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30화 (230/315)

# 230

230. 천중명을 몰아줄 수 있나? (1)

윤세계는 하루에 500만 원 한다는 호텔의 객실에 앉아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높기로 손꼽히는 도시, 뉴욕을 내려다보았다.

창밖으로는 꼭대기를 뾰족하게 세웠거나, 혹은 콘크리트 건물의 반쯤을 유리로 감싸놓은 독특한 외관의 건물들이 촘촘하게 서 있었고, 도로 사이에서는 ‘NYC TAXI’라고 쓴 노란 뉴욕 택시들이 줄줄이 움직였다.

꿈의 도시? 꿈은 개뿔!

윤세계는 인도를 가득 메운 채 걷는 사람들을 향해 비웃음을 쏟아냈다. 손바닥만 한 방에서 빌빌대다가 아침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걸으며 ‘뉴요커’라고 자위하는 게 꿈이라면 그건 인정이다.

그러나 말이다.

저 길을 걷는 수천 명 중에 한두 명이 소위 성공이라는 것을 할까, 나머지들의 인생은 빤한 게 아니겠나.

“쓰레기들.”

한국에서 당했던 수모를 보상받는 기분에 휩싸여서 윤세계는 허름한 복장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향해 거친 말을 쏟아냈다.

한 달에 1천만 원을 버는 사람이 한 푼도 안 쓰고 그 돈을 모으면 1년에 1억2천만 원, 10년이 모으면 12억 원이다. 당연하게 이자는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렇게 살면서 120억 원을 손에 쥐려면 100년이 걸린다.

100년이다, 100년.

죽지도 못한 채 25살부터 124살까지 일해야 하고, 그 대가로 받는 돈 월 1천만 원을 10원짜리 하나 안 쓰고 모아야 만질 수 있는 돈이 그렇다.

그런데 윤세계가 이번에 움직이려는 돈의 단위가 50조 원이다. 게다가 윤성일이 그녀의 앞으로 돌려주기로 한 돈이 5조 원이고.

“벌레들.”

윤세계의 눈에는 도로를 걷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졌다. 평생 고물고물 직장 다니고, 상사에게 굽신대며 버는 돈을 생각해보면 저 인생이 벌레와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저것들 중에 천만 원 줄 테니 옷을 벗으라면 하루에도 수십 명은 그 자리에서 홀딱 벗을걸? 거부해? 그럼 1억 준다고 하지, 뭐.

잊고 있었다.

천중명에게 워낙 호되게 당해서 그만 윤세계는 본인이 저들과 태생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서 우울해 했었다. 그러고 보면 윤성일이 그녀를 이리 보낸 것에는 아마 지금처럼 자존감을 되찾으라는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왕복 1천2백만 원 하는 1등석의 윤세계와 무릎도 제대로 못 펴는 이코노미클래스의 벌레들이 같을 리가 없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기가 죽어서 지냈던 건지.

‘천중명, 이 가증스러운 인간!’

지금이야 고상한 척하지만, 너도 돈의 위력과 그것이 주는 맛을 알게 되면 나와 다를 리 없을 거면서 도도한 척하기는!

“아흐! 오늘은 쇼핑이나 할까?”

어제 지시받은 일을 다 해놓은 윤세계는 기지개를 켜듯 팔을 위로 뻗으며 상체를 비틀었다. 윤성일이 이곳에 올 때까지 기다리라 했으니 그때까지는 미슐랭의 별점 콱콱 찍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긴 뒤에 뉴욕을 활보하며 쇼핑하는 것으로 에너지를 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진짜!”

윤세계가 날카롭게 휴대 전화기와 문을 노려보았다.

오늘 수행하기로 한 대송물산의 뉴욕 상사 주재원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윤세계는 기분이 확 상했다. 윤 씨 가문과 대송그룹 덕분에 먹고 사는 것들이 주인의 심기를 이렇게 건드려서야!

‘너는 오늘 두고 봐. 내가 아주 피를 말려줄 테니까. 뉴욕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게 만들고 말 거야.’

윤세계가 독기를 잔뜩 피워냈을 때였다.

딩동댕동.

그녀의 객실 벨이 울었다.

“흥!”

코웃음을 툭 뱉어낸 윤세계가 문으로 움직였다.

“누구세요?”

그리고는 문에 달린 렌즈를 통해 밖을 살폈다.

“윤세계 씨?”

동양인 남자가 윤세계의 시선에 들어왔다.

이 미친 인간이 감히 ‘윤세계 씨?’라고 불러?

너는 오늘 진짜 죽었어!

윤세계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홱 연 직후였다.

우르르!

백인 남자 둘과 흑인 남자 한 명이 들어와 그녀를 벽으로 밀쳤다.

“꺄악! 무슨 짓이에요?”

“윤세계 씨?”

“당신들 뭐야? 무슨 짓이냐고?”

“FBI 요원 테들린 바이어 킴입니다. 당신을 횡령, 조세포탈 혐의로 체포합니다.”

벽에 밀어붙인 것으로도 모자라 흑인 한 명이 윤세계의 머리를 볼이 우그러지도록 세차게 밀어댔다.

짜륵. 짜르륵.

삽시간에 손이 뒤로 꺾였고, 그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에, 윤세계는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

천중명이 삼성동 빌라에 들어선 것은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제 와요?”

“응. 저녁은?”

“서연 씨랑 먹고 들어왔어요. 얼른 씻어요. 차? 커피? 과일이 있습니다, 회장님.”

“출출해. 라면 먹고 싶어. 계란 넣은 거로.”

반칙인데요, 하는 표정을 지었던 허선영이 한 번은 봐준다는 얼굴로 주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간단하게 씻고 나온 천중명은 편안한 차림으로 홈바에 앉아서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여기요. 중명 씨는 자기 전에 커피 마시는 거 정말 괜찮아요?”

“한잔 마셔줘야 푹 잘 수 있는 거지.”

커피를 놓아준 허선영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고 난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잠시만. 여보세요?”

- 회장님, 김준후입니다. 윤세계가 뉴욕의 호텔에서 여기 시간 오전 8시 40분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짐작했던 내용이라 딱히 다른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 아시겠지만, 미국은 주주의 권익을 침해했을 때, 주주 한 사람당 죄를 모두 더해서 형량을 결정합니다. 대략 1만2천 년 정도 형이 나올 텐데 판사의 재량과 판례에 비추어볼 때, 2백 년이나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거의 확실합니다.

“윤성일 회장은요?”

허선영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범죄 금액이 워낙 크고 조세포탈 혐의까지 있어서 우선 송환요청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윤성일 회장의 경우에는 이쪽에서도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형량이 나올 거란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알겠습니다.”

- 회장님. 세금으로 추징되고, 남은 금액은 법인으로 귀속됩니다. 상황을 주시하고 움직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커피를 마신 뒤에 허선영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일이 좀 있었어. 윤성일 회장과 윤세계에 관한 일이야.”

그런 뒤에 천천히 지금 있었던 일에 관해 들려주었다. 윤세계가 체포되었다는 사실과 처벌이 어느 수준인지를 들은 허선영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천중명의 시선을 본 허선영이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안타까워서 그래요. 죄를 생각하면 뭐라 할 말은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무서운 형을 받을 일은 아니잖아요.”

무섭기도 하고, 윤세계가 안됐기도 하고, 허선영은 감정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

윤성일은 정수리로 벼락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는 자정이 다된 시간에 기획실장 우세환과 법무팀장 안소곤을 대송건설 회장실로 불렀다.

“어떻게 된 거야?”

“전화로 보고드린 내용 그대로입니다. 비자금 조성으로 인한 횡령, 조세포탈 혐의로 체포되었고, 증거가 워낙 확실합니다.”

“이익!”

“회장님. 우선 입원하십시오. 보도가 나가면 구속해서 미국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뭣이?”

윤성일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안소곤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면 버티겠는데 금액이 워낙 크고 사안이 중대합니다. 게다가 적대적 인수가 끝난 뒤에 자금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던 범죄여서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안소곤은 준비했던 것처럼 끔찍한 상황을 털어놓는데 막힘이 없었다.

“우선 입원하시고, 우 실장께선 뇌졸중에 심장마비가 겹쳤다고 발표하세요. 대화가 어려운 상황이고, 위중하다고. 아시겠습니까?”

“예.”

“회장님. 상황이 이보다 안 좋아지면 수술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의료진에게 부탁해서 심장이나 뇌를 수술해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윤성일은 차마 답을 하지 못했다.

“기억이 안 나신다고 하고, 우세환 실장이나 제가 찾아가도 절대 입을 열지 마십시오. 대신,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제가 가서 우세환입니다, 회장님 하고 말씀드리면 그때는 안심하고 대화하셔도 됩니다.”

안소곤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아차! 내게 한 가지 무기가 있는데!”

퍼뜩 생각난 것이 있는지 윤성일이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움직였다.

“지경의 천중명이 협박한 증거가 내게 있어! 비자금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걸 터트리겠다고 했거든. 내가 잘못되면 협박으로 천중명을 몰아줄 수 있나?”

대송자동차그룹을 넘긴 이유가 이거였어?

뒤에서 약점을 잡혀 순순히 넘겼었던 거야?

안소곤의 눈빛이 번득였는데 경황이 없는 윤성일은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여기에 세세하게 내용이 담겨 있거든. 윤병지의 집으로 찾아와서 건넸다니까 CCTV에 기록이 다 있을 게 아닌가. 이거로 천중명과 협상해 봐.”

내용을 궁금해하는 두 사람의 표정에 윤성일은 태블릿 PC의 전원을 켠 뒤에 중앙에 있는 화살표를 눌렀다. 화면이 바뀌자 윤성일은 두 사람이 보기 쉽게 태블릿 PC를 앞으로 내밀었다.

빰빰 빠빠빠바!

[날 사랑하신다 하니, 정말 그러시다니. 구름 타고 빛나는 하늘, 훨훨 날아갑니다.]

“이게? 이게 뭐야!”

윤성일의 놀란 소리가 비명처럼 울리는 집무실에 흥겨운 트로트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 사랑하신다 하니, 정말 행복하여서, 설레이다 떠는 가슴은 아픈 줄도 모른답니다.]

“이건 아냐! 이게 이럴 리가 없어!”

태블릿 PC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고함을 지르는 윤성일을 우세환과 안소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오라버니 어깨에 기대어 볼래요!]

음악이라도 먼저 멈추면 좋으련만 윤성일은 그마저도 짐작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

아침에 일어난 천중명은 가장 먼저 휴대 전화기를 확인했고, 다음으로 TV를 켜서 보도 뉴스를 틀었다.

[윤성일 회장의 횡령 보도가 나온 탓에 기자들이 몰려와 있습니다. 출근 전에 알려주시면 통제하겠습니다.]

유진교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는 동안에 TV 화면에는 병원 건물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윤성일 회장은 어제 자정을 넘겨 오늘 새벽 1시경에 뇌졸증과 심장마비 증세로 응급실을 거쳐 현재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습니다. 아직 정확한 상황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의사소통조차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병원의 모습을 보여주던 화면이 바뀌어서 홍보용으로 찍어놓은 듯한 윤세계의 자신감 넘치는 사진이 화면에 올라왔다.

[윤세계 전 삼중호텔 대표는 현재 미국에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어 이번엔 윤세계가 투숙했던 호텔의 모습과 경찰차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었다.

천중명은 TV를 끄고 출근을 준비했다. 둘이서 정장 차림으로 홈바에 앉아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마저 준비하고 와. 커피?”

“고마워요.”

어제 이미 사건 내용을 들었고, 일부나마 감정을 정리한 덕분인지 허선영은 염려했던 것보다 덤덤하게 사건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출근 전에 즐기는 커피였다.

“중명 씨. 한 번에 되지는 않겠지만, 나도 강해질 거예요. 그러니 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고마워.”

“조금만 더 지켜봐 줘요.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의 아내 자리에 설 만큼은 강해질게요.”

이런 허선영이 고맙고 아름답다.

그렇게 차를 마신 뒤에 둘이서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천중명은 먼저 허선영을 보낸 뒤에 여유 있게 출발했다. 그리고는 본사 건물로 향하는 승용차에서 휴대 전화기를 꺼냈다.

- 예, 회장님. 유진교입니다.

“기자들이 많은가요?”

- 보고 드렸을 때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어느 정도 감안하고 출근하시거나 아니라면 삼성동의 벤처사업부에 계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결재 서류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본부장님 판단은 어떠세요?”

-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굳이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화제에서 한 걸음 피하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삼성동 벤처사업부에 있겠습니다.”

- 예, 회장님. 서류 준비해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삼성동 벤처사업부로 바꾸도록 알려주었다.

화가 나면 이마가 빨갛게 되던 윤성일이 밤사이에 뇌졸중과 심장마비 증세로 말을 잃을 정도란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건지, 천중명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승용차가 종합운동장을 거쳐 커다랗게 방향을 틀 때였다.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 전화기에 문자가 들어왔다.

[회장님. 대송물산 윤병지 부회장이 꼭 시간을 내주셨으면 한다며 제게 직접 전화했었습니다. 현재 호텔에 있다고 합니다.]

유진교가 보낸 문자였다.

윤성일이 무서워서 호텔 생활을 했던 것이 윤병지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모양새였다.

엎드리면 코앞에 있는 벤처사업부여서 도착하는 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라 천중명이 들어서자 직원 한 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상에 있을 테니까 본부장 나오면 그리 오라고 해줘.”

“본부장은 이미 출근해 있습니다.”

곽대출이 벌써? 부지런한데?

천중명이 계단을 올라가는 사이 3층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곽대출과 주인영이 급하게 나왔다.

“커피 한잔 마시고 싶은데? 옥상에서.”

“예, 회장님.”

보도를 들었는지 곽대출이 두말하지 않은 채 옥상으로 향했고, 고개 숙여 인사한 주인영은 사무실 앞에 공손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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