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228. 잘 가. 잘 살고. (2)
늙었다. 확 늙어버렸다.
언제까지 꼿꼿할 줄 알았던 천호득이 몇십 년은 나이 든 얼굴로 휠체어에서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아버지-이!”
부르고서야 알았다. 천상기는. 아버지란 말이 주는 든든함과 그 든든해야 할 아버지의 늙어버린 얼굴이 얼마나 서럽고 아픈 것인지를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놈아!”
휠체어 앞에 무릎 꿇은 천상기의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을 천호득이 감싸듯 붙들었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 왜!”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아버지!”
바다 저 끝에서 시작한 노을을 받으며 늙은 아버지는 다리에 매달려 우는 나이 든 아들의 머리와 등을 쓸어댔다.
“이놈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꼬.”
“흐으으. 흐으. 흐으으.”
천중명이 나타났다.
섬에 있던 남자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무서운 곽대출과 장만섭이 주인이라 부르는 사람이었고, 천상기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한 남자요, 아들이며, 동생이었다.
그 독한 인간들이 바른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떠나보내온 강갑수는 고개를 모로 떨군 채 코를 훌쩍였다.
“상기야. 이제 아버지하고 있자.”
“훌쩍!”
코를 들이마신 천상기가 서글픈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같이 갈 거지?”
“그래도 되겠어?”
“우리도 남들처럼 살자. 먹고 사는 일 걱정 없는데 뭘 더 욕심내?”
“고마워.”
천중명의 승낙을 받은 천상기가 턱없이 천호득의 다리를 주무르며 또 울음을 터트렸다.
천중명은 손을 뻗어 천호득의 어깨를 감싸듯 잡아주었다. 그의 감정이 너무 달려가고 있어서 혹시라도 저혈압 쇼크가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돼서 그랬다.
어깨와 목을 주무르는 천중명의 손을 엇갈리듯 팔을 든 천호득이 꼭 붙들었다.
“출발하지.”
“예, 회장님.”
지시를 받은 곽대출이 자갈밭 해변에서 지켜보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말 한마디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천중명이 움직여 천상기를 일으켰고, 장만섭이 눈치껏 휠체어를 틀었다.
배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코를 훌쩍인 천상기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잘 가, 잘 살아.’
코 아래를 문지른 강갑수가 손을 흔들어주었고, 주변에 서 있던 남자들은 처음 보여주는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푸른 물결 춤추는 섬을 떠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굴을 까지 않아도 될 테고, 잠자리, 세 끼 식사도 다른 이들 부러워할 수준인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몇 걸음을 더 걷던 천상기가 뒤를 돌아보았고, 느닷없이 자갈밭을 향해 달렸다. 천중명이 돌아보았고, 곽대출이 몸을 돌렸으며, 장만섭이 휠체어를 돌려 달려가는 천상기를 지켜보았다.
자각자각! 자각자각!
자갈밭을 달려간 천상기가 강갑수의 앞에 섰다.
“나, 다시는 예전처럼 안 살 거야. 그러니까 적어도 한번은, 살면서 한 번쯤은, 얼굴 보여주라.”
강갑수의 눈이 왈칵 붉어지는 것을 본 천상기가 울음을 꾹 삼켰다.
“나, 잘 사는 것도 한번은 봐줘야지. 응? 한 번만 보자.”
천상기가 당부를 절절한 얼굴로 전한 다음이었다.
두 걸음을 옮겨 바싹 다가선 강갑수가 손을 뻗어 천상기의 뒤통수를 붙들고는 이마와 이마를 붙였다.
“상기 형. 내가 한 번은 꼭 찾아갈게. 정말 잘 살아주라. 나 이제 아무도 없는데 그냥 형 생겼다고 생각할게. 부탁이다, 형. 정말 잘 살아.”
“그래. 꼭 와. 꼭 보자.”
강갑수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다짐을 전한 천상기가 몸을 떼고는 우두머리와 남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각자각. 자각자각.
그런 뒤에 천상기는 자갈을 밟으며 배로 움직였다.
“후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호득이 떨리는 손을 움직여 천중명의 팔을 붙들었다.
“고맙네, 회장. 감사하네, 회장.”
코를 훌쩍인 천호득이 다시 기다랗게 숨을 내쉴 때 천상기가 배에 올랐다.
**
힘겹고 감정 복잡한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천중명과 허선영이 새벽같이 평창동에 들렀다.
감정을 추스른 천호득과 새카맣게 타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 꼴을 갖춘 천상기, 그리고 이은명이 두 사람을 맞았다.
아침을 먹기 전에 천상기와 천중명, 허선영이 맞절을 했고, 그 뒤에야 다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색하지, 더럽게.
인간말종으로 지내던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다고 한들 천봉서가 죽었고, 온갖 패악을 부리던 강승애가 교도소에 있는데 주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디 쉽겠나.
모두가 노력한 아침 식사는 그렇게 불편하기 그지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어색하기 그지없이 끝났다.
“먼저 출근해. 나는 형과 의논할 일이 있어.”
“그래요, 그럼. 아버님. 아주버님. 저는 이만 출근하겠습니다. 어머니, 출근할게요.”
허선영이 눈치껏 평창동을 나섰고, 차를 준비해 준 이은명은 슬쩍 자리를 비켰다. 셋이서 차를 마신 다음이었다.
“아버지. 형과 2층에서 잠시 이야기하고 내려오겠습니다.”
“그럴래?”
걱정스러운 천호득을 두고 천중명은 천상기와 함께 2층의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좀 잤어?”
“못 잤어.”
테이블에 앉아 던진 천중명의 질문에 천상기가 풀죽은 음성으로 답했다.
“어제 거기 있던 남자가 이마 마주 댄 거. 그게 반드시 살아서 다시 보자는 뜻인 건 알아?”
천상기의 고개가 불쑥 들렸다.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라 절대 마음 잘 안 여는데 그걸 보고나니까 한 번쯤은 믿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 이제 회장 자리 같은 거 안 바라. 솔직히 말해서 용인에서 그리 넘어갈 때 나는 절대 네 적수가 아니었다는 것도 알았고. 그러니까…….”
“지경저축은행에 지난번에 가져왔던 돈 2천억 원 넣어뒀어. 회장도 대행체제로 끌고 왔으니까 일주일 뒤에 발령내면 그걸 맡아. 거기까지야. 만약 또 그 이상을 넘보려고 들면.”
놀란 얼굴의 천상기를 향해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요즘 급격하게 약해지셨어. 저축은행 맡아서 정직하게 생활하고, 아버지 곁을 지켜드려. 맡기 싫어도 맡아. 정직하게 일하는 모습도 보여드려야지.”
천상기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다시 찌르는 인간들이 나타날 거야. 난 그게 더 좋아. 적어도 내 뒤통수 칠 놈들이 누군지 알 수 있으니까. 왜 이런 말 하는지 알지?”
“내가 추하게 살았더라. 섬에 가서 확실히 알았어. 몸이 더러운 건 씻으면 되는데 사는 모습이 더러운 건 씻을 방법도 없더라고. 후-. 지켜봐. 원래는 저축은행도 거절해야 하는데 아버지 보시기에 그게 낫다니까 맡을게.”
말을 마친 천상기가 생각난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일주일 뒤라고 했는데 시간을 조금만 더 주라. 아버지 모시고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어.”
천중명의 시선을 본 천상기가 씁쓸하게 웃었다.
“대게도 먹으러 가고 싶고, 한우 유명한 곳에 가서 고기도 구워 먹고, 꽃구경도 가보고 싶어서 그래. 말 한마디면 다 구해지긴 하지만, 사람들 틈에서 먹는 것도 해봐야지.”
기가 차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처롭기도 했다. 그러면서 또 사람 변하는 거 한순간이구나 싶어서 천중명은 픽 웃었다.
“알았어. 그럼 아버지 모시고 실컷 돌아보고 그 뒤에 알려줘. 그때 발령낼 테니까.”
“40년 기다리라더니.”
“아, 진짜!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신다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상기와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은 것이 말이다.
“아래 덩치 큰 비서하고…….”
“장만섭, 송달순.”
“그래. 장 비서와 송 비서, 그리고 차는 내가 알아서 쓴다.”
“그것도 나한테 허락받을 생각이었어?”
“말을 또 그렇게 하냐?”
역시 쉽지 않은 인간 천상기의 대꾸에 천중명이 웃음을 터트렸고, 천상기가 속없이 따라 웃었다.
“무슨 말이 그렇게 재미있어?”
그리고 그 직후에 더는 기다리지 못한 천호득이 장만섭의 손을 빌려 휠체어를 탄 채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 형이 아버지 모시고 들르고 싶은 곳이 많답니다. 그거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어디를?”
장만섭은 바로 내려갔다.
“해안도로 타고 전국 일주하려고요. 한우도 먹고, 회도 먹고, 게도 먹고, 그렇게 한 바퀴 모시고 다니려고요.”
“나랑?”
“예, 아버지.”
천상기가 스스럼없이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래도 되겠어, 회장?”
“안 된다고 말씀드리면 안 가실 거예요?”
“그건 아니지! 흐헤헤헤헤헤!”
아버지의 웃음을 아들 둘이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평창동 저택의 2층에서 펼쳐지리라고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
섬에 다녀온 다음 날은 마침 햇살이 좋았다.
사나이 곽대출은 옥상에서 검고, 인상 더러우며, 사납게 생긴 일곱 명과 벤치에 둘러앉았다.
“프랑스에서 출발해서 아프리카에 있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트럭 경주거든. 코스에 험한 산도 있고, 진흙탕도 있는 모양인데 중국 삼합회의 독한 애들이 온단다.”
“몇 명이나 됩니까?”
“그건 조금 더 지켜봐야 정확한 인원이 나와. 출국은 닷새 뒤에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내일 방지병원에 가서 예방접종해.”
우두머리의 질문에 곽대출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무기는 어떻게 합니까?”
“회장님만 이 일을 알아. 그러니 트럭 경주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받기 어려워.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프랑스와 아프리카에서 구해볼 테니까 맡겨둬.”
그 뒤에 곽대출은 2주에 걸친 대략의 일정에 관해 설명했다.
“장만섭 선배도 갑니까?”
“아니.”
곽대출의 답을 들은 우두머리가 안심이라는 듯 웃었다.
“왜?”
“그 선배는 너무 먹어서 음식을 많이 준비해야 하잖습니까?”
이번엔 곽대출이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괜히 출국 전에 엉뚱한 사고 쳐서 문제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지내.”
곽대출의 당부를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
천중명은 오전 10시 30분에 평창동을 나섰다.
평소보다 결재가 좀 늦어지긴 했다만, 이런 날은 특별한 경우였고,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도 아니었다.
승용차의 뒷좌석에 앉은 천중명이 차에 두었던 대송자동차의 자료를 살필 때였다.
지이이잉.
[윤세계 양이 미국에 있습니다. 현지 변호사를 통해 페이퍼컴패니의 이사진 명단을 교체할 준비를 지시했고, 조세회피처와 스위스의 은행에 새로운 계좌를 개설하기 위한 서류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황성규의 연락이 있었다.
지이이잉.
[거양자동차에서 가등섭이 포함된 트럭 랠리 참관인 15명의 명단을 제출했습니다.]
곧바로 두 번째 문자로 들어왔다.
[다른 움직임이 없는지 계속 살펴봐 주세요. 그리고 가등섭 쪽에서 양서평이나 조양회를 노리는지도 알아볼 수 있을까요?]
[확인하겠습니다, 회장님.]
문자를 보낸 천중명은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윤성일도 참!
죽으려면 혼자 죽지, 마지막 순간에 딸의 인생까지 저토록 깔끔하게 망치려 드는 건지.
평창동에서 종로로 이동하는 길이고 출근 시간이 지난 때여서 천중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집무실로 올라간 천중명을 부속실 직원들이 맞았다.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 연결해 주고, 커피 부탁해.”
“네, 회장님.”
천중명이 재킷을 걸고서 책상에 앉았을 때였다.
[회장님. 1번에 송문철 회장입니다.]
인터폰이 울렸다.
천중명은 수화기를 들고 1번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예, 회장님. 송문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하셨던 자료가 준비돼서 보고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지금 시간 되시면 들어오세요.”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결재판을 펼쳤다.
잠깐, 그런데 왜 윤병지에 관한 보고가 없지?
고개를 갸웃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황 선생님. 윤성일 회장이 윤병지 부회장을 완벽하게 제외한 건가요? 이런 일에 빼놓을 리가 없는데요?”
-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전에 통화가 있었습니다. 그 직후부터 윤병지 부회장은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건 무슨 상황이야?
- 특별한 임무를 맡은 게 아닌가 싶어서 확인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윤성일 회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무서워서 밖으로 도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천중명은 윤병지를 떠올렸다.
윤성일의 지시를 거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집에 못 들어갈 정도로 겁을 내면서 버텼다?
“알겠습니다. 계속 지켜봐 주세요.”
- 예,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결재판에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