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234.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란 거 없다 (2)
초췌하고 굳은 얼굴로 이름, 생년월일, 체중이 적힌 종이를 들고서 윤세계는 소위 ‘머그샷’을 찍었다. 치욕스럽지. 재벌가의 여식이 흐트러진 얼굴로 죄지은 사람들이나 하는 흑백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그런 뒤에 그녀는 뉴욕교도소로 향했다.
오렌지색 죄수복으로 갈아입은 윤세계는 겁에 질린 채 두 손을 뒤통수에 올려 깍지 끼고는 2층으로 된 교도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에서만 그런 줄 알았다.
하얀 담장,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 그 안에 2층으로 된 교도소가 말이다. 교도관의 지시대로 걸어가는 동안, 철창을 붙든 백인, 흑인, 히스패닉계의 덩치가 엄청난 여자들이 윤세계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건 아냐! 절대 이럴 순 없어! 나는 이런 것들과 다른 사람이야!’
윤세계가 현실을 부정할 때였다.
교도관은 그녀를 흰 색 페인트로 223이라고 쓰인 방으로 데려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윤세계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덩치가 커다란 백인 여성이 침대에 걸터앉아 맞은편의 침대를 고개로 가리켰다.
윤세계는 영어 좀 한다. 그러나 백인 여자의 영어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뻑(Fuck)으로 시작해서 중간중간에 ‘개년’이란 의미의 ‘비치(bitch)’라는 단어가 연달아 들릴 뿐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윤세계가 쭈뼛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은 직후였다.
씨익.
강한 턱과 어지간한 남자보다 덩치가 큰 백인 여자가 윤세계의 가슴과 어딘가를 훑어보며 만족한 미소를 그려내고 있었다.
“헤이!”
백인 여자가 윤세계를 불렀다.
그리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침상에 걸린 자신의 오렌지색 죄수복을 가리켰다. 속이 훤히 비치는 면티 차림인 백인 여자는 자신처럼 죄수복을 벗으라는 의미인 게 분명했다.
두두둑. 두둑.
그녀가 양손을 엇갈려 손가락을 밀어 넣듯이 꺾으며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를 시원하게 쏟아냈다.
반항하자니 저 주먹이 무섭고, 옷을 벗자니 두렵고.
‘나 어떡해.’
윤세계는 정말이지 넋이 나가서 멍청해진 얼굴이었다.
**
천중명이 호텔에 도착하자 로비에 있던 우두머리와 섬에 있던 도깨비 한 명이 곧바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왜 여기 있어?”
질문은 곽대출이 했다.
“지하 주차장에 두 명, 맞은편 방에 네 명이 있습니다. 조양회 비서가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전화번호를 교환해두었습니다.”
이 정도면 총을 느닷없이 갈겨대지 않는 한, 양서평과 조양회의 안전을 염려할 것은 없었다.
“고생해.”
“예.”
곽대출이 지시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에서 조양회가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인사해. 여기는 곽대출 본부장, 이쪽은 조양회 비서.”
천중명의 소개로 곽대출과 조양회가 악수를 나눴다.
“모시겠습니다.”
그런 뒤에 조양회의 안내를 받으며 천중명과 곽대출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움직였다.
많이 변했다, 곽대출.
정장에 어울리는 걸음도 그렇거니와 화려한 호텔에서 두리번거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악수할 때 오른쪽 어깨를 자연스럽게 내미는 동작까지 이젠 정말 임원처럼 보였다.
11층에 도착한 조양회는 곧바로 양서평의 방으로 천중명과 곽대출을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이었다.
“천 회장님!”
양팔을 벌리며 다가온 양서평이 천중명의 양쪽 팔뚝을 다독였고, 그 뒤에 악수를 나눴다. 이어지는 순서는 당연하게 곽대출과의 인사였다.
“앉읍시다.”
그가 가리킨 창가의 소파에 앉자 조양회가 중국에서 가져온 게 분명한 찻잔에 차를 가져다주었다.
“보이차입니다.”
그런 뒤에 조양회는 비어 있는 양서평의 옆자리를 마다하고 보조 의자에 앉았다. 비서로서 통역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천 회장 같은 분에게 말 돌려봐야 소용없을 테니 다 털어놓겠소. 가등섭이 작정한 듯 밀고 내려옵니다. 특히, 거양자동차의 류효양이 그쪽에 붙으면서 내 입지가 급격하게 좁아졌소.”
조양회가 말을 전하는 동안, 양서평은 퉁방울 같은 눈을 천중명에게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대송자동차의 생산 시설과 판매망을 중지시켰다고 해서 천 회장님이 눈 하나 깜짝할 분 아닌 것은 내가 잘 압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뺏기지 않는 것이 더 멋지지 않겠소?”
“원하는 것을 말해보세요.”
양서평이 기다렸다는 듯 답을 했는데 통역을 맡은 조양회는 그저 눈만 껌벅였다.
무슨 말일까?
뭐라고 했길래 조양회가 양서평의 말을 전하지 못한 채 저리 당황할까? 양서평이 감히 네가, 하는 시선으로 노려보고서야 조양회는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경리온자동차의 트럭 랠리에 참여하게 해달라십니다.”
“이유는?”
천중명 역시 숨도 쉬지 않은 채 이유를 물었다.
“TV 중계가 있다고 들었소. 내가 고개 숙이리다. 내가 천중명 회장의 사람으로 랠리에 참여하겠소. 유해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승하게 된다면 중국 시장에 트럭을 판매할 권한을 내게 주시오.”
“그렇게 하면 양 부총재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바로 건너간 천중명의 답이었다. 양서평은 커다란 눈을 찌푸리며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만 건넸다.
“류효양이 랠리에 참가하면 중국 인민들은 전폭적으로 거양자동차를 응원합니다. TV에 중계되는 상황에서 양 부총재가 지경리온 트럭으로 우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양서평은 뒤늦게 깨달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함정에 빠진 거군. 가등섭이 류효양을 끌어가서 트럭 랠리에 참여하게 한 이유가 이거였어. 만약 랠리에서 지경리온이 우승하면 나는 참가하지 않았어도 천 회장의 편이라고 낙인찍힐 테니까.”
천중명의 시선을 받은 조양회가 양서평의 탄식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회장님. 혹시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런 뒤에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천중명에게 매달렸다.
방법이 있을까?
조금 전에 했던 그 간단한 이해득실조차 따지지 못할 정도로 다급한 양서평과 무조건 충성하는 조양회를 살릴 방법이? 게다가 양서평을 도와봐야 결국은 누군가를 협박하고 죽여가며 부를 취할 조직의 보스를 돕는 꼴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가등섭이 이미 열다섯 명의 인원을 랠리에 참가하겠다고 신청한 모양이다. 쉽게 생각할 게 아니니 하루쯤 시간을 두고 적당한 방법을 생각하자. 그리고 조 비서.”
“예, 회장님.”
“나는 양서평 부총재가 협박이나 살인 따위의 일을 계속하는 데 도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만약 나와 손을 잡고 싶다면 카지노, 클럽, 그 외에 외식업 등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약속과 의지가 필요해.”
천중명의 다부진 표정을 읽은 조양회가 어렵게 말을 전했다.
“가등섭을 제거하고 중국의 삼합회를 손에 넣는다면 적어도 조직원이 아닌 사람들에게 협박과 살인을 저지르는 일은 없도록 하겠소. 그러나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놈들을 대화로 상대하라는 것은 나더러 죽으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그 정도야 뭐.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등섭을 제거했는데 총재라는 양반이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면 어떻게 하지?”
“총재는 알력다툼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밀고 올라와서 자리를 차지하면 인정해주는 것이 삼합회의 불문율입니다.”
“알았어.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기로 하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적당한 방법을 찾아서 다시 만날 테니 그때까지 우리 인원이 보이는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카지노에 모시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쪽에는 우리 직원들이 못 들어가잖아?”
“보안요원들에게 따로 VIP룸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모시겠습니다.”
“그 정도면 알아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함께 몸을 일으킨 양서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말없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양서평의 눈빛이 나쁘지 않았다.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객실을 나섰고, 둘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후 7시까지 대송건설로 가야 하는데 저녁을 먹고 가는 게 좋겠다. 뭐 먹을래?”
“팥칼국수 어떠셔?”
“뭐?”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앞에 팥칼국수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비지도 좋고, 동지팥죽도 괜찮고. 어떠십니까?”
이놈 얼굴과 팥죽은 어쩐지 정말 어울리지 않는데?
“알았다. 가보자.”
천중명은 픽 웃으며 곽대출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
대송자동차의 공장과 판매망을 중단시킨 가등섭에게 뭔가를 갚아주기에 적당한 기회였는데 당장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동안, 천중명은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 사이에 예술의 전당 근처에 도착한 곽대출은 맞은편의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 차를 맡겼다.
뭔, 팥죽 집이 발레파킹까지.
둘이서 들어간 식당은 허름했다.
천중명은 8천 원짜리 동지팥죽을, 곽대출은 같은 가격의 팥칼국수를 주문했다.
“뭐냐, 이 이상한 선택은?”
천중명의 질문에 곽대출은 먼저 전혀 놈답지 않은 씁쓸한 미소를 그려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입니다. 그날 배 타고 섬에 갔었을 때, 천상기 회장이 총수님께 잘못했다고 우는 걸 봐서 그런지 자꾸 이게 생각났습니다.”
“별로 안 비싼데 자주 좀 사드리지?”
“여기 오는 게 그때는 그렇게 귀찮더라고. 진짜 별거 아니었는데 하필 꼭 여기 팥죽을 좋아하셔서는. 비만 오면 노인네가 이걸 먹으러 가자고 사람을 귀찮게 하는데 또 다른 곳은 죽어도 싫다잖아.”
천중명이 픽 웃을 때 팥죽과 팥칼국수가 나왔다.
솔직히 별로 당기지 않았던 음식이었는데 곽대출의 사연이 달라붙자 이게 또 색다른 맛으로 느껴졌다. 겉절이, 콩나물 무침, 무생채, 미역 초무침과 함께 둘이서 한 그릇씩을 거뜬히 비워냈다.
“너도 아들 생기면 여기 데려올 거냐?”
“에이! 난 안 그럴 겁니다. 어지간히 귀찮았어야죠.”
빠르게 먹고 나선 길이라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다.
차를 찾은 곽대출이 남부터미널 근처의 커피숍 앞에 멈춘 뒤에 달려가 커피를 두 잔 가져왔다.
S600을 구석에 세워 앞을 막아놓은 상태에서 후미진 담벼락에 기대앉아 커피를 마셨다. 아버지를 추억하며 저녁 먹고, 커피 한잔 마시는 여유를 즐기는 데 돈 정말 얼마 안 든다.
살아계실 적에 좀 더 기쁜 얼굴로, 원 없이 사드렸다면 훨씬 좋았겠다만, 그래도 곽대출은 팥죽이라는 추억의 음식이라도 가졌다.
있을 때 잘하는 게 최고라는 거지?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꺼내 천호득의 번호를 눌렀다.
- 어쩐 일이야?
“잘 지내시나 해서요. 불편한 건 없으세요.”
- 회장 덕분에 행복한 여행 중이야. 내가 맛있는 곳 많이 봐뒀으니까 언제 나랑 함께 돌아. 특히, 여수는 꼭 가봐야 할 일도 있고.
이렇게 길게 말했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천호득은 들뜬 음성이었다.
“그러세요. 제가 꼭 모시고 갈게요.”
- 다른 일 없지?
“방송에서 보시는 정도 일만 있습니다. 안심하시고 편히 계시다 오세요. 또 전화 드릴게요.”
- 그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이 커피잔을 잡았을 때였다.
지이이잉.
[회장님. 대송건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뵙고 모시고 들어갈까 합니다.]
유진교의 문자가 액정에 올라왔다.
[적당한 장소를 정해서 알려주세요.]
[확인해서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움직일 시간이었다.
천중명은 남은 커피를 여유롭게 입으로 가져갔다.
**
대송그룹 회의실은 불안과 긴장이 뒤엉켜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일이 일인만큼 계열사마다 회장과 부회장이 모두 참석해서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웅성댈 만도 하련만 사건이 워낙 충격적인 데다 오너의 일가의 일이어서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차, 컵, 물병, 주스가 회장단의 앞에 놓이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힘겨운 얼굴의 윤병지가 회장실에 들어와 윤성일이 앉았던 의자를 향해 움직였다. 윤병지는 원래 늘 윤성일에게 눌리며 심부름이나 하던 사람이었다. 호랑이가 없어진 상황에서 여우가 나서는 꼴로 보였는지 모여앉은 회장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늘 여러분을 뵙자고 한 것은 향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얇은 마이크의 끝에 상체를 기울인 윤병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윤성일 회장님과 윤세계 전 삼중호텔 대표가 불행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 대송그룹은 계열사들이 위기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윤병지는 확실히 목소리에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뭐를 어떻게 하자고, 하는 회장단의 눈초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서 그는 자꾸만 시선을 떨어트렸다.
“조만간 윤성일 회장님이 보유한 주식의 압류가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나는 이번 위기에서 그룹을 이끌기 위해 주식을 확보했습니다.”
회장단이 좌우로 고개를 돌려가며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대송건설의 이사회를 열어 내가 대표회장에 취임하겠습니다.”
윤병지가 입을 열었고,
“회장님께 허락을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주식을 확보하셨다는데 아직 금감원 신고도 없었습니다. 주식 지분을 얼마나 어떻게 확보하셨다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곧바로 다부진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세 분을 모셨습니다.”
윤병지가 구원을 바라는 눈으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직후였다.
천중명이 유진교, 최만호와 함께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천중명을 모를 대송그룹의 회장단은 없다. 유진교와 최만호 역시 그룹 임원들 사이에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윤병지가 일어서서 천중명과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옆으로 한 칸 움직였다.
중앙의 자리에 천중명이 앉았고, 오른쪽으로 윤병지와 최만호, 반대편에 유진교가 자리했다.
“반갑습니다. 지경그룹 천중명입니다.”
탁자에 양손을 올리고 깍지를 낀 천중명은 인사를 건네고는 회장단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고개를 떨구는 사람, 눈을 질끈 감는 사람, 멍한 얼굴인 사람, 회장단은 단박에 기가 꺾인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