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236. 그릇이 다르다. 인정하자. (1)
대송건설을 나선 천중명은 그 길로 집으로 향했다.
이미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 결재서류를 모두 정리해놓아서 걸릴 것도 없었다.
“어쩐 일이에요?”
놀란 허선영이 시계를 확인했을 때가 9시쯤 되었다.
이 시간에 들어오면 놀랄 일상을 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영 씨 보고 싶어서.”
“하여간 짓궂어. 저녁은요?”
거실 벽에 소리를 완전히 줄여놓은 TV에서 마침 천중명이 승용차에 오르는 모습이 다시 나오고 있었다.
“먹었어. 씻고 올게. 커피 한잔 부탁해도 돼?”
“그럼요.”
천중명은 간단하게 씻은 뒤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다시 거실로 나왔다. 홈바에 앉자 허선영이 아메리카노를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대송건설 건물이 나오는 TV에 시선을 주었다.
“중명 씨는 저런 일 할 때 떨리거나 하지 않아요?”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커피잔을 든 천중명은 그래야 하냐는 얼굴로 허선영을 바라보았다.
“지경도 아니고 대송 회장단이었잖아요. 반감도 있었을 거 같고요.”
“그렇긴 하지.”
저런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하는 표정으로 허선영이 웃었다.
**
집에 도착한 곽대출을 주인영이 맞아주었다.
간단하게 손을 씻은 곽대출은 검은색 운동복 바지에 하얀 면티를 입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 중앙은 공부하는 책상 차지였다. 그곳에 앉은 곽대출은 주방에 있는 주인영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주 과장. 내일 부장으로 승진 명령 내릴 거거든.”
차를 준비하던 주인영이 멈칫하고는 곽대출을 바라보았다.
“내가 출장을 가게 될 거 같은데 그렇게 되면 벤처사업부를 주 과장이 맡아줘야 하잖아. 책임자가 과장 직급인 건 아무래도 무리야. 그게 아니더라도 계열사 상대하는데 과장은 좀 약하고.”
작은 쟁반을 들고 온 주인영이 곽대출 앞에 차를 놓아주고는 맞은 편에 앉았다.
“친분 때문에 승진시켜 주시는 건 정말 아닌 거죠?”
“그래서 표정이 그랬어?”
곽대출은 여유롭게 웃었다.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거야. 출장 건도 그렇고.”
“출장은 어디로 가세요?”
“다카르 랠리에 참가하는 지경리온자동차 팀과 합류할 거 같은데?”
주인영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찻잔을 들었던 곽대출이 고개를 갸웃하며 살폈다.
“본부장님. 프랑스에 가서 예쁜 여자들이 달려들고 해도 절대 흔들리면 안 돼요.”
“프랑스는 무슨 프랑스? 나는 아프리카에서 합류하는 일정이야. 사막을 달리는데 여자가 어디 있냐? 그리고 세상 어떤 여자를 데려다 놔봐라. 내가 눈이나 깜짝 하나.”
“정말이죠?”
“또 모르는 사람처럼 그런다?”
찻잔을 내려놓은 곽대출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뭐예요?”
“정말 몰라?”
“모르겠어요.”
씨익 웃은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지금은 아니에요. 왜 이러세요? 어머!”
곽대출이 주인영을 번쩍 들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본부장님! 잠시만요!”
털썩!
침대로 두 사람이 쓰러진 뒤에 바람이 문을 닫았다. 이상하게 지금 같은 상황이면 꼭 문이 닫힌다.
**
눈을 뜬 아침부터 방송은 여전히 대송그룹의 보도로 가득했다. 게다가 오늘은 대송물산의 윤병지가 대송건설의 회장으로 올라서는 날이었다.
대송건설을 중심으로 대송그룹의 행보, 박춘영 대송건설 회장의 거취, 비자금 관련 발표까지 실제로도 관심을 끌 내용들이 산더미 같아서 보도방송은 산란기를 맞은 민물 낚시꾼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안소곤 법무팀장은 병원의 응접실에서 난처한 기색이었다.
“상무님. 이런 식으로 모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대송건설 회장에 취임한 윤병지 부회장이 비자금 조성 방법과 규모를 모두 밝히면 윤성일 회장님은 피할 구석이 없습니다.”
“흐음. 검찰은 뭐라고 해?”
“오늘까지 일단 시간을 벌어놓았습니다만,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나와주셔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윤세계 전 삼중호텔 대표가 미국에서 어떻게 진술할지, 윤병지 부회장의 발표가 어떤 내용을 담을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는데…….”
“우리끼리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 아닌가. 편안하게 말해.”
“뇌수술이나 심장 수술을 감행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검찰은 미국 측의 요청이 있으면 자체 조사를 마친 뒤에 송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안소곤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상황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오후에 윤병지 부회장을 만나볼 생각이니까 그 결과를 놓고 다시 의논하지.”
“예, 상무님.”
부장 검사 출신으로 안소곤의 후배가 되는 대송법무팀의 부장은 지시를 조용하게 받아들였다.
**
다음 날, 천중명은 오전 6시에 집무실에 도착했다.
“시간 봐서 양서평 부총재에게 오전 10시에 접견실에서 봤으면 한다고 전하고, 일정이 있다면 가능한 시간을 확인해서 알려줘.”
“예, 회장님. 그리고 유진교 본부장과 대송자동차그룹 회장단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갈 테니까 내 커피는 그리 부탁해.”
집무실에 재킷을 벗어놓은 천중명이 회의실로 들어서서 기다리던 대송자동차그룹의 회장 네 명, 그리고 유진교와 인사를 나누었다.
임원이 급여를 많이 받는 건 또 이런 이유가 있겠지 싶은 장면이었다. 곧바로 커피를 앞에 둔 채 회의가 진행되었고, 다음으로 도시락을 먹어가며 조금 덜 중요한 사안들을 농담처럼 의논했다.
[양서평 부총재가 10시에 방문하겠답니다.]
중간에 메모도 확인했다.
“최 회장님. 중국 법인의 회장을 임명할까 하는데 전에 보고받은 내용 중에 변한 게 있나요?”
“기존의 임원진을 해임한 뒤에 생산과 아직 임명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혹시 짐작해둔 분이 있으십니까?”
“들으면 놀라실 겁니다.”
“회장님 모시면서 이젠 좀 단련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도시락을 놓고 하는 오전 회의에서 최만호와 유진교는 확실히 전보다 여유가 있었다.
“양서평 부총재에게 국제변호사 출신의 비서가 있습니다.”
“예?”
“단련되셨다면서요?”
“회장님. 삼합회라는 조직의 양서평 부총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대외적인 이미지도 그렇고, 경영 방식 등의 문제점이 꽤 있지 않겠습니까?”
“드시면서 말씀하시자니까요. 오래 가지 않을 생각이고, 중국에 있는 공장과 판매망을 재개할 때까지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 계획이 있으시군요, 하는 눈빛으로 최만호가 천중명을 보았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 뒤에 순순히 답도 내놓았다. 어제 대송건설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는 눈빛으로 뜻을 통하는 것이 좀 더 분명해진 느낌이었다. 대송그룹에 대한 지원을 끝으로 회의는 오전 9시쯤이 돼서야 마무리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고생들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회의실을 나선 천중명은 집무실로 돌아와 컴퓨터와 TV에 차례대로 전원을 넣었다. 오전은 숨돌릴 틈 없을 거란 경고처럼 연락을 기다리는 메모와 결재서류, 보고서들이 책상에 수북하게 쌓여서 천중명의 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던 천중명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웃었다. 주식시장이 열리기 무섭게 대송그룹 계열사들의 주가가 상한가 근처로 상승해 있었다.
**
법무팀장의 만류에도 윤성일은 결국 오전 9시 직전에 박춘영 대송건설 회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 여보세요?
“나야.”
- 회장님이십니까?
“긴말 할 것 없고. 오늘 오전에 윤병지를 회장으로 임명하기로 한 이사회를 취소시켜.”
윤성일의 독한 지시가 건너갔는데 뜻밖에도 박춘영의 대꾸가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 회장님. 이미 판세가 기울어졌습니다. 지경그룹이 계열사의 주식을 확보했습니다. 여기에서 버티면 대송그룹 전체에 회계감사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면 계열사마다 비자금을 위해 자금을 뺀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끄으.”
손발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 윤성일은 목줄마저 천중명의 손아귀에 붙들린 꼴이었다.
“그렇다고 비자금을 밝히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의 고함이 쩌렁하고 중환자실에 울리자 안소곤과 우세환이 화들짝 놀라서 바로 눈가를 찌푸렸다.
“이봐, 박 회장. 내가 활동할 수 있게끔 해야 뭘 해도 할 거 아닌가.”
- 어제 회의에서 비자금의 조성과 사후처리를 밝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그렇게 해야 미국에 구속돼 있는 윤세계 전 대표를 구해낼 수 있다고, 그게 최선이라는 설명에 회장단 전체가 동조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야, 이! 그래. 우선 하려던 말을 계속해 봐.”
- 윤병지 부회장이 대송을 이끌면 회계감사가 혹독하지 않으리란 기대까지 실려서 도저히 오늘 이사회를 취소하기 어렵습니다.
윤성일은 뜨거운 숨을 “푸후!” 하고 먼저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인간들의 심정은 알겠는데 그런다고 대송건설의 이사회를 회장단이 하는 게 아니잖아! 당신 지금 병원으로 와! 그래서 중환실에 누워!”
- 회장님.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식회사 지경이 이미 지분을 확보해서 오늘 오전에 이사회가 열리지 않으면 바로 회계자료 열람신청이 이루어집니다.
윤성일의 숨소리가 어쩐지 막막해서 터져 나오는 울음처럼 들렸다.
- 이제 남은 방법은 회장님께서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에게 매달리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잔인한 의견을 들은 윤성일은 다리를 덮은 담요 위로 스마트폰을 툭 떨어트렸다.
**
밤새 대송건설 로비를 지켰던 보도진은 임원들이 출근할 때마다 우르르 달려들어 현재의 소감을 물었다.
[대송건설 본사 발표회장에 나와 있습니다. 오전 9시에 이사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주주총회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등기 임원은 아니더라도 오늘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되면 당분간 대송그룹의 키를 윤병지 현 대송물산 부회장이 잡을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는 대송건설 기자회견장에서 보도에 열을 올렸다.
[이사회는 요식절차에 가까워서 5분에서 10분이면 끝납니다. 이사회가 끝나면……. 아! 지금 윤병지 대송물산 부회장과 박춘영 대송건설 회장이 기자회견장에 들어왔습니다. 먼저 발표를 들으시겠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발표회장에 들어선 두 사람을 꿰뚫을 것처럼 연달아 터져 나왔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오늘 오전 9시에 대송건설의 이사회가 있었습니다.]
발표는 박춘영이 먼저 했다.
[이사회는 대송물산 윤병지 부회장을 대송건설 회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본인 박춘영과 윤성일 현 대송건설 회장의…….]
뭔가 복받쳤는지 박춘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발표문에 시선을 주었다.
[해임안을 주주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음은 신임 대송건설 윤병지 회장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촤자자자자자작! 촤자작! 촤자자자작!
플래시가 화면 가득 터져 나왔을 때였다.
“회장님! 회장님!”
우세환이 뒤로 넘어간 윤성일을 안다시피 붙들었고, 안소곤이 급하게 의료진을 호출하는 버튼을 눌렀다.
[대송건설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게 된 윤병지입니다. 먼저 불미스러운 일련의 일들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국민과 대송그룹 전 임직원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촤자자자자작! 촤자자자자자작!
고개 숙이는 두 사람을 또다시 플래시가 뒤덮었다. 그사이 달려온 의료진이 윤성일을 살폈는데 그는 손을 뿌리치고 이를 악문 채 TV에 시선을 주었다.
[오늘부터 대송그룹은 새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문제가 된 비자금의 조성과정과 규모를 조속히, 소상하게 밝히고, 어제 발표한 것과 같이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끄으-응.”
거기까지였다.
윤성일은 눈이 하얗게 뒤집히며 의식을 잃었다.
**
발표는 천중명도 보았다.
세상인심은 원래 그런 것인지 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대송그룹의 전 계열사 주가가 기다렸다는 듯 상한가를 기록했다.
천중명은 잠시 책상에서 일어나 집무실 유리를 향해 섰다.
대송의 역사는 오늘로 막을 내렸다. 이름과 흔적이야 좀 더 갈지 몰라도 명맥이 오늘 끊어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대항해야 할 거대 자본과의 싸움에 분명한 힘이 될 테고, 오너의 오만하고 방만한 경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한 분명한 경고였는데 천중명은 무거워진 마음 한쪽을 쉽게 털어내지 못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천중명의 시선을 책상 위의 휴대 전화기가 잡아끌었다. 천천히 움직여 확인한 액정에는 윤성일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천중명은 바로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늦었어요, 윤성일 회장님.
그 많은 기회와 딸과 동생까지 버려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에 계시거든요.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두 번째 전화 역시 천중명은 거절 버튼을 눌렀다.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이 창을 오른손으로 짚은 채 빌딩 숲과 멀리 있는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똑똑똑.
“회장님. 윤성일 회장이 직접 전화했습니다.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사죄하고 싶으시다고 기다릴 테니 꼭 전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안 되긴 했다, 인간적으로. 동정도 간다. 그러나 이런 동정이 오만하고 방만한 오너들에게 자신감으로 변질돼서 더 큰 죄를 짓게 만든다.
재벌이라 면죄부를 받는 시대는 여기에서 끝나는 게 옳다.
“바빠서 지금은 전화 받을 시간이 없다고, 나중에 기회 되면 연락한다고 전해줘. 이후로 전화하면 그렇게 응대하고.”
“예, 회장님.”
부속실 직원이 나간 뒤에 천중명은 다시 아까 보았던 빌딩들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