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33화 (233/315)

# 233

233.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란 거 없다 (1)

오후의 중간쯤에 윤병지는 벤처사업부를 다시 방문했다. 그는 오전보다 깔끔한 얼굴에 새로 입은 듯한 셔츠와 넥타이까지 매는 성의를 보였다.

“회장님. 유진교 본부장과 통화해서 여기 계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잠시 시간을 요청 드립니다.”

벤처사업부의 직원이 지켜보는 회의실 앞에서 그는 깍듯한 태도로 고개까지 숙였다.

“들어오세요.”

노트북과 결재서류를 옆으로 미룬 천중명이 그를 맞았고, 테이블에 앉은 그의 앞에 주인영이 차를 놓아주었다.

“대송그룹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찻잔을 내려보았던 윤병지가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개인적인 욕심 따위 버렸습니다. 대송그룹의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그 역시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직원들은 죄가 없다는 회장님 말씀만 기억하고 왔습니다. 도움을 주십시오.”

중년 남자는 묘한 매력을 풍긴다. 처음 느낀 것은 유진교에게서였다. 그 뒤에 최만호에게서는 날카로움과 냉정함을 보았지만, 지금 윤병지에게서 보이는 인간적인 면을 보는 것이 천중명은 조금 더 좋았다.

개인적인 감상은 여기까지.

“원하는 걸 말씀해 보세요.”

“대송그룹의 계열사를 지켜낸 뒤에 지경그룹에 편입하라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윤병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직원들이 직장을 잃지 않도록, 계열사가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면 그 일을 마친 뒤에 물러나겠습니다.”

“이런 결심을 하신 계기가 있습니까?”

마치 새로운 임원을 면접하는 것처럼 천중명이 질문했고, 윤병지는 공손한 태도로 답을 내놓았다.

“그동안 윤성일 회장님을 보필하면서 저 역시 단 한 번도 직원들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늦었지만, 더는 그들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진솔한 답을 내놓은 윤병지의 입가가 가볍게 떨렸다. 분해서라 아니라 이렇게까지 속을 털어놓는 것이 처음이어서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가능하다면 허선영 씨에게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 일을 알았을 때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고 지켜보았으며, 그 뒤에도 사죄하지 못했습니다. 도와주시는 것에 상관없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지막 남은 명예를 지킨 뒤에 물러나리라 마음먹은 중년 남자를 천중명은 잠시 바라보았다.

“주식회사 지경이 확보한 대송그룹 계열사 주식의 의결권을 윤병지 부회장에게 일임하겠습니다.”

윤병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회장단 회의를 소집하세요. 아직 윤성일 회장이 대송건설의 대표회장으로 되어 있으니 이사회를 선임해서 공동 대표회장으로 선임되는 과정을 밟으시고, 나머지 일을 수습하세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법무팀장과 기획실장이 아직 윤성일 회장님을 위해 일하고 있어서 내부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천성적으로 지휘관이기보다는 참모가 어울리는 윤병지다운 고민이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횡령과 비자금 조성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그걸 발표하고, 그 금액을 추징하는데 협조하겠다고 발표하세요. 추징 후 남는 금액은 리콜과 급발진 추정 피해자, 결함으로 인한 사고 보상 등에 사용한다고 발표하시고.”

중환자실에서 버티는 윤성일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일 수 있었다. 천중명은 윤병지의 침묵을 이해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인정하고 추징에 협조한 뒤에 선처를 호소하면 윤세계의 형량을 최대 30년에서 50년 수준으로 낮출 수 있을 겁니다.”

“윤성일 회장님이 제게는 큰형님이 됩니다. 윤성일 회장님은 어떻게 판단하고 계십니까?”

“형량을 말씀하시나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천중명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50조 원의 횡령은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어서요. 중국과 전 세계의 법인에서 이익금을 받아 돌린 꼴이라 그건 나중에 상황을 보아야 할 텐데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윤병지가 한 줄기 희망이라도 달라는 투로 간절하게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윤성일 회장은 절대 살아서 교도소를 나오지 못할 겁니다.”

“하아-.”

아직 윤병지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회장님. 윤성일 회장님의 비리를 제 손으로 밝히는 일을 결심하는데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회장단 회의를 소집하면 그 첫 번째 회의에 함께 참석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세요. 쉽지 않은 결정일 테니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오후에 계속 이곳에 계십니까?”

“전화번호를 드릴 테니 전화로 말씀하세요.”

“예, 회장님.”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의 번호가 인쇄된 명함을 꺼내 윤병지에게 넘겨주었다.

**

벤처사업부를 나선 윤병지는 몇 번이나 마른 침을 삼켜가며 빠르게 걸어 탄천으로 향했다. 유진교와 통화하기 위해 잠시 켜 놓았던 휴대 전화기를 다시 꺼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빠아앙-!

도로를 건널 때는 자동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난 터라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내려가던 계단의 중간에 그는 걸터앉았다. 꽤 비싼 정장 바지가 망가질 수 있었다만, 그런 것 지금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고개를 감싸고 상체를 기울인 윤병지는 환한 대낮에 종합운동장이 보이는 탄천의 계단에 앉아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마주한 현실이 서러워서, 잘돼야 미국의 교도소에서 30년을 지낸 뒤에 나올 윤세계가 안 됐고, 이 와중에도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빠져나가려는 그룹 회장 윤성일의 모습이 속상해서 나오는 울음이었다.

왜 마지막까지 이렇게 합니까? 왜!

대송자동차그룹을 넘겨주고도 배운 것이 없었습니까?

미칠 것처럼 속이 답답해서 윤병지는 토하는 것처럼 울음을 쏟아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잔인한 일이었다.

이럴 때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기가 우는 것은.

혹시 몰라 울음을 억지로 삼킨 윤병지는 눈물이 흥건한 손을 넣어 휴대 전화기를 꺼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윤성일이었다.

그렇게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붓고도 필요하다고 여기면 언제고 전화를 할 사람이 그 말고 또 있겠나. 윤병지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음성이 확실히 이상했는데,

- 지금 법무팀장을 보낼 테니 만나. 만나서 이번 일은 그룹차원에서 따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발표하고, 세계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을 우리는 몰랐다고 주장해.

윤성일은 딸마저 버린 비정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지시를 건네고 있었다.

“그렇다면 세계는 아예 버리실 참입니까?”

- 버리긴 누가 버려! 천중명이 협박해서 대송자동차그룹을 넘겨주었고, 그 돈도 함께 넘겨주기로 했었는데 세계가 그걸 알고 분해서 달려가 막으려 했던 것뿐이야! 우리는 이미 대송자동차그룹을 넘겼으니 천중명도 사실상 공범인 거지!

“그래서 얻는 게 뭐가 있습니까?”

- 내가 나가야 세계를 데려올 것 아냐! 네가 인간이야! 그 불쌍한 아이를 미국 교도소에서 죽게 할 거냐고!

윤성일 역시 악에 받친 음성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윤병지는 마음속에 남았던 원망, 분노, 안타까움, 자책 따위의 감정이 단숨에 날아가는 희한한 느낌을 받았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직원들은 어떻게 하실….”

- 직원들을 어쩌라고! 임원들과 의논해서 이 위기를 넘겨야지!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사방에 널린 직원들을 도대체 왜 그리 걱정하냐고! 왜!

“회장님은 마지막 기회를 잃었습니다.”

- 봐라, 병지야. 뭐가 씌워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당신은 대송그룹의 회장 자격이 없어.”

윤성일이 대꾸조차 못 하고 있었다. 이 역시 윤병지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눈가를 닦으며 윤병지는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과분한 것들을 누렸어. 그러니 마지막은 그 부를 위해 함께 일해 준 직원들이라도 구해야지. 그게 사람의 도리야.”

- 너, 너, 이놈.

“다시 내게 전화하면 녹음해서 검찰이나 법원에 제출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세계는 내가 구해. 정당한 방법으로.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확실해.

윤병지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런 뒤에 실제로 전원 켠 상태로 주머니에 넣었다.

“후우-.”

그는 결심을 위해 마지막 남은 미련을 한줄기 숨에 길게 뱉어냈다.

**

윤병지가 나가고 난 뒤에 천중명은 결재판과 노트북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직후에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밖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부장 좀 불러줘.”

“예, 회장님.”

주인영이 곽대출을 불러 함께 다가왔다.

“주 과장. 여기 결재서류 아래층에 있는 비서실 직원 통해서 유진교 본부장에게 보내줘. 곽대출 본부장은 나와 잠시 갈 곳이 있으니까 함께 움직이고.”

“예, 회장님.”

지시를 마친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벤처사업부를 나섰다.

모처럼 둘이서만 움직이는 길이었다.

“어디로 가셔, 회장님?”

“양서평 부총재가 있는 호텔.”

“예에!”

곽대출은 어쩐지 제 역할을 다시 찾은 것처럼 생기 넘치는 얼굴로 차를 움직였다.

“회장님. 이번에 저도 랠리에 참가하는 건 아시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어? 여덟 명 간다고 이미 말했잖습니까?”

“너는 안 돼.”

장난기 가득한 눈짓으로 천중명을 흘겨본 곽대출이 운전을 위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상황 봐서 움직여. 유비캅이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양서평과 조양회를 그쪽에만 맡기기에는 좀 불안해. 그러니까 우선 일곱 명 보내고 너는 후발대로 가든가 해.”

“아이, 그런 거라면 미리 말씀을 하시지!”

“틈이나 줬냐?”

“이럴 때 보면 우리 회장님 참 속 좁으셔.”

“미친놈.”

둘이서 모처럼 킬킬거릴 때였다.

지이이잉.

“잠시만. 문자 하나 확인하고.”

천중명은 짧게 운 휴대 전화기를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회장님. 윤병지입니다. 회장단 회의를 오후 7시에 소집할까 합니다.]

글자 하나하나에 그의 굳은 결심이 묻어 있는 듯한 내용이었다.

[장소를 알려주세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대송건설 회의실입니다.]

방송과 언론사 기자들이 득실거릴 걸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저어질 일이었으나 약속했던 일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유진교 본부장, 최만호 대송자동차그룹 회장과 참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문자를 마친 천중명은 바로 유진교에게 전화를 넣었다.

- 예, 회장님.

“오후 7시에 대송건설 회의실에서 윤병지 회장이 대송그룹 회장단 회의를 주재합니다. 주식회사 지경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의결권 양도 서류를 작성해서 최만호 회장과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 준비하겠습니다. 다만, 그 회의에 참석하실 정도면 기자들에게 적당한 이유를 발표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혹시 내용을 생각해 둔 것이 있으십니까?

“대송그룹을 바로잡겠다는 윤병지 부회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하겠습니다. 자칫해서 대송그룹이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협조하는 정도로 준비해 주세요.”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내용을 곽대출에게 알려주었다.

“에이, 모자란 인간.”

그가 지적한 인간이 누굴 말하는 건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

함평으로 달리는 길이었다.

장만섭의 식욕에는 천상기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저놈은 앉은 자리에서 김밥 스무 줄을 먹어.”

“유지비가 많이 드네요.”

천상기가 독특한 감상을 꺼내놓았고,

“연비도 별로입니다.”

분위기를 눈치 챈 송달순이 추임새를 넣어서 웃음도 흘렀다.

“회장님.”

승합차의 가장 뒷줄에 앉은 송달순이 예쁘게 깎은 과일을 일회용 접시에 올려 앞쪽에 건넸고, 천상기가 그걸 얼른 받았다.

“호텔 예약은?”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장소로 정했습니다.”

천호득이 따지는 것처럼 시선을 뒤로 돌리자, “별이 네 개입니다.”하며 송달순이 얼른 답을 내놓았다.

“아버지. 드세요.”

고작 하루다. 그런데도 이젠 천상기가 권하는 과일을 받는 천호득의 모습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윤성일 회장은 빠져나올까요?”

과일을 먹으며 천상기가 자연스럽게 건넨 질문이었다.

“어려울 게다. 이럴 땐 차라리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는 게 좋은데 내가 아는 윤성일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여태 위기 때마다 잘못을 다른 이에게 넘겨 왔으니 이번에도 당연하게 희생양을 찾겠지.”

긴 답을 내놓은 천호득이 천상기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그게 궁금해?”

“전할 수 있다면 꼭 한 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얼른 잘못 인정하고 가진 거 내려놓으라고요. 움켜쥐려고 하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란 거 없다고요.”

“정말 그런 걸 느꼈어?”

“동생이 무섭잖습니까? 에효!”

“으헤헤헤.”

천상기의 넉살에 천호득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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