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31화 (231/315)

# 231

231. 천중명을 몰아줄 수 있나? (2)

여수에 도착한 날 저녁은 바닷가 근처의 횟집에서 먹었다.

가짓수는 많았는데 물기가 말라버린 듯한 단호박, 아침에 준비해두었던 것처럼 생기를 잃어버린 해산물들이 나왔다.

이런 음식에 천호득의 젓가락이 나갈 게 있겠나.

다만, 잃었다고 생각했던 아들과 하는 첫 여행이었고, 이제는 돈이 귀한 줄 깨달은 모습이라 여겨서 천호득은 그 반찬들을 조금씩 집어 입에 넣었다.

호텔 역시 천호득의 입장에서는 쪼글쪼글했는데 그래도 행복한 밤이었다. 트윈 침대가 있는 중급 호텔 방에서 천호득은 천상기와 함께 누웠다. 대화를 좀 나눌 요량이었는데 연달아 먼 길을 승합차로 달린 피곤함에 천호득은 그만 눕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아버지. 아침 드시러 가세요.”

벌써 아침인가?

지친 천호득을 천상기가 깨웠다.

“몇 시야?”

“6시 조금 넘었어요.”

뭔 아침을 이렇게 일찍 먹는다고.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천호득은 천상기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급히 꺼내 점퍼 주머니에 넣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손안에 쏙 들어가는 칼이었다.

‘이놈아! 아직도!’

먼저 괘씸했고,

‘그래! 더는 회장에게 부담 주지 말고 너랑 내 선에서 끝내자.’

그 바로 뒤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막말로 천중명이 아니라 늙은 천호득을 노린 것이 차라리 백번 낫다.

천호득은 장만섭의 도움을 받아 씻고, 천상기까지 나서서 입혀주는 옷을 걸쳤다. 지금에라도 “저놈 주머니를 뒤져!” 하는 한 마디면 칼을 빼앗겠다만, 괜히 천중명에게 또 짐을 지울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그냥 호텔에서 드실래요?”

“아니다. 어딘지 모르지만, 가자.”

천상기의 질문에 답하는 천호득의 음성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호텔을 나서서 승합차를 타고 달린 곳은 호텔에서 20분쯤 떨어진 어시장이었다. 바다를 코앞에 둔 어시장은 조립식 패널과 파란 기둥 위로 역시나 파란 지붕을 머리에 이고는 아침을 맞고 있었다.

“내가 모실게.”

천상기가 휠체어 뒤로 움직이는 순간에 천호득은 장만섭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덧없이 보낸 천봉서가 시간이 지날수록 커다랗게 가슴 한쪽에 자리해서 이리 아픈데 둘째까지 그리 잃으면 남은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밉든, 곱든, 이렇게 마음에 걸렸던 자식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삶을 마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한 번에 끝내줘.

늙은 것의 몸에 상처가 많으면 회장이 많이 힘들어할 테고, 먼저 간 큰형을 보기에도 미안해.

천호득의 심정을 아는지 천상기는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로 휠체어를 밀었다.

여긴가? 내 마지막이?

천호득이 처연한 심정으로 바다 저쪽에 올라온 태양을 바라볼 때였다.

끼릭. 끼리릭.

“아버지. 잠깐 기다리세요.”

휠체어를 고정시킨 천상기가 급하게 뒤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이 뭘 하려고?

덩치가 저래서 그렇지, 만섭이 저놈이 얼마나 몸이 날랜데?

결국, 상체를 뒤로 돌린 천호득은 멀리 있는 천상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무장갑을 낀 억세 보이는 아주머니가 좌판에 있는 빨간 대야의 굴을 비닐에 담아주자 천상기는 바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넘겨주었다.

지경그룹 명예회장 천호득이 파란 바다가 넘실대는 어시장 바로 앞에 있고, 그의 아들이 비닐봉지에 굴을 사서 가져오는 풍경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장 비서! 여기 초장 좀 열어!”

심지어 사각 틀로 된 초장을 장만섭에게 건네기까지 한 천상기가 천호득의 휠체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싱싱한 아침에 아버지 꼭 드리고 싶었어요. 이거 제가 굴 까서 번 돈으로 산 겁니다. 처음 땀 흘려 번 돈으로요. 이거 드시고, 전복죽 먹으러 가요.”

그런 뒤에 천상기는 새벽같이 점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가락 길이의 칼을 꺼내 굴 사이에 끼워 넣었다. 아침 햇살이 쪼그려서 굴을 까느라 고개를 떨군 천상기의 목덜미를 비출 때 천호득은 턱없이 울음이 터져 입술을 길게 내밀었다.

“아버지. 여기…?”

반으로 가른 굴 껍데기를 들었던 천상기가 움찔했다.

“굴 안 좋아하세요?”

“얼른…, 줘!”

장만섭이 가져온 초장을 찍지도 않았다.

천호득은 떨리는 손으로 굴을 받아서는 알맹이를 입에 넣었다.

“흐으으! 흐흐흐흑! 흐으으!”

“아버지, 잘못했어요. 그만 우세요. 예?”

몸을 일으킨 천상기가 바다를 바라보는 자세로 옮겨와 말라버린 천호득의 어깨와 상체를 감싸주었다.

“내가! 흐으으! 더 바라는 거 없어! 내가! 흐허! 흐으! 이제 정말 더 바라는 거 없다!”

“아버지-이!”

고개를 떨군 천상기의 눈에서 빗물처럼 눈물이 쏟아져 천호득의 휠체어를 적셨는데 아버지고, 아들이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앞에서, 새롭게 떠오른 태양이 큰아들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아버지와 뒤늦게 뉘우친 둘째 아들을 안쓰럽게 비춰주고 있었다.

**

워낙 빠른 출근인 데다 바로 코앞에 있는 벤처사업부에 도착했던 터라 곽대출과 옥상에 마주 앉았을 때는 오전 7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회장님. 도깨비 표 특제 커피입니다.”

벤처사업부 본부장이 타온 믹스 커피를 지경그룹 회장이 받았다. 역시나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든 곽대출이 맞은 편에 앉았다.

“윤성일은 저렇게 끝나나 봅니다.”

“어쩌겠냐. 손대지 않기로 약속했던 부분을 들춰서 저렇게 된 걸.”

“돈이란 게 뭔지, 몇 조씩 쥐고 있으면서 그게 그렇게 탐나나 그래? 못 가져봐서 그런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나오면 아침은 어떻게 하냐?”

“주 과장이 만든 된장찌개 맛이 죽여줍니다.”

종이컵을 들던 천중명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죽여주는 된장국을 아침에 먹었다?”

“아침은 나오는 길에 차에서 샌드위치로 먹었습니다.”

아휴! 이 팔불출아!

“그럼 샌드위치 먹은 거잖아?”

“아침은 그렇습니다.”

회장님은 뭘 드셨냐는 반격을 가할 것 같은 느낌으로 곽대출이 눈을 갸름하게 떴을 때였다. 된장찌개를 죽여주게 끓인다는 주인영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옥상에 올라왔다.

“회장님. 대송물산 윤병지 부회장이 아래에 와 있습니다.”

윤병지가 급한 줄은 알았지만, 오전 7시 50분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아래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기가 좋겠어. 곽 이사가 모셔와.”

“예, 회장님.”

표정을 바꾼 곽대출이 주인영을 따라 내려가서는 잠시 뒤에 윤병지와 함께 올라왔다.

“회장님.”

고개를 숙이는 윤병지는 병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척해진 몰골이었다.

“앉으세요. 답답한 사무실보다는 바람이나 쐴까 해서 이리 모시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회장님.”

벤치에 앉은 윤병지의 옆에 곽대출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놓아주고 조용하게 내려갔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호텔에서 지내느라 넥타이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이르다 보니 매장도 문을 안 열어서…….”

“이해합니다. 차 드세요.”

고개를 짧게 숙여 보인 윤병지가 종이컵을 들어 믹스 커피를 마셨다.

“회장님. 도와주십시오.”

그런 뒤에 그는 밑도 끝도 없는 청을 꺼내 들었다.

“대송과 우리 윤성일 회장님, 그리고 세계를 도와주십시오.”

나이를 떠나 천중명에게 매달리는 윤병지의 얼굴에 힘겨움이 잔뜩 달려있었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그 두 명은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윤 부회장님. 마지막 모습까지 실망스러운데 그룹을 쥐고서 누렸던 것에 대한 책임감 같은 건 정말 없는 겁니까?”

천중명의 냉정한 질책에 윤병지는 고개를 떨궜다.

“윤성일 회장과 윤세계의 지분이 압류를 통해 매각될 게 확실한데 그렇게 되면 당장 그룹 전체가 갈가리 찢길 테고, 몇 개는 아예 파산 수준으로 내몰릴 겁니다.”

설마 그 정도까지?

퍼뜩 들린 윤병지의 얼굴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연대 보증으로 줄줄이 묶였습니다. 은행의 독촉이 아니더라도 자생하지 못해 무너지는 계열사가 나오고 연대보증의 책임을 이기지 못해 덩달아 넘어지는 계열사도 나옵니다.”

윤병지의 얼굴이 좀 더 시커멓게 변했다. 모를 리 없는 사실일 텐데 새벽에 들은 윤성일과 윤세계의 소식에 정신이 팔렸던 모양이었다.

“윤병지 부회장님.”

“예, 회장님.”

“대송그룹의 계열사에 근무하는 직원이 전부 몇 명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죄송합니다.”

고개를 또다시 떨구는 윤병지 앞에서 천중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7만4천 명쯤 됩니다. 계약직이 20퍼센트나 됩니다. 퇴직금조차 없는 그들의 가족은요? 열심히 일하는 가장이 정직원이 되리라 기대하며 아끼고 줄여가며 산 결과가 회사의 파산이면 그들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죄송하다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윤병지는 고개를 떨궜다.

“50조 원을 빼돌린 분을 구해낼 힘이 내게 있다면, 나는 차라리 억울하게 직장을 잃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을 돕겠습니다.”

천중명의 냉정한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곽대출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온 유진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오세요, 본부장님.”

“예, 회장님.”

뒤늦게 고개를 든 윤병지가 유진교를 발견하고는 얼른 일어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커피는 역시 직급이 가장 밀리는 벤처사업부 본부장이 담당했다.

“나도 한잔 더 줘. 물도 한 병 주고.”

“예, 회장님.”

잠시 후, 세 사람 앞에 종이컵과 물병을 놓아준 곽대출이 얌전한 태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윤병지 부회장님.”

“예, 회장님.”

“명예롭게 퇴진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악역을 맡을 의향이 있습니까?”

“어떤 일인지…….”

“대송그룹의 지분을 대주주 물량 수준에서 인수해 두었습니다. 횡령과 조세포탈로 윤성일 회장과 윤세계의 지분이 없어지면 주식회사 지경의 의결권이 가장 높을 겁니다.”

유진교를 돌아보았던 윤병지가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가져왔다.

“무너지는 계열사가 나오기 전에 그룹을 지키세요. 그것이 지금껏 대송이란 이름 아래에서 열심히 일한 직원들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고, 도리입니다.”

마른침만 삼킬 뿐, 윤병지는 답을 하지 못했다.

“달려오신 게 윤성일 회장과 윤세계의 구명을 위해서라면 내겐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 도울 마음도 없을뿐더러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펼쳐질 잔인한 결과들을 윤병지는 이미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 아래로 짙게 내려온 다크써클과 희망을 잃은 눈이 그렇게 보였다.

“고민하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부스스 일어난 윤병지가 상체를 숙여 인사하고는 쓰러지기 직전의 몰골로 몸을 돌렸다.

“아!”

그러다가 생각난 것처럼 유진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옥상 문을 향해 움직였다.

“회장님. 결재 서류를 여기에서 보시겠습니까?”

“잠시만 여기 더 있다가 내려가서 보겠습니다.”

“예.”

천중명은 식은 커피를 들어 천천히 마셨다.

“윤성일 회장이 조성한 비자금의 규모와 방법까지 소상하게 보도에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언론에 나온 내용이라 아무리 애써도 덮을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돌이키지 못한다.

윤성일에게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은 다음에야 더는 방법이 없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것만은 피한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물을 마시던 유진교가 급하게 물병을 내렸다.

“병원에 입원해 쇼를 할 정도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예, 회장님.”

짧게 답을 한 유진교가 천중명이 바라보는 탄천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윤세계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아버지를 찾아 다리에 매달릴 그 예쁜 시기를 윤성일은 기억이나 할까?

열심히 일하고 들어와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눈으로 안아주는 아버지와 감당하지 못할 부를 조건으로 추악한 욕심을 강요하는 아버지, 딸은 둘 중 어떤 아버지를 가졌을 때 더 행복할까?

“이런 곳이 있다니 곽대출 본부장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부장님과 내 자리를 만들어두라고 할까요?”

“그러시면 제가 너무 미움 받지 않겠습니까?”

유진교의 농담에 둘이서 가볍게 웃었다.

“사흘 안으로 참관인이 출발했으면 한다는 신상훈 총괄사장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랠리에 참여하기 전에 얼굴을 익히고, 이용할 차량과 숙식에 관한 내용을 브리핑하고자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렇게 준비하라고 전하겠습니다.”

“비서실에서 양서평 부총재 측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후 1시 30분 인천공항 도착 예정입니다.”

천중명의 심정을 헤아린 것처럼 유진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보고들을 지나가는 말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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