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26화 (226/315)

# 226

226. 자신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합니다 (3)

근신하라는 지시에 따라 집에 있던 윤병지는 모처럼 책을 들고 서재에 있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전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지금의 윤병지가 그랬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됐을까?

정답은 아직 알 길이 없는데 분명한 것도 있었다.

윤성일의 오만함이 천중명을 건드려서 싸움이 시작되었고, 사자의 콧잔등이를 때린 하이에나처럼 목줄을 물렸다. 물론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송자동차그룹을 빼앗겼으니 윤성일은 적어도 몸통의 절반을 뜯긴 하이에나 꼴이었다.

“하아-!”

윤병지는 회한 가득한 숨을 뱉어냈다.

삼중 호텔 라운지에서 첫 번째 망신을 당했고, 허선영을 노렸을 때는 침대에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을 정도로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천중명에게 망신을 떤 것이 어디 윤병지 뿐이냐. 비자금의 30퍼센트를 건네줄 테니 나눠 먹자고 매달리던 윤성일의 그 비루하고 처참한 모습은 또 어쩌고.

생각이 비자금으로 달려갔던 윤병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천중명 회장은 그 비자금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함정에 빠질 수도 있을 텐데.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때 그의 전화가 울면서 액정에 ‘회장님’이란 글자를 올려놓았다. 휴대 전화기를 들면서 윤병지는 깨달았다. 이전만큼 윤성일이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윤병지입니다.”

- 뭐 하고 있어?

“책 읽고 있었습니다.”

윤성일의 부드러운 음성이 윤병지의 신경을 묘하게 긁었다.

- 오전에 세계가 미국으로 출발했다. 너도 준비해서 저녁에 미국으로 가.

비자금? 혹시 그걸 천중명 회장 몰래 건드리려고?

누군가 폐에 밀가루를 잔뜩 밀어 넣은 것처럼 지시를 들은 윤병지는 숨이 턱턱 막혔다.

- 항공편과 호텔을 예약했으니까 비서실에 확인하고 가서 지시를 기다려.

“비자금 때문이십니까?”

- 크흠.

질문이 불편했던지 윤성일은 못마땅한 숨소리를 먼저 토해냈다.

- 중국에서 가동을 중단시킨 공장과 판매회사를 사들일 계획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 돈을 찾는다고 해서 천중명이 다른 말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미 약속하신 일이잖습니까?”

- 어디에다 대고 감히! 다른 말 말고, 세계와 만나서 시킨 일이나 준비해.

윤병지는 답을 하지 못했다.

- 하늘이 주신 기회야.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달은 것도 있다. 세계와 네 앞으로 5조 원씩 돌려놓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회장님. 그렇게 하시면…….”

- 네놈의 의견은 필요 없어! 너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이를 꽉 깨문 윤병지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 뭐? 뭣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지금껏 시키시는 일을 해왔지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 허허! 허허허!

기가 찬 윤성일의 웃음이 건너왔다.

- 모자란 놈!

“뭐라고 하셔도 저는 못합니다.”

- 오냐! 네놈이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다만, 그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대송자동차를 찾아온 뒤에 보자.

거친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당장 문을 벌컥 열고 윤성일이 뛰어들 것처럼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박하사탕을 깨문 것처럼 후련한 맛도 있었다.

윤병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성일이 찾아올 것이 두려워서 근처의 카페에라도 나가 있을 생각이었다.

**

오전 일과를 마친 천중명은 삼성동의 벤처사업부에 들렀다.

먼저 직원들을 돌아보며 격려했고, 다음으로 곽대출의 방을 둘러보았으며, 이어서 그와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뭐냐, 이건?”

옥상에 올라간 천중명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사하는 김에 꾸몄습니다.”

등나무 덩굴이 감기기 좋은 사각 틀 안으로 나무 벤치를 놓았고, 주변에 제법 굵직한 나무를 심어놓아서 마치 작은 공원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재떨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보십시오.”

곽대출이 비를 피해 만든 나무틀을 열자 안에 커피포트와 컵, 그리고 몇 가지 종류의 차와 믹스 커피가 있었다.

“누구 아이디어냐? 네 머리로 이건 어려울 테고?”

농담이었다.

잘했다고 칭찬하기 뭐해서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곽대출은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주인영 과장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면서 심지어 주인영이 대단하지 않으냐는 표정까지 지었다.

“커피나 타.”

“예, 회장님.”

저렇게 순둥순둥한 곽대출이라니.

천중명은 곽대출과 커피를 놓고 마주 앉았다.

볕이 좋다는 생각, 서울에서는 참 오랜만이었다.

예상하지 못해서 더 그런지 모르겠는데 마치 공간을 훅 뛰어넘어 일상에서 벗어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벤처사업부에 쉬러 온 것은 아니니까.

천중명은 곽대출에게 조양회와의 통화 내용과 김준후에게 당부했던 일들을 알려주었다.

“윤성일 회장이 정말 그렇게 미련한 짓을 할까, 회장님?”

“내가 비자금을 욕심낸다고 믿으면 충분히 할만하지. 그룹 회장들을 보면서 느낀 게 있는데.”

곽대출이 궁금한 눈으로 천중명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인들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더라.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애쓴다는 핑계로 죄의식도 없고, 설사 걸려도 처벌받을 거라는 생각 따위 안 해. 여태 그렇게 해왔으니까.”

“도깨비 회장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윤성일 회장은 적당히 넘어갔겠지요?”

“글쎄. 그건 모르겠다.”

무겁게 한숨을 내쉰 곽대출이 시선을 들었다.

“랠리는 어떻게 합니까? 간다고 해도 트럭에 타기는 어려울 것 같고, 따로 따라가려면 적당한 핑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문제는 신상훈 총괄사장과 의논해본 뒤에 결정하자. 누군가 노린다고 말하기도 어려우니까 우리 쪽에서 사람을 파견하는 적당한 이유도 생각해야 하거든. 참! 도깨비 출신으로 모을 수 있겠어?”

“섬에 있는 놈들만 네 명에 여기 셋, 나까지 여덟 명입니다.”

하마터면 “너는 하지 말라는데 어떻게 그렇게 연결했냐?”라는 질문을 던질 뻔했다. 전에 그 질문을 했을 때 곽대출의 답이 “회장님은 참 순둥순둥하십니다.”였었다.

“섬에 있는 인원을 빼도 되겠어?”

“회장님이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벌써?”

의아해하는 천중명을 향해 곽대출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훈련생들이 바뀌는 데 꼭 열흘 걸리지 않습니까. 느낌은 반쯤 돌아섰다는데 그 정도면 섬에서 목적했던 건 대강 다 얻지 않았나 싶습니다.”

천중명은 잠시 컵을 들여다보며 천상기를 떠올렸다.

고통을 더 주고 싶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도 같은 모습을 보이면 남은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회장님.”

고민하는 천중명을 곽대출이 나직하게 불렀다.

“회장님이 한 것처럼 주 과장과 저도 조용하게 식을 올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나쁘지 않지. 주 과장과는 의논해 봤어?”

“예. 부모님께 슬쩍 운을 띄웠는데 나쁘지 않은 반응이랍니다.”

“잘 됐다. 뭐하면 여기서 해도 되겠다.”

“그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이놈이 이거, 옥상을 꾸민 이유가 이거 아냐?

의심스러운 천중명의 시선에 곽대출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주 과장 부모님은 뵀어?”

“가양동에서 고깃집을 하시는데 장사가 별로 신통치 않아서 힘든 눈치였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이상했는데 인사했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너 결혼해도 되겠냐? 힘도 없는데?”

“아, 진짜!”

툭 던진 농담에 나온 곽대출의 반응을 보며 천중명은 모처럼 통쾌하게 웃었다.

**

액자 뒤, 노트북 배터리 안쪽에 접고 또 접어서 넣는 비상금 따위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국내에서 자잘하게 사용할 몇백 억 정도의 비자금은 대개 통행료를 받아 해결한다. 부품을 납품받는 과정이나 제품을 공급할 때, 허울뿐인 회사를 중간에 세워서 이익금을 빼돌리는 방식이었다.

해외에서는 무조건 조세회피처의 페이퍼컴패니를 이용한다.

윤성일은 붉어진 이마 아래로 눈을 고약하게 뜨고서 아홉 개나 되는 페이퍼컴패니의 자료를 살폈다.

도대체 천중명은 비자금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아! 물론 페이퍼컴패니의 기록은 누구나 신청만 해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회사 이름으로 만든 법인계좌를 알려주는 곳은 없다. 괜히 조세회피처가 부르는 게 아니다.

세금 저렴하지, 법인계좌가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들었는지를 절대 알려주지 않아서 그곳에 돈을 넣는 게 아니냔 말이다.

천중명은 그걸 또 찾아냈다. 심지어 태블릿 PC에는 비자금을 조성한 방법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해두었다.

‘아무래도 병지 이놈이 수상하지!’

윤성일은 분노가 이는 만큼 마음이 급했다.

핵심 측근인 윤병지가 정보를 넘겼을 가능성이 높고, 다음으로 태블릿 PC를 건네받았다는 과정이 수상했다. 게다가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는 감히 지시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천중명에게 붙었던가, 아니면 마음이 변했던가.

그러고 보니 윤세계가 맞았을 때도 윤병지는 지켜보기만 했고, 멀쩡한 얼굴로 나타났었다.

“시간이 문젠데? 한 달 정도 기다리라고 했었지?”

마음 같으면 당장에라도 날아가서 법인 이름 바꾸고, 계좌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싶다만, 천중명이 눈치챌까 그게 무섭다. 그러니 우선 윤세계에게 사전 작업을 지시해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윤성일이 달려가 해결하는 게 좋았다.

윤성일은 탁상용 다이어리를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가등섭은 공장을 되팔 때까지 한 달 정도 기다리라고 했었다.

입술을 내민 채 고민하던 윤성일은 먼저 인터폰으로 손을 뻗었다.

“윤병지 부회장 이름으로 예약했던 저녁 비행기와 호텔을 취소해.”

[네, 회장님.]

일단 시간을 보낸다.

한 달쯤 지나서 계좌를 이전하면 천중명이 떠들어봐야 증거가 없어지는 거고, 반대로 그가 먼저 돈을 만지면 태블릿 PC의 자료를 바탕으로 협박했노라고 터트릴 각오도 있었다.

“그래! 기다리지. 그깟 한 달 얼마든지 기다려주지.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으냐, 천하에 건방진 놈!”

윤성일은 독한 눈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

곽대출과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지이이잉.

[회장님.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황성규의 문자가 있었다. 모처럼 나온 길이었다. 옥상의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천중명은 황성규의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벤처사업본부 옥상입니다.”

-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확실히 센스있는 황성규의 답이 있었다.

“황 선생을 이리 불렀다. 윤성일 회장이 중국의 가등섭과 연결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거든. 그 외에 몇 가지 더 듣고 싶은 것도 있고.”

“그 양반은 돈을 엄청 가져다 쓴 것치고는 너무 조용한 거 아니셔?”

“이번에 대송자동차그룹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준 것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쳐. 원래 목적이 거대자본의 공격을 막는 거라서 자꾸 일을 시킬 때마다 미안하기도 하고.”

둘이서 벤처사업부에 들어온 제안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황성규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회장님.”

편안한 차림의 황성규가 가방을 멘 채 고개를 숙였고, 이어서 곽대출과 인사를 나눴다.

“이 중에서 뭐가 좋으실까요?”

“커피가 좋겠습니다.”

나무틀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여준 곽대출이 커피를 타준 뒤에 아래로 내려갔다.

“지난번에는 정말 큰 도움 주셨어요. 고맙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리고 이거.”

황성규는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전원을 켠 다음 천중명에게 건네주었다.

“그 사진의 인물이 가등섭입니다. 넘기시면 사진이 좀 더 있습니다.”

천중명은 검지로 사진을 넘겼다.

산적 스타일인 양서평에 비해 가등섭은 선이 얇아 보이는 대신 잔인함을 타고난 인상이었다.

“그 뒤에 있는 통화목록이 윤성일 회장의 번호입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이 중국과의 통화이고, 거기에 있는 번호가 가등섭이 사용하는 휴대 전화번호인 것도 확인했습니다.”

결국, 윤성일은 진짜 죽는 거구나.

천중명은 입술에 힘을 준 채 통화 시간을 확인했다.

“윤성일 회장이 가등섭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뒷면에 가등섭의 통화목록을 따로 추려놓았습니다. 국회의원 정안규와 통화한 기록이 있습니다. 윤성일 회장이 그 직후에 통화한 것으로 봐서 정안규 의원이 두 사람을 연결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천수와 엮여서 그렇게 곤욕을 치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인간이라니, 하여간 사람은 진짜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대자본의 움직임은요?”

“테드 케블린을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모사드를 조심하느라 성과가 느리긴 하지만, 조만간 꼬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마친 황성규가 종이컵을 들고서 커피를 마셨다.

“회장님. 이번에 윤성일 회장의 비자금을 왜 그대로 두셨습니까? 리콜과 보상에 사용하실 계획이셨으면 제가 얼마든지 움직였을 텐데요.”

그런 뒤에 그는 양손에 종이컵을 든 자세로 조심스럽게 질문을 내놓았다.

“그 돈을 사용하기 전에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대송자동차그룹을 이뤄낸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반성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흘러가나 보네요.”

하늘을 힐끔 보았던 천중명은 황성규에게 시선을 주었다.

“돈에 잡아먹힌 모양이네요. 넘치는 사람이든, 부족한 사람이든, 삶의 목적이 돈이 된 순간 비슷한 잘못을 반복하고, 결과가 비참하다는 것을 빤히 보았을 텐데 말입니다.”

황성규는 씁쓸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돈이 그렇게 만드나 보죠? 많이 가진 것이 미덕인 것처럼 꼬드기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고, 더 가진 자를 부러워하게 하는 거요.”

“회장님은 아니시잖습니까?”

“나야 보너스로 사는 인생이니까요.”

황성규는 처음으로 천중명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긴, 그걸 알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기는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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