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27화 (227/315)

# 227

227. 잘 가. 잘 살고. (1)

일정이 바쁜 하루였다.

오전 6시에 사무실에 도착한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화상회의가 준비된 회의실로 향했다. 스웨덴이 밤 10시였고, 뒤에 있는 천중명의 일정이 워낙 빡빡해서 지금 아니면 양쪽 모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천중명이 유진교와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정장 차림의 신상훈이 자세를 바로잡는 모습이 화면에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일이 많아서 잘 지내냐는 말도 못하겠네요.”

[지경리온자동차가 빠르게 안정을 찾는 것과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출근하는 것이 오히려 기쁩니다.]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총괄사장이 된 지 얼마 안 됐고, 급여가 꽤 올라서 아직까지 큰 불만은 없습니다. 말씀드리기 외람되지만, 스웨덴은 주말 근무를 죄악시하는 환경이어서 저는 그래도 주에 하루는 꼬박꼬박 쉬고 있습니다.]

의논을 앞두고 가볍게 대화를 나눌 때 부속실 직원이 들어와 천중명과 유진교의 앞에 커피를 놓아주었다.

“신상훈 사장. 이번 대송자동차의 엔진과 미션, 조향장치에서 결함이 발견되면 지경리온자동차의 안전기술을 접목할 생각입니다. 먼저 그쪽의 기술자를 파견하고, 다음으로 이쪽에서 인원을 선발해 연수를 보낼 테니 자세한 사항은 최만호 회장과 의논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반대로 편의장치들은 대송자동차의 기술을 지경리온자동차에 접목할 계획이니까 그 점도 최 회장과 의논해서 방법을 논의하고.”

[예, 회장님.]

먼저 해야 할 지시를 마친 다음이었다.

“오늘 화상회의를 하자고 한 건, 트럭 랠리에 열 명 정도의 인원을 동행시켰으면 해서인데 어때요? 그렇게 할 방법이 있을까?”

[회장님. 혹시 동행하려는 목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대송자동차도 앞으로는 다카르 랠리에 꾸준하게 참가할 계획이거든. 그러니 트럭 랠리를 따라가면서 사전 경험을 쌓으려는 거고, 중국의 거양자동차와 일본의 트럭의 수준도 검토하고. 뭐 그런 이유라고 합시다.”

신상훈은 호흡을 고르는 듯이 시간을 벌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눈치였다.

[회장님. 다카르랠리는 창시자가 랠리 도중에 사망했을 정도로 험난합니다. 헬리콥터와 의료팀이 따르긴 하지만,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고를 모두 대비할 수는 없습니다.]

신상훈의 보고를 들으며 천중명은 잔인한 인상의 가등섭을 떠올렸다.

[트럭 랠리는 또 산악지역과 진흙 코스를 포함하고 있어서 특히 위험합니다. 반드시 기본 이상의 체력을 갖춘 인원을 선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검색을 통해 알아본 내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체력과 근성만큼은 죽여주는 인간들이 건너갈 참이어서 신상훈이 말한 걱정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준에 맞춰 선발할 테니 먼저 참관인 방식으로 함께 이동하는 데 문제점이 없는지 확인해 주고, 안내를 맡아줄 랠리 경험이 있는 직원이나 드라이버를 준비해 줘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참관인들이 준비해야 할 물품과 예방접종, 그 외에 필요한 사항들을 정리해서 그룹발전본부로 발송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고개 숙여 인사한 신상훈이 화면 왼쪽을 바라본 뒤에 화상 연결이 끊겼다.

“회장님. 차라리 중국 측의 방해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상훈 사장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현지에서 말이 돌 경우, 중국의 생산과 판매 중단 조치에 반발해서 거양자동차를 음해했다고 오해받기 쉽습니다.“

유진교의 묵직한 표정으로 봐서 그 역시 같은 염려를 지니고 있었던 눈치였다.

새벽 회의가 없는 날이었다.

20분쯤 그룹 전반의 일들을 의논한 뒤에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본부장님. 오늘은 총수님 모시고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오전 결재 마치고 10시경 외출할 텐데 아마 오늘 못 들어올 확률이 높습니다.”

“전화 통화는 되십니까?”

“그야 물론이죠. 혹시 기다리실까 봐 알려드린 겁니다.”

“예, 그럼 회장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선 뒤에 천중명은 책상으로 움직여 자리에 앉았다. 아직 오전 7시가 안 된 시간이었으니 가만 보면 진짜 열심히 산다.

천중명은 픽 웃었다.

이 땅의 대다수 직장인과 가장들은 대개 천중명만큼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산다. 불행하게 타고난 환경에 따라 출발점이 달라서 수익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수익을 비교해서 다른 사람의 노력을 비난하거나 얕잡아 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알았어, 윤성일?

당신이 재벌이라고 해서 당신이나 당신 자식이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볼 권리는 없는 거라고.

천중명은 보고서를 펼치고 연필을 들었다.

**

평소보다 많은 조직원이 둘러싸고 있어서 양서평 주변의 분위기는 확실히 살벌했다.

“류효양이 저쪽에 붙었다고?”

“가등섭 부총재를 만난 뒤에 트럭 랠리에 참가 신청을 마쳤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양서평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매만졌다.

“미라클의 복제품이 강북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가등섭 부총재가 다음 분기의 메모리를 대만 회사에서 공급받기 위해 움직인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그 인간이 내 흉내를 내겠다?”

“이럴 때 한국을 한번 다녀오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의자에 앉은 양서평이 힐끔 옆에 서 있던 조양회를 보았다.

“지경그룹과 형님이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경그룹의 천중명 회장과 반격할 실마리를 찾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로? 지경리온자동차의 기술 이전을 거부했는데?”

“대송자동차가 있습니다.”

“판매가 중단됐잖아!”

거친 양서평의 반응에도 조양회는 물러서지 않았다.

“형님. 대송자동차와 지경리온자동차는 이제 한 몸입니다. 리온자동차의 판매망이 있으니 새로운 브랜드로 시작하겠다고 하고 공장과 판매망을 다시 움직이면 어떻겠습니까?”

힐끔.

조양회의 제안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면서도 양서평은 분명하게 관심을 보였다.

“트럭 랠리에서 유해물질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 차량을 중국에 들여오십시오. 정부에서 가장 고민하는 대기오염을 해결한 주인공이 되시는 겁니다.”

“흐음.”

잠시 눈알을 굴리던 양서평이 고개를 갸웃하며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야 얼마든지 그러고 싶지. 그런데 천 회장이 우리 말을 듣나? 지난번에도…….”

당시가 떠올랐는지 양서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형님 대의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이럴 때는 먼 미래를 위해 몸을 낮추시는 인내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양서평의 커다란 눈이 질책하듯 조양회를 향했다.

“천중명 회장은 용입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그 용의 등에 오르시는 일입니다. 유해물질이 없는 트럭으로 정부의 지원을 얻으면 가등섭 부총재를 뛰어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양 조양회가 적극적으로 설득하자 양서평이 커다란 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가등섭이 설칠 텐데…….”

“류효양에게 갑자기 트럭 랠리를 권한 것을 보면 가등섭 부총재가 직접 그곳에 가서 지경리온자동차의 트럭 운행을 방해할 게 분명합니다.”

양서평이 길게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느라 그는 조양회의 안도하는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

강갑수는 핼쑥한 얼굴로 나타났다.

우두머리와 대원들에게 인사를 마친 그는 믹스 커피를 들고 천상기가 굴을 까는 움막으로 들어왔다.

“왔어?”

짧은 칼을 내려놓고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난 천상기에게 강갑수는 웃는 낯으로 스테인리스 그릇을 내밀었다.

“얼굴이 그게 뭐야?”

“나보다 상기 씨가 더 안 좋은 거 같은데?”

“아냐. 나 잘 지냈어.”

둘이서 잔뜩 쌓인 굴 무더기 앞에 앉아서 그릇에 담긴 믹스 커피를 홀짝였다. 햇빛이 파고드는 움막에서 파도 소리 들으며 함께 마시는 커피였다. 백 마디 말보다 더 진한 감정이 둘 사이를 떠돌았다.

“상기 씨.”

커피를 막 마신 참이라 천상기는 겨우 시선만 주었다.

“어쩌면 오늘이나 내일 섬에서 나가게 될지 몰라.”

천상기는 멍한 얼굴이었다.

“형님이 그렇게 보고했나 봐. 상기 씨가 다시는 예전처럼 안 살 거라고. 마침 바깥에 우리가 할 일도 생겨서 아다리가 딱 맞았고.”

“그럼 갑수는?”

“우리는 일이 생겼다니까.”

씨익 웃는 강갑수의 표정을 보면서도 천상기는 웃지 못했다.

“명심해. 이게 마지막 기회야. 나같이 사는 놈이 상기 씨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땐……. 알지?”

말을 마친 강갑수는 커다랗게 숨을 내쉬고는 손을 뻗어 천상기가 들고 있던 그릇을 가져갔다.

“아버지 보내드리고 왔다는 말 들었지?”

끄덕끄덕.

“뭐 그런 얼굴을 해?”

재미있다는 투로 강갑수가 피식 웃었다.

“나가면 잘해 드려. 그리고 지금부터는 제대로 살아.”

“또 섬에 들어가는 일이야? 나 같은 놈 잡아서?”

일어선 강갑수를 붙드는 것처럼 천상기가 질문을 던졌다.

“힘든 일이라고 하던데? 울적했는데 잘 됐지 뭐. 있잖아. 상기 씨 만나서 좋았어. 형에게 못 해줬던 거 그나마 해준 거 같아서.”

말을 마친 강갑수가 강렬한 바다의 햇살을 향해 움막을 나섰다.

오늘 나가게 된다고?

지금 나가서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천상기는 멍하니 앉아서 움막의 입구로 보이는 바위와 자갈과 바다를 보았다.

**

승합차는 빠르게 달렸다.

운전석에 곽대출, 조수석에 장만섭이 앉았고, 뒷좌석에 천호득과 천중명이 앉았다. 송달순은 데려오지 않아서 그렇게 넷이 움직이는 길이었다.

집에서 나선 이후로 천호득은 말이 없었다.

생각이나 해봤나. 천호득의 긴장한 얼굴을.

떨리는 손을 잡아줄까 하다가 천중명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천상기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예상보다 시간도 너무 짧았다.

그러나 도깨비 대원들의 판단이라 믿고 가는 길이었다.

**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까지 천상기는 굴을 깠다.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속도가 조금 떨어지기는 했는데 그래도 목표했던 분량은 모두 해결했다.

펄럭!

“상기 씨! 저녁 먹자!”

안으로 들어왔던 강갑수가 손질된 굴 알갱이를 보고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내가 들어준다.”

그리고는 굴이 담겨 있는 넓적한 대야를 들고서 먼저 나갔다.

오늘의 저녁은 생선회와 굴, 전복, 매운탕이었다.

밥그릇을 든 천상기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아버지를 보내고 온 강갑수와 오늘이나 내일 천상기가 떠나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남자들이 평소와 전혀 변함없는 태도로 킬킬대고 있어서였다.

“야! 고기 좀 더 건져줘!”

굳이 달라진 게 있다면 우두머리가 매운탕에 담긴 우럭의 살코기를 천상기에게 더 챙겨주라고 말한 것 정도였다.

20분에 걸쳐 밥을 먹었고, 10분 만에 깔끔하게 정리했으며, 5분이 지나자 다들 스테인리스 그릇에 커피를 들었다.

하여간 뭘 하든 이 남자들은 번쩍번쩍 잘도 해치운다.

“푸른 물결 춤추는 그곳.”

해가 머리끝만 남겨놓은 해변에서 남자 한 명이 구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갈매기 떼 넘나들던 곳.”

천상기는 뭔가 복잡한 감정을 안고 커피를 홀짝였다.

“내 고향 집 오막살이가 황혼빛에 물들어 간다.”

잠잠한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남자의 노래면 충분했다.

잘 가라, 잘 살아라, 앞으론 절대 옛날처럼 그러지 마라, 이제 이별이다, 굳이 입으로 떠들지 않아도 구슬픈 음성의 노래면 충분했다.

천상기가 한 모금쯤 남은 커피를 털어 넣은 다음이었다.

강갑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 곳을 노려보았다.

“배가 옵니다.”

주섬주섬 남자들이 일어섰고, 그 중간에 천상기도 몸을 세웠다. 짙푸른 바다에 하얀 선을 그리며 제법 커다란 배가 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천상기는 먼저 우두머리를 보았다.

“왜? 떠나기 싫어?”

그래. 저렇게 나와줘야 감정이 안 남지.

이어서 천상기는 강갑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가. 잘 살고.’

갑자기 목이 턱 막혀서 천상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배는 천상기가 타고 왔던 것과 다르게 크고 빨라서 이미 섬 근처까지 와 있었다.

뿌우-웅! 뿌웅!

커다랗게 고동을 울린 배가 섬 근처에 와서는 앞쪽의 주둥이를 자갈밭에 내렸다.

“가봐, 상기 씨.”

강갑수의 권유를 들은 천상기가 홀린 사람처럼 배를 향해 걸었다.

휠체어가 보였고, 거기에 앉은 천호득과 천중명, 장만섭과 곽대출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각자각.

천상기는 자갈을 밟으며 배를 향해 걸었다.

휠체어에 앉은 천호득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직후에,

“흐으으.”

천상기는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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