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38화 (238/315)

# 238

238. 뭔가 더 놀랄 일이 있는 것 같다 (1)

오전 7시 50분에 회의실에 들어간 신상훈은 화상회의 시스템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가 오른쪽 아래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살핀 다음이었다. 화면 전체가 밝아지면서 천중명과 유진교의 모습이 모니터에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그쪽은 아직 8시가 안 됐죠?]

“7시 52분입니다.”

[이른 시간이라 미안한데 일이 급하게 돌아가서 무리했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원래 이 시간에 출근합니다.”

신상훈이 고개를 가볍게 숙인 다음이었다.

[두 시간 뒤에 이곳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당분간 신상훈 총괄사장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합시다.]

그런 뒤에 천중명은 가등섭이 랠리에 거양자동차를 참가시킨 이유와 대송자동차의 중국 내 공장가동과 판매를 중단시킨 과정, 마지막으로 열다섯 명의 인원을 보낸 것에 관해 설명했다.

[우리가 이런 제안을 하든, 하지 않든, 가등섭은 랠리에서 우리의 운행을 방해할 계획을 세웠다고 봅니다. 이곳 시간으로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일곱 명은 그 점을 염려해서 선발한 인원입니다.]

신상훈은 이제야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총괄사장의 어깨에 많은 짐이 올라갔지만,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지경리온자동차의 임직원들에게 설명과 이해를 구해주세요.]

“회장님. 어차피 지경리온자동차의 목표는 우승이었습니다. 우승 트로피에 지경전자 연구소 연구원의 이름을 새겨주기로 약속도 했습니다. 그 목표에 절박함이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천중명이 웃는 모습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화면에 올라왔다.

[랠리 준비는 어때요?]

“마지막 테스트인 오프 로드 주행까지 무사하게 마쳤습니다. 특히 전기를 이용한 주행 결과를 본 뒤로 이곳 모두 고무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에서 랠리를 방송한다고 들었습니다.”

[거양자동차와의 조건 덕분에 중계권을 사들인 방송국이 있는 모양인데 상황을 봐야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래요.]

고개를 숙여 인사한 신상훈은 왼손을 뻗어 화상회의 시스템을 종료했다.

**

신상훈과의 화상회의가 끝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집무실로 가시죠.”

“예, 회장님.”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지겹도록 길고, 일도 많았다.

“거양자동차가 제안을 수락할 거라고 생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터무니없기는 한데 자동차는 남자들을 이상하게 뜨겁게 만들거든요.”

천중명의 터무니없는 대꾸에도 유진교는 아예 삶을 달관한 사람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

“오전 회의를 마친 뒤에 최만호 회장이 제 방에 잠시 들렀다가 갔습니다. 그때 뒤에 뭔가 더 놀랄 일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 보니 이번 발표가 그것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뭔가 바뀌었는데?

평소에 보던 유진교라면 묵직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만류했었을 텐데?

물끄러미 바라보는 천중명의 시선을 느꼈는지 유진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과정이 거대자본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정도로 무리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유진교의 답을 들은 천중명은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그가 천중명의 큰 그림을 알아챘다는 사실이 지금 당장은 놀랍기만 했다.

**

연일 이어진 대송그룹의 취재로 인해 기자들의 얼굴이 힘겨워 보였다. 얼굴은 그런데도 희한하게 그들은 ‘축제로구나!’하는 탄성을 눈에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국제변호사 출신으로 중국의 발전을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나는 오늘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을 뵙고 두 가지를 약속받았습니다.”

날카로운 인상, 국제변호사라는 타이틀, 유창한 한국어, 게다가 삼합회 간부라는 소문까지, 조양회의 기자회견은 대송의 보도에 물린 기자들과 대중의 시선을 당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는 지경리온자동차의 트럭랠리 팀에 합류하는 일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유해물질이 전혀 나오지 않는 트럭의 생산공장과 블루크루드 생산시설을 중국에 신설할 것입니다.”

바쁘게 타이핑을 하던 기자들이 퍼뜩 시선을 들었을 정도로 놀라운 발표였다. 솔직히 흥미를 끄는 정도의 취재로 생각했었다.

“두 번째로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은 중국에 있는 대송자동차 법인의 대표이사로 본인을 임명하겠다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촤자자자자작! 촤자자작! 촤자자작!

그런데 발표가 이어질수록 기자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과 청정한 공기를 중국 인민에게 돌려줄 거대한 프로젝트를 허락해주신 천중명 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제안합니다.”

기자들이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는 앞에서 조양회는 발표문을 보며 시간을 끈 뒤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번 트럭 랠리에 참여하는 거양자동차의 트럭이 지경리온자동차의 트럭보다 우수한 성적을 낸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권한으로 지경리온자동차의 생산기술과 블루크루드 생산 설비를 모두 거양자동차에 일임하겠습니다.”

“우.”

우려 섞인 기자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조양회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야, 하는 의심 짙은 눈빛과 혹시 관심종자에게 속아서 망신만 당하는 거 아냐, 하는 눈빛이 단상으로 달려들었다.

“만약 지경리온자동차가 우승한다면 거양자동차는 트럭 부분의 생산을 나에게 맡겨주길 바랍니다. 우리 중국 인민도 청명한 공기를 마실 때가 되었습니다.”

서늘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타이핑을 하던 기자 중에는 아예 상체를 세운 사람도 있었다. 지금 조양회가 내놓은 제안이 그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로 느껴지는 눈치였다. 기자들의 반응을 살핀 조양회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점에 관해서도 나는 이미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어후!”

“우-.”

촤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작! 촤자자작!

갑자기 기자 회견장의 분위기가 완벽하게 바뀌었고 연이어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

원래 윤성일의 바람은 무언가 커다란 사건이 터져서 관심이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비난보다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하는 중이었다.

죽어간다, 금방 죽을 수 있다, 돈도 모두 없어지고, 딸은 미국에서 구속되었고, 저렇게까지 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이렇게 동정 여론이 형성되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뭔 말도 안 되는 기자회견이 터지면서 관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회장님. 내일은 휠체어를 타고라도 검찰에 나가셔야 합니다.”

“가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회장님께서 검찰에 나가는 조건으로 윤병지 회장이 비자금의 조성 과정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만약 그걸 발표하면 그 뒤는 대통령이 나서도 감싸기 어렵습니다.”

“그러지 말고 자네와 우 실장이 했다고 하면 어때?”

“이미 우리 두 사람도 출석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진술한다고 해도 증거가 워낙 명확해서 방법이 없습니다.”

“수술은? 오늘 밤에라도 수술을 하면 되잖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추해지나, 하는 감정이 안소곤의 얼굴에 역력했으나 윤성일은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지금 수술을 감행하면 검사가 진료 기록과 수술 기록을 제출하라고 합니다.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리고 수술을 집도하겠다는 의사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 병원이 누구 건데 그딴 소리가 나와!”

“회장님의 해임안이 주주총회에 상정되었습니다. 제발 현실을 받아들이시고, 현명하게 판단하십시오.”

“이럴 순 없어!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윤성일은 반쯤 이성을 상실한 사람으로 변해서 실제로도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 보였다.

**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윤세계는 왼쪽 옆구리와 목덜미를 찌르는 듯한 뜨끔뜨끔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설프게 반항 좀 했다가 고릴라 같이 강인한 백인 여자에게 손날로 두 방 맞았는데 그 순간의 고통과 치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소변을 볼 때마다 저 여자는 끔찍한 미소를 짓는다.

끙끙대며 침대에 올라가 벽을 향해 누운 윤세계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을 꼭 다문 채 울었다.

“한국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윤병지 신임 회장이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당장 보석 허가조차 받아주지 않아서 한동안은 견디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낮에 보았던 변호사의 냉정한 말을 듣는 순간에도 윤세계는 서럽게 울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 좀 내보내 주세요!

가진 거 다 줄게요!

집이고, 차고, 귀금속이고, 옷이고, 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여기에서 꺼내줘요!

날이 밝을 것이 두렵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여기에서 내보내 주는 조건이라면 윤세계는 홀랑 벗고 뉴욕 거리를 달릴 각오도 있었다.

제발요, 제발, 제발 꺼내만 주세요!

따귀를 맞으라면 백 대 맞을게요!

“천중명 회장에게 연락을 해봐 주시겠어요? 원하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시키는 건 그게 뭐든 다 하겠다고 말 좀 전해주세요.”

매달리는 윤세계를 보며 변호사는 깊은 한숨을 먼저 내쉬었다.

“윤성일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했는데도 바쁘다고 안 받으셨답니다. 메모는 남겨놓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요! 여기에서 이대로 죽어요?”

윤세계의 질문을 듣고도 변호사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윤세계는 정말 무섭고 두려웠었다.

아빠, 나 정말 여기에서 죽으란 거예요?

이런 무서운 일을 나에게 시켰던 거야?

갑자기 서울에 있는 집이 떠오르고, 그렇게 모든 것을 누리던 삶이 기억나서 윤세계는 또 서러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호텔 대표이사 필요 없는데, 그냥 독일제 차 하나, 임대수익 나오는 강남의 빌딩 하나, 지금 살던 집 정도로 검소하게 살아도 되는데. 내보내만 주면 그렇게 살아도 행복할 텐데.

윤세계는 암담한 밤이 무서워 또 울었다.

**

누군가 불을 켜놓았나 싶을 정도로 가등섭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양서평도 아니고, 감히 조양회 따위가 대놓고 나를 노리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있을 수가 있나?”

분을 이기지 못한 가등섭의 얼굴이 마치 지옥에서 갓 나온 악귀처럼 독하디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벌레만도 못한 놈이! 모가지가 몇 개나 되길래 감히 나를! 이 강북의 주인을 노려!”

류효양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예?”

서늘한 가등섭의 눈초리에 류효양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중국과 중국 정부를 대놓고 비난한 점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그에 걸맞은 처벌을…….”

“그래서 한국과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 가등섭이 정부의 힘을 빌려 조양회를 눌러라?”

류효양의 목이 이마를 얻어맞은 자라처럼 쏙 들어갔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같은 질문이 또 날아들었다. 이 단순한 의미를 모를 정도로 류효양이 미련하지는 않았다.

“승부를 내보겠습니다.”

“좋아! 그래야지! 터무니없는 수작인 것은 알지만, 피하지 말고 부딪쳐서 부숴줘야지! 필요한 후속 조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요란하게 발표해!”

류효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천중명은 절대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가 뒤에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다, 그렇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그는 힘겹게 다시 삼켰다.

가등섭의 눈이 질책하듯 그에게 달려왔다.

“알겠습니다.”

류효양은 끝내 답을 하고 말았다.

**

카지노로 따지면 잭팟쯤 되겠다.

[거양자동차는 터무니없는 지경그룹과 조양회의 도발을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양자동차의 기술력을 무시하는 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마지막까지 망설인듯한 태도로 발표문을 보았던 류효양이 퉁퉁한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지경그룹과 조양회의 조건을 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TV를 통해 발표를 보던 한국의 보도방송과 언론사 기자들의 얼을 단숨에 빼놓는 발표가 나오고 있었다.

[이를 위해 거양자동차는 랠리 기간에 별도의 협상팀을 한국으로 보내 결과에 따른 조건 이행에 관한 계약을 체결할 것이며, 반드시 랠리에서 우승해서 우리의 기술력이 어느 수준인가를 증명할 것입니다.]

질문이 쏟아졌는데 류효양은 침울한 표정으로 단상을 내려갔다.

“나가! 지경그룹과 조양회가 있는 호텔로 가!”

데스크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고, 기자들이 줄줄이 튀어나갔다.

“중국에 연락해! 당장 경제부에서 건너갈 기자 추리고!”

이쯤 되면 보도방송의 시청률로는 완벽하게 잭팟이 터진 상황이었다.

“지경그룹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 거야? 보는 사람이 지칠 정도니 원!”

누군가 놀라움 가득한 혼잣말을 던졌는데 그 한마디가 대다수의 심정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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