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232. 천중명을 몰아줄 수 있나? (3)
그룹 회장인 천중명과 부회장 역할을 혼자 다 하는 유진교까지 본사를 비우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천중명이 회의실에 앉아 서류를 검토할 때 유진교는 다시 본사로 출발했다.
3층의 사무실이었다.
안쪽에 본부장의 방이 있고, 바깥에 주인영이 메인 책상에 앉았으며, 그 앞으로 다섯 명의 직원이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옆으로 회의실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경그룹 회장이 그 회의실에 앉아 그룹발전본부장이 놓고 간 서류를 살핀다. 숨이 턱턱 막힐 일인데 한편으로 직원들이 언제 그룹 회장이 일하는 모습을 눈만 돌려서 볼 수 있겠나.
직원들의 복잡한 심정과 달리 방을 차지하고 앉은 곽대출이 뭐 마려운 강아지 표정으로 낑낑거리는 동안, 천중명은 노트북을 앞에 두고서 결재 서류를 하나씩 살폈다.
사각사각.
노크 소리조차 못 듣는다던 천중명의 결재 순간을 직원들이 자꾸만 곁눈질로 쳐다보았는데 주인영은 또 그걸 나무라지 못했다. 아차해서 천중명이 시선을 빼앗길 게 염려돼서였다.
하여간 그룹회장의 신임을 받는 부서장을 모셨더니 별별 경험을 다 한다.
침묵과 팽팽한 긴장 속에서 혹여 전화벨이 울릴까 다들 신경이 빠짝 곤두서 있을 때였다. 천중명이 시선을 들었고, 주인영을 시작으로 직원 다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센스 있게 주인영이 회의실을 향해 움직였다.
“곽 본부장을 불러줘.”
“예, 회장님.”
주인영이 사무실을 가로질러 곽대출을 데려다 주었다.
“들어와. 블라인드로 안을 가리고.”
“예, 회장님.”
잘 보이던 야동이 느닷없이 모자이크로 가려진 것처럼, 직원들이 실망한 앞에서 회의실 문이 닫혔다.
“오후 1시쯤에 양서평이 입국해. 도깨비들 정장 차림으로 바꿔서 두 명 붙이고, 나머지도 적당하게 예의를 잃지 않는 복장으로 주변을 지켜줬으면 싶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사흘 안으로 스웨덴에 갈 테니까 그것도 말해두고.”
“사흘입니까?”
“함께할 직원들과 인사도 하고, 랠리에 관한 브리핑도 해야 한다고 하니까 딱히 문제는 없어.”
“예, 회장님.”
곽대출이 마치 임무를 지시받은 대원처럼 답을 마친 다음이었다.
“직원들에게 일을 나눠줘. 맡겨. 네가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예?”
“담당을 주라고. 화장품, 전자, 기계, 차세대 에너지, 이런 식으로. 네가 먼저 다 익히려고 애쓰는 것도 좋은데 그렇게 하면, 직원들은 그저 단순하게 자료만 수집하는 일을 하게 돼.”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천중명의 조언을 들은 곽대출이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로 답을 요구했다.
“직원들의 표정에 자부심과 사명감이 없잖아. 브리핑을 받아. 직원이 추천하는 사업에 책임감을 가지고 달려들 수 있게. 본부장은 그 과정에서 부정이 있는지, 과연 이 사업을 끝까지 밀어줘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 공부하는 거고.”
“예, 회장님.”
지금까지 업무에 관해 천중명이 이렇게까지 권한 적은 없어서 곽대출은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본부장 바로 아래 과장은 직급이 약해. 그렇게 하면 계열사와 의논할 때 힘들지. 주 과장의 직급을 높여줘. 부장으로 해서 프로젝트팀을 관리하도록 하고.”
“본부장에게 그런 힘이 있습니까?”
“내가 왜 부장급을 안 보냈는데? 이사까지 승진시켜도 돼.”
“아!”
“다만, 그 승진에 관한 모든 책임이 벤처사업본부장에게 있다는 것만 잊지 마.”
“예, 회장님.”
곽대출의 답을 들은 천중명이 픽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냐.”
고개를 갸웃했던 곽대출이 밖을 슬쩍 돌아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진짜!’
‘내가 뭐랬냐? 그냥 나는 네가 공부하느라 코피 난 줄 알았다.’
‘그만 좀 하시라고!’
선생님을 피해 수업시간에 장난치는 학생들처럼 둘이서 소리 내지 못한 채 흐느끼듯 웃었다.
**
보도 방송은 윤성일과 윤세계의 사건을 종일 떠들었다.
처음에는 속보처럼 나오던 보도 내용이 이제는 전문가라는 패널을 앉혀놓기 시작하면서 자극적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윤세계 전 삼중호텔 대표가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어렵습니다. 윤성일 회장처럼 아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그날 뉴욕의 레스토랑을 예약해놓은 것까지 있어서 건강상의 이유를 들기도 어렵고요.]
패널 한 명은 남의 불행을 두고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들뜬 음성이었다.
[경제범의 경우에는 심신미약, 술에 취했다거나 약에 취했다,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미국의 재판에서 술이나 약에 취했다고 하면 더 큰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서 그랬다거나, 지시를 거절하지 못했다는 진술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앵커의 질문을 받은 패널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간혹 딸 같아서 엉덩이나 가슴을 만졌다는 변명을 하곤 하는데요. 미국 법정에서 그런 소릴 하면 오히려 30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습니다. 성인인 윤세계 씨는 혼자 미국에 가서 직접 변호사를 고용해 업무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네요.]
[협박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범죄를 거부할 여건이 충분하거든요. 그런 변명이 통하질 않아요.]
호텔로 돌아온 윤병지는 TV의 전원을 꺼 버렸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기가 찰 노릇이었다.
뇌졸중과 심장마비로 대화조차 어렵다는 윤성일의 번호로 계속 전화가 오는 것이 말이다.
1인용 소파에서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숙이고 앉았던 윤병지는 처절한 숨을 내쉬었다. 이 순간에도 지경그룹의 회장인 천중명은 오히려 대송그룹의 직원을 걱정하는데 도대체 윤성일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돼서 아직 저러고 있는 건지.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전화가 또 울렸다.
고개만 든 윤병지는 테이블에 올려진 휴대 전화기를 서글프게 바라보았다. 그래. 마지막으로 대송그룹의 회장이 어떤 인물인지, 그가 최후에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보고 결정하자.
윤병지는 손을 뻗어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왜 전화를 이렇게 안 받아?
고함을 지를 줄 알았던 윤성일은 이를 악문 게 분명한 음성으로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 내용은 알고 있지?
“예, 회장님.”
- 세계가 미국에서 저리 있는 동안, 누군가 지켜줘야 할 게 아니냐?
윤병지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 그룹도 생각해야지. 이대로 두면 대송은 살아남지 못해.
마지막에는 그래도 대송의 이름과 직원들을 챙기려는 건가, 윤병지가 작은 희망을 피워내는 순간이었다.
- 네가 꾸민 일이라고 진술하고, 미국에 다녀와.
숨이 턱 막히는 윤성일의 지시가 건너왔다.
- 내가 활동해야 세계를 구해내지. 너 역시 마찬가지고. 우선 가 있으면 내가 손을 써서 한국으로 송환되게 할 거고, 몇 달만 고생하면 사면으로 처리하마.
미국에 다녀오라고? 사면으로 처리한다고?
말이 다녀오는 거지, 출국해서 그렇게 진술했다가 잘못되면 윤병지는 미국 땅에 뼈를 묻을 게 확실했다.
- 자칫하면 국내에 있는 지분까지 모두 압류돼. 그것만은 막아야지. 법무팀장이 방법과 진술 내용을 알려줄 게다. 법인 설립, 비자금 조성, 모두 네가 했다고 하면 우리나라 검찰과 언론은 내가 알아서 하마.
윤병지의 침묵을 무시한 채 윤성일은 원하는 바를 꺼내 들었다. 그만큼 그의 현재 상태가 절박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 그런 뒤에 너와 세계를 한국으로 데려오마. 아무렴 내가 딸을 그렇게 둘 사람이냐. 너도 마찬가지고.
“회장님.”
- 그래. 지금 어디야?
“저는 못하겠습니다.”
날카로운 침묵이 고함보다 더 무섭게 윤병지의 귀를 파고들었다.
- 그럼 어쩌자는 게야? 이대로 다 죽자고?
“대송그룹의 직원이 전부 몇 명인지는 아십니까?”
- 뭐?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윤병지는 대놓고 숨을 “후!” 토해냈다.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졌는데 이유를 당장 알기는 어려웠다.
“이제는 우리도 바르게 살 때가 되었습니다.”
- 흐! 흐흐! 흐흐흐흐!
흐느낌 같은 웃음이 들렸다.
“형님들 다 내쫓고 회장님 혼자 쥐고 계시는 동안, 대송은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바로 잡을 때도 되었습니다.”
- 결국, 그런 거였어. 네놈이 천중명에게 붙었던 게야. 이 더러운 놈, 벌레처럼 거기 붙어서 나를 죽이고 대송을 처먹으려고!
“건강하십시오.”
통화를 마친 윤병지는 종료버튼을 오래도록 눌렀다.
뚜루룩.
전원을 아예 꺼버린 윤병지가 커다랗게 숨을 내쉰 뒤에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남은 대송과 직원들을 지켜야 할 때였다.
**
한 마리 바다표범과 펭귄, 그리고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아버지와 아들, 그림이 하여간 좀 묘했다.
덩치가 커다란 장만섭이 빨간 대야에 담긴 생선을 다 먹어치울 것처럼 손을 놀리는 옆에서, 새카맣게 탄 아들이 휠체어에 앉은 늙어버린 아버지의 입에 회를 넣어주는 게 말이다.
“영감님은 뭔 복이 많아서 이런 아들을 두셨어?”
“내가 말년 복이 좀 있지.”
“몸 불편한 아버지를 저리 챙기는 아들이 어디 있을까. 에효! 요즘 것들은 그저 돈 없으면 코빼기도 보기 힘드니 원!”
무쇠로 된 칼로 생선의 아가미 틈을 쿡 찌른 아주머니가 바가지로 물을 퍼서는 도마에 시원하게 끼얹었다.
“영감님도 잘해요. 봐하니 성격도 안 좋게 생겼구먼!”
장만섭이 고개를 돌렸고, 송달순이 눈치를 살피는 앞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겼어?”
“아무렴요! 눈 찢어진 거 하며 성격 좀 있겠네!”
“흐헤헤헤.”
세상에 저런 소릴 시장 바닥에서 들었는데도 천호득은 기분 좋은 사람처럼 웃었다.
“아들이 속 좀 썩여?”
“뭐래, 이 영감님이! 그래도 우리 아들은 지경케미칼 다녀요. 영감님 아들은 뭐하는데?”
“나는 아직 직장이 없어요.”
“흥! 속도 좋다!”
천상기의 답에 아주머니의 대꾸가 있었다.
“지경케미컬에서 뭐 하는데?”
“아! 이번에 정직원 됐어요! 내가 그 회장님 오시면 여기 있는 회를 다 대접한다고 떠들었다니까! 요즘 같이 제 배때기만 챙기는 세상에 아래 직원들을 그렇게 살뜰히 챙기는 분이 또 어디 있소!”
“그런 아들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면서?”
“그런데 이 영감님이? 일이 바쁘니까 그렇지! 우리 아들 없으면 기계가 안 도니까!”
“흐헤헤헤.”
거친 말투 속에서도 아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주머니의 눈가에 묻어난 감추지 못하는 행복과 뿌듯함을 본 천호득이 또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그 회장인가 하는 양반이 오면 진짜 여기 회를 다 주겠는 거지? 공짜로?”
“오시기만 하면 이게 다 뭐요? 내가 저기 있는 배 하나 싹 털어서 대접하지!”
터억!
말끝에 배를 가리키느라 휘두른 칼의 손잡이를 장만섭이 빠르게 낚아챘다.
“오매?”
분위기가 싸하게 변한 직후였다.
“아주머니! 이 사람은 먹는 거 떨어지면 화낸단 말이에요! 얼른 회 좀 더 썰어주세요!”
송달순이 재치 있게 대야에 있는 광어를 가리켜서 평화롭게 살던 생선 한 마리의 운명을 끊었다.
“저녁은 뭘 먹어?”
“함평에 들러 한우 먹고 섬진강 가서 자려고요.”
“호텔은 좀 좋은데 들어가면 안 돼?”
이 영감이 지금 무슨 호강에 초 친 소리를 하는 거야, 아주머니가 얄궂은 눈으로 천호득을 노려보았다.
**
별거 아닌 것에 감동할 때가 있는데 지금의 양서평과 조양회가 그랬다. 시커먼 남자 셋이 급하게 산 정장 차림으로 다가왔는데 양서평은 그들의 독기와 근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조양회가 감동한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 말을 전해들은 양서평은 굳은 얼굴이었다.
천중명이라는 남자, 진짜다.
힘으로 누르려고 하면 절대 고개 숙이지 않지만, 도움을 청하는 아군을 몰라라 하지 않는다.
“밖에 네 명이 함께 움직일 겁니다. 오해하지 마시라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조양회가 중국어로 건네주는 말을 들으며 양서평은 ‘하오!’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 남자들 역시 천중명과 마찬가지로 진짜배기구나.
깡패들과는 다른 움직임,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합류하는 두 명의 동선, 그리고 주차장에 서 있는 또 다른 두 명을 보며 양서평이 느낀 감정이었다.
어설픈 깡패들이 아니라 누구라도 마음먹는 순간 목줄을 끊어버릴 정도로 확실하게 훈련받은 몸짓이었다.
승용차에 올라탄 양서평은 굳은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중국에서도 못 본 용을 한국이란 나라에서 볼 줄은 몰랐다.
등에 올라타라고?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만도 다행이지 싶은데?
그러다가 양서평은 혼자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가등섭이 안 돼서.”
조양회가 이해하지 못할 대꾸를 내놓은 양서평이 재미있다는 투로 계속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