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237. 그릇이 다르다. 인정하자. (2)
벤처사업부의 본부장 곽대출은 과장 주인영의 부장 승진명령서 결재란에 이름 세 글자를 멋지게 적어넣었다.
“축하해. 내가 없는 동안 벤처사업부 관리 잘 해주고. 참. 직원들 전부 회의실로 불러줘.”
“예, 본부장님.”
결재판을 가져간 주인영이 고개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섰다.
‘아후-! 이거 병 있는 거 아냐?’
운동이 부족했을까?
고작 이름을 적는데 손이 떨리는 건 뭔지, 이걸 천중명 회장이 봤더라면 두고두고 또 놀림감이 되었을 일이었다.
똑똑똑.
“본부장님. 회의실에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곽대출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천중명의 가르침대로 직원들에게 업무를 나누어줄 참이었다. 그래서 사명감이 담긴 직원들의 눈빛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
결재서류에 집중한 천중명의 앞에서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노크를 못 들으셔서 들어왔습니다. 양서평 부총재와 조양회 비서가 제2 접견실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래요?”
재킷을 꺼내 입은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과 함께 접견실로 향했다. 천중명을 본 양서평과 조양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에 자리에 앉았고, 부속실 직원이 차를 준비해주었다.
“어제 오후에 대송그룹과의 중요한 결정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양서평 역시 보도를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낮에 시간을 내주시다니, 우리 천중명 회장님의 능력과 배포가 어느 정도인지 나는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차를 드시죠. 그래, 어제 카지노에서의 성적은 어땠습니까?”
“마지막에 건져서 본전입니다. 바카라를 하다 보면 카드에 손을 올릴 때 덜컥 걸렸구나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어제 그 감이 마지막에 와서 그나마 그 정도였습니다.”
양서평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천중명은 가볍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양서평 부총재에게 조양회 비서는 어떤 카드입니까?”
말을 전하는 조양회나 질문을 들은 양서평 모두 이건 뭔 소리야, 하는 의미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양 부총재의 제안을 어제 검토해보았습니다. 괜찮다면 생산이 중지된 대송자동차의 중국 법인 대표로 조양회 비서를 임명할 생각입니다. 양서평 부총재는 지경리온의 랠리 팀에 합류합니다.”
움찔했던 조양회가 천중명의 말을 빠르게 중국어로 전했다.
“조양회를 임명했다가는 삼합회 간부를 대표로 내세웠다고 공격받지 않겠습니까? 중국 안에서의 반응도 비슷할 텐데 그걸 감당하시겠다는 겁니까?”
“중국의 생산시설과 판매망이 재가동 될 때까지입니다.”
양서평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말이 없었다.
“기자 회견을 했으면 합니다. 중국만의 방식을 고집해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들어가지 못한다. 한국의 발전된 기술로 매연 없는 중국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이후 기술 협력을 통해 자체적인 자동차 생산을 이루겠다.”
양서평에게 말을 전하는 조양회가 오히려 더 긴장한 표정이었다.
“대송자동차의 중국 법인 대표가 되면서 두 가지를 약속받았다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지경리온자동차의 기술 이전, 다른 하나는 랠리에 참가해서 우승할 경우 중국에 블루크루드와 트럭 생산 공장을 만드는 것.”
“그렇게 한다고 중국 인민들이 거양자동차를 놔두고 지경리온을 응원하겠소?”
다부진 음성의 질문이었는데 천중명이 이미 계산했던 내용이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잖습니까? 조양회란 패의 느낌이 어떤지?”
“허!”
양서평은 묘한 억양의 탄식을 터트렸다.
“랠리에서 거양자동차가 우승하면 지금 말한 모든 권한을 넘기겠다. 반대로 양서평 부총재가 지경리온 트럭으로 우승하면 거양자동차의 트럭 생산 부분을 우리에게 달라. 유해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트럭의 생산 공장으로 사용하겠다.”
멍했던 조양회가 말을 건넸을 때, 양서평의 첫 번째 반응은 기가 막힌 웃음이었다.
“회장님은 미쳤어. 미친 사람이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양회의 통역을 전해 들은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랠리에 지면 거양자동차를 통해 중국에 진출하고, 이기면 거양을 먹는 싸움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이어진 양서평의 불편한 질문을 들은 뒤에는 표정을 가라앉혔다.
“나는 삼합회의 간부를 중국 법인의 대표로 임명하는 부담에 랠리에서 삐끗하면 기술력에서 거양에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아야 해. 그러니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아.”
천중명의 말이 빠르게 양서평에게 전달되었고,
“생각이 짧았던 점에 대해 사과하신답니다.”
곧바로 양서평의 사과가 조양회를 통해 건너왔다.
“가등섭이 류효양을 끌어안았어. 중국대 한국의 경쟁이 아니라 가등섭과 양서평의 경쟁으로 바뀌는 거지. 누가 이겨도 중국 인민은 서운하지 않아.”
“흐음.”
“양 부총재만 나서면 가등섭이 거부할지 모르지만, 조 비서가 가등섭과 일대일로 상대하겠다고 달려들면 그는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물러서지 못해. 문제는 중국 정부가 과연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건데.”
“가등섭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정도는 총재를 만나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게다가 생산과 판매를 중단시킨 것이 가등섭이라 그건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좋아.”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일어나기로 하고 내일까지 결정해서 알려줘. 우리 쪽 인원이 내일 저녁에 출발하는 일정도 있고, 기자회견을 하려면 여러 가지 준비도 해야 하거든.”
천중명의 말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랠리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냐고 물으십니다.”
양서평의 질문이 바로 날아왔다.
“양서평 부총재가 오지 않았다면 이번 랠리에서 내가 부담해야 할 게 뭐가 있을지를 생각해.”
천중명의 답이 뜻밖이었는지 조양회는 반 박자 늦게 말을 전했다.
“우린 그저 기술만 입증하면 되는 자리였다. 그게 반드시 우승해야 하는 거로 바뀌었고. 나는 또 신상훈 총괄사장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야 하지.”
양서평이 신음 같은 숨소리로 대꾸를 대신했다.
“가등섭이 손을 쓸 테지. 열다섯 명을 데려간 건 그런 의미일 테니까. 또 있어. 삼합회 출신을 가지고 물어뜯으려는 사람들도 나와.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할까?”
“진심으로 듣고 싶으시답니다, 회장님.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천중명은 천천히 조양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 비서. 네가 부탁했던 일이다. 양서평 부총재를 살려달라고. 네가 거기 남겠다는 말의 의미가 목숨을 던져서라도 버틸 테니 양 부총재를 살려달라는 것 아니었나?”
말을 전하지 않은 조양회의 시선이 천중명에게 박힌 듯이 고정되었고,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는 눈으로 양서평이 번갈아 두 사람을 살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나는 목숨을 걸고 진심을 전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아. 게다가 양서평 부총재가 조직원이 아닌 이들에게 협박이나 폭행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고.”
조양회의 고정된 시선 앞에서 천중명은 단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랠리를 통해 나는 중국 공장을 되찾아오고, 거양자동차의 트럭 부분을 떼서 너에게 맡길 생각이다. 우승해야 가능한 일인데 해보기로 했다.”
“잠시 말을 전하겠습니다.”
더 기다리게 하기는 곤란한 모양인지 조양회가 빠르게 양서평에게 말을 건넸다. 양서평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조 비서.”
“예, 회장님.”
“트럭 부분을 시작으로 거양자동차를 가져와서 너와 양 부총재에게 맡길 계획이다. 이제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 봐. 직원을 제대로 대접하는 회사, 이익을 함께 나누는 회사, 중국에도 그런 거 하나쯤 생길 때 되지 않았나?”
“중국의 환경으로는 아직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맡아야지. 강단, 근성,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 배포, 두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 아냐? 가등섭과 류효양에게서 거양자동차를 가져오고 지켜내는 일도 그렇고.”
천중명의 의지에 밀리는 것처럼 조양회는 상체를 천천히 세웠다. 그런 뒤에 묘한 느낌의 한숨을 토해냈다.
“천 회장이 뭐라고 했는데 그러지?”
지켜보던 양서평이 나직하게 물었고,
“류효양 부사장이 죽게 생겼습니다.”
조양회가 당장 이해하기 어려운 답을 내놓았다.
“오늘 고민하고 내일 오전 9시 이전에 답을 줘. 기자 회견을 하려면 몇 군데 도움을 청해야 하니까.”
“회장님. 정말 삼합회의 간부인 조양회를 대송자동차 중국 법인의 대표로 임명하시겠다는 겁니까?”
양서평의 태도가 확실히 누그러져 있었다.
“양 부총재.”
천중명은 그를 조용하게 불렀다.
“조 비서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던졌었습니다. 그런 남자라면 한 번쯤 기회를 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장소가 중국이니까요.”
조양회는 이걸 어떻게 전하지 하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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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지는 가장 먼저 계약직과 파견직의 실태를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다음으로 비자금 조성과 관련해서 지경그룹 회계팀에 도움을 요청했다. 밀린 결재서류와 보고서들이 잔뜩 쌓여 있는 책상에 앉은 윤병지는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하려면 일이 끝도 없다.
당장 아직 타성에 젖어 있는 임원들을 휘어잡는 일이 급한데 윤병지는 이상하게 회장단과 마주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똑똑똑.
서류를 하나씩 살피는 윤병지의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안소곤과 우세환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차마 회장님이라 부르지 못하겠는지 고개만 숙여 인사했고, 윤병지는 그걸 뭐라 하지 않은 채 손을 뻗어 소파를 가리켰다.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발표를 보시고 심각한 위기가 있었는데 현재는 진정하신 상태입니다.”
윤병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본 안소곤이 불편한 눈매로 입을 열었다.
“주식회사 지경이 주식을 확보했다는 내용은 전해 들었습니다. 당장 회계자료 열람이라는 무기가 저쪽에 있지만, 막으려고 하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겨내야 한다.
늘 윤성일이 저런 식의 잘못된 지시를 내려도 가슴 한쪽에서만 거부했었지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법무팀장님.”
“예.”
안소곤은 아직 회장이란 직함을 부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어제 회의실에서 보았던 회장단을 연상시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윤병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이 비자금 조성에 관련되었다는 자료들이 꽤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걸 모두 공개하고 대송그룹이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로 삼을 생각입니다.”
윤병지의 앞에 앉은 두 사람이 칼에 찔린 것처럼 참담한 표정을 그려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자금 없이 성공한 사업이 있습니까? 이대로 가시면 대송그룹은 절대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하, 참! 회장단과 그룹 주요 임원 대부분이 법정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송은 지경그룹의 눈치를 살피는 계열사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답답한 듯 안소곤의 음성이 높아졌다.
“지경의 계열사가 되더라도 나는 반드시 대송을 바르게 되돌리겠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회장님과 윤세계 전 대표는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법의 절차대로 정당하게 처리하는 게 가장 빠르고 가장 현명한 대처라고 생각합니다.”
안소곤이 “하아.” 하는 탄식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분명 기에 눌려있는데도 윤병지는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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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양서평은 앞에 서 있는 조양회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감히 내 뒤에서 허튼짓을 해?”
“죄송합니다, 회장님.”
조양회는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가등섭이라는 위기를 맞아 최근에 부쩍 허물없어지긴 했지만, 양서평은 누가 뭐래도 강남을 책임지는 삼합회의 3인자였다. 그가 독한 결심을 내리는 순간이면 조양회의 가장 큰 소원은 가능하면 고통을 느낄 틈 없이 단숨에 죽는 것이 된다.
“내가 천 회장과 약속을 한 것이 아니었다면 너는 정말 죽고 남았다.”
고개를 떨군 조양회를 다시 한 번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던 양서평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서 있는 조양회가 어떤 카드일까?
궁지에 몰린 양서평을 단숨에 세워줄 조커일까, 아니면 위치를 차지한 뒤에 등 뒤에 칼을 박을 배신자일까.
천중명을 떠올린 양서평은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중국의 대송자동차 법인 회장으로 조양회를 임명하겠다라?’
이길 수가 없지? 천중명 회장을?
삼합회 간부를 대표로 임명하겠다는 것부터 기가 막힐 판인데, 조양회를 앞에 세워서 가등섭이 절대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게 만든다.
양서평도 살리고, 겸사겸사 중국 공장과 판매시설을 찾아오려는 줄 알았다. 그랬는데 뭐? 거양자동차를 가져올 생각이라고? 그걸 맡아서 바르게 살아보라고?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양서평은 상체가 끄덕일 정도로 거친 웃음을 토해냈다.
‘직원을 제대로 대접하는 회사, 이익을 함께 나누는 회사, 중국에도 그런 거 하나쯤 생길 때 되지 않았나?’
젠장!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이 살았다.
‘강단, 근성,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 배포, 두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 아냐?’
당의 방침에 대항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라 실제로 목숨을 건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양서평과 조양회에게는 그런 일이 잘 어울린다.
“후-.”
숨을 내쉰 양서평은 입맛을 다신 뒤에 씁쓸하게 웃었다.
“팔자에 없는 나이 어린 회장님을 모시게 생겼네.”
그의 시선을 받은 조양회가 슬쩍 들던 고개를 얼른 떨궜다.
“조양회.”
“예, 형님.”
“그릇이 다르다. 인정하자.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천중명 회장님을 모신다.”
“알겠습니다, 형님.”
양서평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양회가 상체를 깊숙하게 숙이며 답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