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235.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란 거 없다 (3)
천중명은 상체를 다시 앞으로 기울였다.
“오해가 있을까 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지금의 대송 계열사는 모두 우리 지경의 계열사와 업무 영역이 겹칩니다. 그런데도 내가 나선 것은 대송의 계열사에 근무하는 죄 없는 직원들을 위해서입니다.”
쇳소리가 섞여서 그런지 천중명의 음성이 평소보다 날카로운 느낌으로 회의실을 메우고 있었다.
“주식회사 지경은 윤성일 회장과 일가가 소유한 지분만큼의 주식을 취득했습니다.”
고개를 앞으로 기울인 회장단 중 누구 한 사람 천중명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는 없었다.
“그 권한을 통해 윤병지 부회장을 대송건설 회장으로 임명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회장단이 원한다면 임시주총을 신청해서 정식으로 처리해도 됩니다.”
유진교와 최만호가 대송 회장단의 반응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곳에 함께 있는 유진교 본부장을 통해서 계약직 직원들의 정규직 전환, 그리고 기타 복지후생 방안을 전달하겠습니다. 기존에 지경그룹의 예를 잘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밀랍 인형을 앉혀둔 것처럼 회장단은 고개를 떨군 상태에서 단 한 사람도 움직임이 없었다.
“대송은 대송의 방식이 있을 테고, 대송의 문화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기본 방침을 거부한다면 결과는 지경의 몇 개 계열사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윤병지 부회장의 대송건설 회장 취임에 반대하는 분은 지금 말씀하세요.”
깍지를 낀 자세로 천중명은 좌우로 고개를 돌려 회의장에 앉은 회장단을 확인하듯 천천히 살폈다.
“대송건설 회장님이 어느 분이죠?”
질문이 있고 나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예.”
그리고 침묵만큼이나 짧은 대답이 나왔다.
천중명의 왼편 두 번째, 유진교의 앞쪽에 앉은 중년의 남자였다. 천중명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불만을 감추지 않은 태도였다.
“불만이 있다면 임총을 통해서 임명하겠습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고개를 떨구고 있던 대송건설 회장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있는 임원들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비록 대송그룹이 고비에 놓였다 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상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성함이?”
“대송건설 회장 박춘영입니다.”
천중명의 시선을 박춘영은 피하지 않았다.
“임총을 통해 임명하시겠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뜻대로 안 되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는 뜻 아닙니까? 다음으로 왜 아직 어떤 권한도 없는 분이 대송그룹의 회의에 참석하셔서 멋대로…….”
“박춘영 회장님.”
유진교의 낮고 굵직한 음성이 박춘영의 말을 잘랐다.
“회장님.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 더 말이 달려가서는 불편한 상황이 연출될 것 같아서 나섰습니다. 잠시 제가 의견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런 뒤에 유진교는 천중명에게 정중한 태도로 이해를 구했다. 천중명은 유진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뒤에 상체를 세웠다.
“지경그룹 발전본부장 유진교입니다. 이 자리는 윤성일 회장님의 동생분인 대송물산의 윤병지 부회장의 요청을 받고 참석한 자리입니다. 멋대로라는 따위의 경박한 언행을 사용하셨는데.”
유진교는 진심으로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회장님을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대송건설 박춘영 회장님. 협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적대적이든, 임총을 통해서든, 대송건설의 경영권을 손에 넣게 되면 우리 지경그룹의 회계팀과 법무팀을 모두 동원해서 회계 감사를 실시할 테니 준비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실감 나는 장면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잘려나가는 것 말고 뭐 있겠냐는 투로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박춘영의 기가 분명하게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유진교는 시선을 날카롭게 돌려 회의실을 쭉 둘러보았다.
“대송자동차그룹 최만호 회장과 지경의 그룹발전본부장인 내 앞에서 우리 회장님께 멋대로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분노합니다. 내가 이 모욕은 회계 감사를 통해 나온 결과를 토대로 민사와 형사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체형과 인상을 지닌 유진교가 전에 없이 굵어진 음성으로 회장단을 압박하고 있었다.
“또한, 박춘영 회장의 몹시 불쾌하고 거친 언행의 책임을 물어 여기 있는 모든 계열사를 회계 감사 하도록 내가 무릎을 꿇고라도 우리 회장님께 요청할 것입니다.”
유진교의 협박이 멋지게 먹혔다. 대송의 회장단 얼굴에 후회와 근심이 서리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회장님. 저도 간단하게나마 뜻을 밝히고 싶습니다.”
최만호가 천중명에게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청을 넣었다. 돌아가는 모습이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지만 천중명은 근엄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대송자동차그룹 최만호입니다. 위기에 빠진 대송 계열사의 직원들을 구해보자고 나서신 우리 회장님께 무례하게 행동한 여러분에게 저 역시 분노와 실망을 금할 길 없습니다.”
유진교가 독이 시퍼렇게 오른 모습이었다면 최만호는 너희 두고 봐, 내가 피를 말려줄 거야, 하는 꼬장꼬장한 느낌이었다.
“윤병지 부회장이 오늘 두 차례나 우리 회장님을 찾아 도움을 요청해서 나서신 길입니다. 우리 지경그룹의 입장에서는 임총을 통해 여러분 모두를 해임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최만호의 말이 회의실을 메우는 동안, 유진교는 박춘영에게 향한 시선을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임총이 끝나고 나서 보겠습니다. 우리 회장님 앞에서 그렇게 떳떳한 태도를 보이실 만큼 경영을 투명하게 하셨는지 반드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박춘영은 물론이고, 회의실을 메운 회장단의 표정이 역력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얼른 수습해.
그리고 원망 어린 시선들이 단박에 박춘영을 향해 몰려들었다.
“회장님.”
결국, 박춘영이 고개를 숙이고는 마이크에 입을 열었다.
“악한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제가 저질러선 안 되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윤병지 대송물산 부회장을 대송건설 회장에 추대하고, 저는 사임토록 하겠습니다. 제 선에서 정리해 주시고, 다른 회장단은 너그럽게 선처해 주십시오.”
상황이 묘하게 홱 지나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결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것은 휴식이었다.
“잠시 의논하고 5분 뒤에 다시 모이기로 하겠습니다.”
마이크를 통해 뜻을 전한 천중명이 일어서자 회장단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표시했다. 천중명은 좌 유진교, 우 최만호, 그리고 뒤에 윤병지가 따르는 모습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소회의실로 모셔.”
밖에 있던 직원에게 윤병지가 지시했고, 기다리던 곽대출까지 근엄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희의실에 들어가 차를 앞에 둔 다음이었다.
“본부장님. 5분 뒤의 회의는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은데 마무리를 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진교가 답을 한 뒤에,
“제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윤병지의 힘겨운 사과도 있었다.
솔직히 바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천중명을 이해해주는 임원이 곁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든든한 일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양서평과 조양회를 도울 방법이었다.
천중명은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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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을 차지한 윤성일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옆에 연결해 둔 기계의 심박수마저 높게 올라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할 것 아냐!”
“회장님. 제발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우세환의 조언에 윤성일은 “푸후!”하는 숨을 터트렸다.
“병지 이놈이 회장단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 지경의 천중명과 유진교, 최만호와 함께 들어갔다니까. 아흑!”
1인실로 꾸며진 중환자실이었다.
TV에서 대송건설의 본사 앞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있는 광경이 나오고 있었는데 아직 정확한 상황에 대한 보도는 없었다.
윤성일이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천중명 지경그룹 회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곽대출 벤처사업부 본부장과 단둘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유진교 본부장과 최만호 자동차그룹 회장은 아직 안에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켜보던 윤성일의 속이 또다시 벌컥 뒤집혔다.
“저, 저! 저런 미친놈들이!”
대송그룹의 비서실 직원들이 나서서 천중명의 길을 열어주는 모습 때문이었다.
[회장님! 오늘 회의는 어떤 의미였습니까!]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대송그룹이 결국 지경그룹에 편입됩니까?]
요란한 플래시와 질문 세례에도 천중명은 끝내 입을 다문 채 승용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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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모인 회의실 분위기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회장님을 대신해서 제가 회의를 이끌겠습니다. 불만 있으신 회장단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유진교의 날 선 제안을 받고도 몸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었다.
“유진교 본부장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 윤병지 부회장을 대송건설 회장에 임명하고, 물러나겠습니다.”
박춘영 대송건설 회장의 당부가 떨어진 다음이었다.
“박춘영 회장님께 일을 바로잡을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유진교가 날카로움을 고스란히 담은 눈길과 음성으로 박춘영을 상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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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북새통을 이룬 대송건설 로비로 걸어 나온 것은 박춘영이었다.
“앞에 좀 숙여!”
“비켜!”
“밀지 마!”
기자들의 실랑이를 비서실 직원들이 애써 막아내는 앞에서 박춘영은 가져온 발표문을 앞으로 들었다.
“대송건설 대표회장 박춘영입니다.”
촤자자자작! 촤자자작! 촤자자자자작!
고작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사방에서 터진 플래시가 박춘영의 모습을 하얗게 뒤덮었다.
“오늘 회의는 위기에 처한 대송그룹을 살리기 위해 전격적으로 마련되었으며, 대송물산 윤병지 부회장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과 대송자동차그룹 최만호 회장, 지경그룹발전본부 유진교 본부장이 함께 참석했습니다.”
또다시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져 나와 박춘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
“대송건설은 내일 오전 이사회를 열어 윤병지 대송물산 부회장을 대송건설 회장에 임명합니다.”
놀라움만큼 플래시가 더 강렬하게 쏟아져나왔다.
“대송건설 이하 대송그룹 계열사 모두는 천중명 지경그룹 회장님의 경영 방침을 받아들여 계약직과 파견직 직원 전원을 정직원으로 고용할 것이며.”
촤자자자자자자작! 촤자자자작!
“윤병지 부회장의 임명 뒤에 대송자동차그룹이 보유했던 비자금의 규모를 소상하게 밝히고, 비자금이 세금추징, 자동차의 결함과 결함으로 인한 사고의 보상에 쓰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입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질문이 쏟아진 순간이었다.
“오늘 대송그룹의 미래를 위해 애써 주신 천중명 지경그룹 회장님께 대송계열사의 임직원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발표문을 내린 박춘영이 상체를 깊게 숙였다. 질문이 날아든 것을 무시한 채 그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또한, 비자금 조성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 그리고 대송그룹 직원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다시 고개를 숙이는 박춘영은 아예 포기한 얼굴이었다.
상체를 세운 그가 몸을 돌리자 비서실 직원들이 팔에 팔을 걸고는 아예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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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일은 이마를 포함한 온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마치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아.”
법무팀장 안소곤의 한숨이 윤성일의 미래를 제대로 알려주는 느낌이었고, 우세환 기획실장은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해 벽을 의지한 채 겨우 서 있는 지경이었다.
“기자 회견을……. 저게 모두 잘못된 거라고 기자 회견을 해야지.”
“회장님. 기자회견장에 서시면 미국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니면 박춘영을 불러.”
“회장님!”
“그럼 어떻게 해! 이대로 정말 중환자실에서 죽어!”
윤성일의 질문에 안소곤 법무팀장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지금은 정말 답이 없는 상황,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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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천호득과 천상기는 함께 앉아 TV를 보았다.
“멍청이.”
“누구?”
“윤성일 회장이요, 아버지.”
천호득의 시선을 받은 천상기가 고개까지 저어가며 입을 열었다.
“보면 모를까요? 회장에게 덤벼서 살아난 사람이 누가 있어요? 가장 무서운 건 당최 약점이 없는 거예요. 남의 돈 탐 안 내지, 바르게 살지, 직원들 챙기지, 뭐 해볼 구석이 있어야죠.”
천호득이 흐느끼듯 웃는 앞이었다.
“윤성일 회장도 섬에서 일주일만 굴 까게 하면 바로 사람 될 텐데. 내가 옆에서 좀 가르쳐주고. 그렇죠, 아버지?”
“흐헤헤헤헤.”
천상기의 뻔뻔한 말에 천호득은 흐느낌을 넘어 특유의 웃음을 쏟아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