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229. 잘 가. 잘 살고. (3)
송문철은 점심을 30분쯤 남긴 시간에 집무실에 도착했다.
“송 회장님. 혹시 점심 약속 있어요?”
“아닙니다, 회장님.”
“그럼 우리 도시락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천중명은 부속실 직원에게 도시락을 부탁한 뒤에 송문철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준비한 자료입니다.”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송문철은 들고 온 가방에서 결재판을 꺼내 앞에 놓아주었다. 부속실 직원이 커피를 가져오는 동안, 그리고 그 뒤에 대략 5분쯤 천중명은 송문철이 펼쳐준 자료를 살폈다.
진짜, 이 인간들의 삶에는 아픈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는 과정이 아예 없는 건가?
지분율을 살피던 천중명은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언론을 통해 새롭게 변모하는 대송그룹이니, 윤성일 일가 지분율 높인다, 따위의 기사를 연일 내보내더니,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연기금과 펀드의 주식 매입을 마치 대주주 지분인 양 꾸며놓았다.
“이건 뭡니까?”
천중명은 비고란에 적힌 내용에 관한 설명을 요구하며 고개를 들었다.
“적대적 인수를 계기로 그룹의 경영환경이 어려워져서 체질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정직원을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그 부분 때문에 대송그룹 내부에서도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친 인간.”
천중명은 거친 말을 툭 뱉어냈다.
똑똑똑.
그리고 그때 회의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점심 준비했습니다.”
“지금 주지.”
천중명은 들여다보던 결재판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나마 도시락이 들어오면서 치밀었던 화가 가라앉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드세요. 들면서 이야기하죠.”
궁중 도시락 세트를 송문철에게 권한 천중명이 젓가락을 움직여 밥을 떴다.
“윤 씨 일가가 가진 대송의 대주주 지분보다 대략 1퍼센트 이상 수준으로 지분을 매입할 생각입니다.”
“전 계열사를 말씀하십니까?”
음식이 입에 있어서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5퍼센트 이상이 모두 다섯 곳이 있습니다.”
“금감원 신고 때문이라면 그 다섯 곳만 4퍼센트 수준에서 매입하는 거로 하죠.”
“예.”
천중명이 보기에 갈비를 집으려 했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답하기 바쁜 송문철은 젓가락의 방향을 틀어 멸치조림을 집었다. 이래서는 식사도 의논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겠다.
“드시면서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도시락을 주문한 겁니다. 처음이라 불편한 모양인데 그런 거 따지면 식사 함께 못합니다. 고기 드세요. 제법 맛있습니다.”
어색하게 웃은 송문철이 적당하게 잘라놓은 갈비를 집었다.
“회장님. 자동차그룹을 인수하셨던 것처럼 남은 대송그룹도 계획에 넣으셨습니까?”
“그렇게 될 것 같네요.”
이제야 음식을 먹으면서도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덩치를 키우는 일 따위는 그리 관심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협하는 어떤 대기업집단이나 경영자도 용서할 마음은 없습니다. 대송은 그 본보기쯤 됩니다.”
송문철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인공지능을 포함한 시스템의 발전이 계속 이루어집니다. 물류창고는 말할 것 없고, 전화 응대조차 언어인식 시스템이 담당합니다. 남은 게 뭐가 있을까요?”
회의실 창밖에서 보면 도시락을 먹으며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텐데 내용은 묵직했다.
“앞으로 30년? 늦어도 50년 이후에는 사람의 형태를 갖춘 로봇이 서비스를 담당하는 시대가 옵니다.”
“4차 산업 혁명을 말씀하십니까?”
“같은 맥락이죠. 그러나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로봇이 하는 축구와 야구 결승전을 보며 흥분할 수 있을까요? 감동은 결국 그 모든 것을 토대로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에게서 나옵니다.”
“VIP 고객을 상대하는 매니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그렇죠. 이것도 50년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 뒤가 어떻게 될지를 준비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될 거고요.”
음식을 삼킨 송문철이 복잡한 표정으로 물을 마셨다.
“고객의 감동을 선사할 최전선에 직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그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결국, 고객의 감동은 직원의 응대에서 나오니까요.”
이제야 송문철은 천중명이 불쑥 뱉어냈던 “미친 인간.”이란 거친 말을 이해한 얼굴이었다. 그가 빙그레 웃는 것을 보며 알았다.
“회장님께 늘 놀라고, 배우는 느낌입니다.”
“고기 다 안 드시면 메뉴 선정이 잘못됐나 하고 부속실 직원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니 당장은 이걸 말끔히 먹는 게 첫 번째입니다.”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던 송문철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다시 놀렸다.
“오후부터 주식을 매입하시죠.”
“알겠습니다, 회장님.”
“주식회사 지경 계좌를 이용할 생각이니까 남은 일은 유진교 본부장과 의논해서 처리하세요.”
“예, 회장님.”
부속실 직원들의 고민을 덜어주겠다는 것처럼 송문철은 부지런히 음식을 입에 넣었다.
**
최근 경제 방송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경그룹에 보도가 집중되었다.
[이어서 지경리온자동차의 트럭 랠리에 관한 소식입니다. 스웨덴 현지에 나가 있는 정명식 기자입니다. 정 기자. 오늘 외신에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에 관한 기사가 크게 나왔는데요.]
[그렇습니다. 지경리온자동차 신상훈 총괄사장을 취재한 로버트 페이셔 기자의 기사가 세계적인 경제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화면이 잡지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Let’s do it! 이라는 제목을 우리말로 바꾸면 합시다! 정도 되겠습니다. 이 기사에서 로버트 기자는 지경의 정신이 합시다, 자신 있다면, 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정 기자. 그런데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고 들었습니다.]
[자동차업계와 경제계에서는 새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무리한 목표를 앞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기자는 우려 섞인 전문가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지경리온자동차는 이번 랠리에서 유해물질을 검색하는 장비의 수치를 방송사에 실시간으로 제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참가하는 이번 랠리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경리온자동차의 향후 10년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도는 한동안 랠리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신상훈은 테스트 도로와 유해물질 측정기의 수치를 번갈아 들여다보며 긴장을 풀지 못했다.
벌써 3시간째 주행이었다.
“연비는요?”
“리터당 4.5킬로미터까지 올랐습니다.”
신상훈의 질문에 지경리온자동차의 엔지니어가 수치를 확인한 뒤에 답을 건네주었다. 화물을 싣지 않은 데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평균 연비인 리터당 3.5킬로미터보다 높게 나왔다.
“후-.”
신상훈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리모컨을 잡았다.
“배터리로 전환하겠습니다. 전환한 뒤에 제동장치나 조향장치, 기타 안전장치에 무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2차 테스트였다.
띠루룩.
“전환하겠습니다.”
드라이버의 무전이 들린 직후에 통제실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크르릉! 철컹! 크아아아앙!
요란한 엔진음이 통제실에 들린 다음이었다.
거짓말처럼 트럭에서 들려야 할 엔진음이 사라졌다.
띠루룩.
“전환했습니다. 계기판과 모든 장치가 정상 작동 중입니다. 트레일러가 이렇게 조용하게 주행할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들뜬 드라이버의 음성이 그가 느낀 흥분을 고스란히 통제실에 알려주었다.
두 번째 고비를 넘겼다.
흥분을 억누른 신상훈이 무전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출력은 어때요?”
띠루룩!
“총괄사장님! 드라이버 경력 27년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출력에 전혀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건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울컥한다, 드라이버의 감동을 전해 듣는 일은! 이 감동을 천중명에게 바로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신상훈은 먹먹한 얼굴로 테스트 도로를 달리는 트럭을 바라보았다.
“배터리 상태는요?”
“현재까지 1.3 퍼센트 사용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가 질문을 던졌고, 엔지니어가 빠르게 답했다.
신상훈이 달리는 트럭을 바라볼 때였다.
“합시다! 자신 있다면!”
누군가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기사에 나온 말을 커다랗게 외쳤다.
**
오후 2시경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액정에 조양회의 이름을 올려놓은 휴대 전화기가 책상에서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조양회입니다. 내일 오전 10시 비행기로 양서평 부총재를 한국으로 모실 계획입니다. 다만, 회장님께서 방문을 요청했다고 보고 드릴 생각이어서 그 점을 허락받고 싶습니다.
간단한 안부조차 없이 내용이 건너오고 있었다. 그만큼 조양회 쪽의 사정이 급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조 비서.”
- 예, 회장님.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죄송합니다, 회장님. 지난 통화에서 말씀드렸던 것이 있어서 부탁드렸던 것이지, 절대 회장님을 쉽게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게 아냐. 양서평 부총재가 과연 조 비서를 희생시켜가면서 한국에 몸을 피하는 것을 원하겠느냐는 거지.”
당장 대꾸가 없었는데 어쩐지 조양회가 눈을 껌벅이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천중명은 가볍게 웃었다.
“양 부총재가 조 비서를 잃었는데도 내게 몸을 숨긴 채 시간을 보낼 사람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 회장님께서 붙들어주시고, 상황을 일러주시면…….
“나도 곽대출이라고 한 명 있지. 그 친구가 조 비서처럼 행동했다면 저승에라도 뛰어가서 목을 움켜쥘걸? 그러려면 내가 먼저 죽을 길로 달려들어야 할 테고.”
또다시 답이 없는 조양회를 향해 천중명은 말을 이었다.
“함께 건너와.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통역을 이용하기도 어려우니까 조 비서가 필요해. 그리고 조직원들을 아낀다면 일단 충돌하지 말고 피해 있으라고 해.”
- 회장님?
“우리 미라클이나 메모리를 거래하는 직원들이 위험할 수도 있나?”
- 그렇지는 않습니다, 회장님. 그 수준까지 일을 벌이면 가등섭 부총재 역시 처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천중명은 창을 향해 책상에 기댔다.
“그렇다면 그곳에 남을 조직원들에게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하고, 함께 건너와. 아니라면 저녁 비행기로 돌아간 양 부총재를 만나게 될 거야.”
좋아서였을까, 고마워서였을까.
가볍게 웃는 소리가 먼저 들렸고, 이어서 “모시고 들어가겠습니다.”하는 조양회의 답이 있었다.
“도착하면 비서실에 연락해.”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호득의 전화가 바로 있었다.
“여보세요?”
- 나다. 지금 출발한다.
머리, 꼬리 다 자른 천호득의 투박한 말이 전화기를 건너왔다. 그런데도 그 짧은 말 속에서 신이 난 천호득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어디로 가세요?”
- 여수라고 하네. 덩치 큰 아이와 작은 아이도 함께 간다.
“아버지.”
- 왜? 바빠?
“함께 모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멈칫하는 침묵이 먼저 건너왔고,
- 시간 봐서 전화할 테니 그리 알아.
전혀 엉뚱한 대꾸와 함께 전화가 툭 끊겼다.
그래. 이래야 꼬장꼬장한 천호득이지.
천중명이 픽 웃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예 몰아서 통화하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손안에 든 휴대 전화기가 또 울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김준후입니다. 윤세계라는 분이 마지막 지시를 마쳤습니다.
조양회에 천호득은 그렇다 쳐도 윤세계와 관련된 일에는 천중명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 회장님?
“마지막 지시를 마쳤다면 다른 방법은 없다고 봐야겠지요? 그쪽 변호사들도 부담스러워할 지시 아닙니까?”
- 이곳 변호사들은 윤세계가 의도를 알려주지 않았고, 등기 이사들의 이름만 변경하는 통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거라서 전혀 문제없습니다.
“윤세계가 받을 처벌이 어느 정수 수준인가요?”
- 판례로 볼 때, 조 단위의 조세포탈과 횡령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나 200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50조 원이면 윤세계는 절대 살아서 나오지 못합니다.
천중명은 창밖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이 높다란 빌딩 숲과 화려한 도시에서 얼마든지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뭐가 그리 욕심나서 인생을 이렇게까지 망치려는 건지.
휠체어 타고, 환자복 입고서 쇼를 벌인 뒤에 적당히 빠져나오는 건 우리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니까!
“후-!”
천중명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회사와 주주들에게 돌아가야 할 50조 원을 횡령했고, 정상적으로 돌려놓으려던 그 돈을 또다시 중간에서 가로채려 움직이고 있었다. 알고 했든, 지시를 받아서 했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처리하세요.”
- 예, 회장님. 보고드리겠습니다.
휴대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자세로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