.
[나도 야근하고 싶다.]
[저런 도시락을 사주면 회사에 뼈를 묻을 것 같다.]
[젠장! 편의점 도시락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처음 반응은 부럽다는 것이었고,
[저렇게 회장이 함께 밥 먹으면 무서울 듯.]
[퇴근은 꿈도 못 꾸겠다.]
[보여주기 식 쇼 아냐?]
이어서 거부감 담긴 반응도 꽤 있었다. 어지간하면 기사에 한두 개쯤 나올 해프닝이었는데 최근 언론사에 그런 여유는 없었다.
**
신이 있다면 아마 기자들을 과로로 쓰러트리겠다고 작정한 듯한 한주였다.
[윤성일 회장이 검찰에 출두했습니다.]
흥분한 기자의 음성을 배경으로 모자에 마스크, 환자복, 그 위에 담요를 덮은 윤성일이 휠체어를 탄 채 검찰청에 들어서는 모습이 화면에 담겼다.
비키라는 고함, 기자들의 질문이 뒤엉킨 한가운데를 뚫고서 윤성일은 검찰청에 출두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20분도 되지 않아 구급차가 들어가서는 이동용 침대에 누운 윤성일을 태우고 곧바로 병원으로 돌아갔다.
[반드시 수사에 임하겠다던 윤성일 회장이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검찰은 윤성일 회장이 약속대로 출석했고, 건강이 극도로 안 좋은 점을 들어 당장 구속영장을 청구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다음 날 아침의 보도는 그렇게 윤성일로 시작되었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집무실에서 보도를 보던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저렇게 발버둥 쳐봐도 조만간 윤병지의 발표가 있을 테고, 미국에서 윤세계의 진술이 전해지면 그는 피할 방법이 없다.
대략 일주일쯤 남았다.
지금 천중명이 확인하는 보고서를 발표하면 윤성일의 저 마지막 희망도 모두 끝날 일이었다.
시선을 내린 천중명이 실시간 내비게이션, 인터넷 뱅크, 그 외 계열사에서 올라온 결재서류와 보고서에 집중할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혼자 있으니까 편안하게 말해.”
- 일곱 명 모두 이상 없이 출국했습니다.
곽대출은 골치 아픈 인간 일곱을 마침내 해결했다는 듯 홀가분한 음성이었다.
“공항에 직접 갔었어?”
- 그렇지는 않고, 배웅 갔던 직원의 전화를 조금 전에 받았습니다. 다들 출국장에 들어갔고, 비행기 뜨는 것을 확인했답니다.
“알았다.”
- 오늘도 바쁘셔? 도시락 말고 뭐 맛있는 거 드셔.
“누가 들으면 욕하겠다.”
잠시 웃으며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공부를 할수록, 지경경제연구소에서 올린 보고서와 리포트를 읽을수록 황성규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주택, 자동차, 카드결제까지, 금융이라는 무서운 덫이 편리함과 발전이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이빨을 감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직장을 얻은 사람만 수십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미국의 금리가 4퍼센트를 넘어서면 비명이 시작되고, 5퍼센트를 넘기면 그때는 아비규환의 사태가 일어난다.
천중명은 창을 바라보며 왼손 검지와 중지로 눈썹을 쓸었다.
황성규와는 생각이 좀 다르다.
그저 단순하게 4퍼센트 대를 넘겨서 비명이 시작된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중산층 이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빠져든다.
먼저 때린다. 먼저.
눈을 갈겨서 앞을 못 보게 하고, 다음으로 울대와 명치를 갈겨서 숨이 막히게 한 뒤에 단숨에 목을 부러트린다.
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그때의 그 암담한 상황을 지경그룹과 천호득이 감당할 수 있을까?
꼴통회장이 되겠다고 달려온 이후, 처음으로 천중명은 실패를 염려하고 있었다.
**
한국계 미국인 변호사를 마주한 윤세계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임시주총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45일 뒤에 윤성일 회장의 해임이 의결되면 믿을 곳은 윤병지 회장밖에 없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힘을 빡 준 마흔 중반의 변호사는 윤세계를 그리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회장님은 뭐라고 하세요?”
“안 들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악에 받친 윤세계의 질문에 변호사는 먼저 입맛을 다셨다.
“천중명 회장에게 비자금이 넘어가게 된 것을 안 윤세계 씨가 독단적으로, 그러니까 혼자, 알아서 예금 계좌를 빼돌리려 했던 거로 진술하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윤세계는 “하아!” 하며 숨을 커다랗게 토해냈다.
“그와는 별도로 윤병지 회장 측에서도 연락이 있었습니다. 모든 죄를 인정하고, 추징에 협조하며, 남은 돈을 리콜과 관련 사고 보상에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검찰과 협상했으면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하면 한국으로 갈 수 있어요?”
“그건 장담하지 못합니다.”
울컥 눈물이 올라온 윤세계를 변호사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만, 형량을 가석방 없는 30년 선에서 협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얼마요?”
“가석방 없이 30년입니다.”
사람이 어쩌면 저런 잔인한 말을 저리 쉽게 뱉어내는 건지.
“이보세요! 30년을 여기에서 더 보내면 내 나이가 60이에요.”
“여기는 미국입니다. 협상하지 않고 재판을 하게 되면 최소 100년 출발입니다. 형을 마치면 130세쯤 되겠군요. 화이트칼라의 범죄, 피해자가 많은 경제범죄에 대해 동정표 따위 없습니다.”
“한국으로 보내주는 것만 포함시켜 주세요. 그럼 내가 뭐든 다 인정할게요.”
변호사는 지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금 있는 방부터 좀 바꿔주세요. 그거 들어주는데 비용이 드는 건 따로 부담할게요. 돈으로 된다면 독방이 더 좋고요.”
“다단계 금융사기(Ponzi Game)로 150년을 선고받은 버나드 메이도프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교도소 이전입니다. 그 양반이 함께 있는 죄수를 모함했다가 그 죄수가 속한 갱단에게 찍혀서 매일 뒤에서 피를 흘린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윤세계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흐음.”
변호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설마…….”
그 직후에 윤세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흘의 여유입니다. 그 뒤에 재판이 시작되면 협상은 없습니다.”
“나 어떻게 해야 돼요?”
겁에 질린 윤세계의 질문에 변호사는 처음으로 인간적인 표정을 그려냈다.
“윤병지 회장의 의견에 따르세요. 그 정도 후원자가 없으면 당신은 교도소에서 오리엔탈 돌(Oriental Doll)이 됩니다. 동양의 장난감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네요. 특히 잠자리에서 사용하는 장난감이요.”
말을 마친 변호사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밖에서 기다리던 교도관을 향해 눈짓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