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225. 자신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합니다 (2)
근무가 끝난 허선영과 은서연, 두 사람을 운전기사가 청담동 와인바 앞에 내려준 다음이었다.
“제 이름으로 예약해 놓았습니다, 사모님. 저는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은 비서. 잠깐만 함께 들어가요.”
허선영은 뜻밖의 요구를 내놓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한가해 보이는 바에 세련미 넘치는 허선영과 어딘가 까칠해 보이는 은서연이 들어섰다.
“예쁘네요.”
“젊은 여성층에서 인기 있는 곳입니다.”
은서연이 예약자 이름을 말하자 깔끔한 복장의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허선영은 10만 원 하는 와인과 비스킷 안주를 주문했다.
“사실은 은 비서와 함께 마시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말도 있고요.”
허선영은 볼이 넓은 은서연의 잔에 먼저 와인을 따라주었다.
“나는 은 비서라고 부르는 거, 사모님이란 말도 싫어요. 공식적인 행사라면 몰라도 직원들 앞에서 특별하게 대우받는 게 불편하고요.”
자신의 잔을 채운 허선영이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알 거라고 믿어요. 어릴 적부터 가식적인 모습을 너무 봐서 그런지 난 형식이란 게 불편해요. 또, 회장님도 권위를 따지는 모습을 싫어하고. 마셔요.”
허선영이 잔을 들어서 권하자 은서연이 보조를 맞추는 정도 선에서 공손한 태도로 와인을 마셨다.
“회장님 알죠? 우리 둘이 있을 때는 라면도 끓여 먹고, 여태 살림하는 데 사람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늘 회장님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곽대출 본부장님 같은 분이 부러웠거든요. 언제고 의지할 누군가가 있는 거요.”
은서연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정말 아쉬운 걸 부탁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아픈 거, 힘든 거,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요. 남자와 하기 어려운 고민들 있잖아요. 난 은 비서와 그렇게 지내고 싶어요. 평소에는 서연 씨라고 부르면서요.”
잔을 바라보고 있던 은서연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들었다.
“지금껏 이렇게 말씀해주신 분을 뵙지 못해서 아마 제가 경직됐었나 봅니다. 또 편하게 대해주신다고 풀어지면 어쩌나 늘 긴장했던 면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대표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좋죠! 나도 서연 씨라고 부를게요.”
“네, 사모…. 대표님.”
이상한 대답에 둘이서 빵 터진 사람처럼 웃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리던데 수행비서 일이 힘들지 않아요? 자기 생활이 거의 없잖아요.”
“지원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습니다.”
“말투 좀 편하게 하면 어떨까요?”
“네, 대표님.”
그렇게 둘이서 와인을 비워가며 제법 오래 떠들었다.
“시간 괜찮으세요, 대표님?”
“회장님 오늘 늦으신데요.”
허선영은 모처럼 또래와 있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고, 은서연도 이렇게 나누는 대화가 반가운 얼굴이었다.
**
외딴 섬 달 밝은 밤에 바위에 홀로 앉아 천상기는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강갑수가 나가고 며칠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천상기는 굴을 제법 열심히 까서 이거저거 사 먹고도 22만 원의 목돈을 모았다.
쏴아아아-. 철벅! 쏴아아-. 철벅!
몰려온 파도가 바위에 부딪쳤다가 자갈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 천상기는 밥공기에 담긴 커피를 다 마셨다.
“뭐해? 잠이 안 와?”
그때 우두머리의 음성이 들리더니 고개를 돌린 순간에 훌쩍 바위 위로 올라왔다.
“좋다! 씨발!”
그는 천상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 먼바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저기….”
“뭐?”
“전화 한 통만 쓰면 안 될까?”
뜻밖의 요청을 들은 우두머리는 먼저 픽 웃었다.
“굴까는 소리하고 있네! 너 전화 쓰면 죽여야 돼. 그 조건으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다시 저기 멀리 있는 수평선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살 만하니까 딴생각이 든 건지, 아니면 우리가 잘해주니까 만만해 보인 건지는 모르겠는데 적당히 해. 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조차 못 할 테니까.”
주머니를 뒤진 우두머리가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서 삐뚤빼뚤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그런 뒤에 왼손으로 라이터를 감싸고는 불을 붙였다.
“후우-!”
달빛 아래에 쏟아진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잽싸게 어둠과 세상에 숨어들었다.
“다음번에는 나도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다.”
말을 마친 우두머리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자 곧바로 불꽃이 빨갛게 피어올랐다.
“갑수 아버님이 위험하다며?”
“그래서? 전화해서 병원비라도 도와주게?”
힐끔 시선만 돌렸던 우두머리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 너한테 그런 거 부탁하면 우리가 다 죽어.”
“말 안 나올 곳에 부탁할게!”
“씨발! 전에 몇천 억 있을 때 그렇게 좀 살지, 그땐 뭐하다가 이 지랄 돼서 느닷없이 착한 척해? 너! 네 아버지한테는 그렇게 했었냐? 꼴 보니까 지랄 맞게 굴었을 것 같은데?”
천상기는 대꾸하지 못했다.
“갑수 며칠 있다가 들어와. 아버님은 수술 받다 돌아가셨고.”
검지로 불똥을 툭 튀겨 담배를 끈 우두머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새끼도 이제 진짜 혼자네.”
답답했는지 담뱃갑을 다시 꺼냈던 우두머리가 빈 것을 확인하고는 와락 움켜쥐었다.
“내가 사람을 죽이려고 했었다.”
바위 위에 선 우두머리가 먼 곳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말을 꺼냈다.
“갑수 아버지가 좀 이상한 병에 걸려서 한 달 병원비가 겁나 나와요. 그 참에 어디서 이상한 일감이 하나 들어오더라고. 돈 많은 집 자식인데 처제하고 붙어먹은 개차반이니까 죽여 달라고.”
움찔한 천상기가 슬쩍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갑수 새끼가 지랄염병을 떨면서 말렸어. 그런 돈으로 아버지 살리면 자기가 못 살 거라고. 그 새끼, 나갈 때 이미 각오했었을 거야.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고개를 돌린 우두머리가 멍하니 앉아 있는 천상기를 내려다보았다.
쏴아아아-. 철벅! 쏴아아-. 철벅!
파도 소리, 달빛, 그리고 너울대는 파도가 전부인 세상이었다.
“갑수 오면 모른 척 대해줘. 그놈 형 먼저 보내고, 아버지에게 쏟은 정성 너는 모른다. 그리고 혹시 기회가 되면 너도 한 남기지 마. 몇천억 있어도 먼저 간 사람은 못 데려오니까.”
말을 마친 우두머리가 “어차!” 하고는 훌쩍 바위에서 뛰어내려서는 자갈을 밟으며 숙소로 향했다.
천상기는 바위에 외롭게 앉아 아까 우두머리가 보았던 먼 곳의 수평선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형?”
천봉서의 넙데데한 얼굴이 떠올라 천상기는 쓰게 웃었다.
‘그러네. 돈이 아무리 있어도 죽은 형을 살려올 수는 없는 거네.’
그러면서 천상기는 멍하니 용인의 그 좁은 방에서 욕을 퍼붓던 자신의 모습과 그때 서글프고 참담했던 천호득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나를 그래도 자식이라고…. 그래서….”
밥그릇을 든 손으로 다리를 껴안은 천상기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쏴아아아-. 철벅! 쏴아아-. 철벅!
천상기의 울음을 감춰주려는 것처럼 파도는 계속해서 바위를 때렸다.
**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천호득의 일과가 TV를 시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최만호 대송자동차그룹 회장이 오늘부터 생산 라인의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이번 생산 중단은 대송자동차의 문제점에 관해 조사를 마칠 때까지라고 발표해서 사실상 기한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기섭 기자. 굳이 생산을 중단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지경자동차그룹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습니까?]
[명칭은 주주총회가 열린 뒤에 정식으로 바뀝니다. 먼저 최만호 회장의 발표를 보시겠습니다.]
대송자동차 공장 내부를 보여주던 화면이 단상에 서 있는 최만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지경그룹발전본부는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온 해외 판매용과 내수용 차량의 품질 차이를 확인하고, 엔진과 동력전달장치, 그 외에 안전과 관련한 모든 사항을 점검할 예정입니다.]
최만호는 특유의 차가운 표정으로 발표문을 읽어 나갔다.
[이를 위해 대송자동차의 문제점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고 알려진 한유일 명장과 미국 쿠일리 자동차 연구소를 초빙하였습니다.]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대송자동차 노조는 오늘 긴급회의를 열어 생산이 중단된 기간에 받지 못하는 각종 수당을 어떻게 요구할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 기자. 그리고 중고차 시장에서 대송자동차가 갑자기 인기를 끌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대송자동차의 결함에 대해 적당한 금액으로 보상해줄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송자동차의 중고차 시세가 올랐고, 일부 차종은 품귀 현상까지 빚고 있습니다.]
천호득은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아예 줄였다.
오늘 이미 두 번이나 보았던 보도여서 윤성일 체제를 흠집 내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자극적인 보도를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리온자동차의 랠리 관련 보도를 기다리며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보면 좋았다.
궁금하다.
이건 또 어떻게 헤쳐 나갈지, 생산을 중단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묻고 싶고.
걱정도 한가득이었다.
거침없는 신임회장의 행보란 말에 담긴 의미가 대단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 안에 우려도 묻었다는 사실을 천호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참 희한해서 잘 나가는 사람을 보면 저 인간이 언제 넘어질까 하는 기대를 품는다.
천호득은 씁쓸하게 웃으며 서재의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옛날 같으면 당장 불러들여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계획도 들어보고 했으련만, 이제는 뒷방 늙은이가 돼서 보도를 통해 내용을 듣고 있었다.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어머니는 못난 자식이 가슴에 담기고, 아버지는 잘난 자식에 눈에 든다지 않든가. 신임회장만 보고 있으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달리는 걸 또 어떻게 하겠나.
공연히 입맛을 다신 천호득이 불 켜진 정원을 하릴없이 바라볼 때였다. 거짓말처럼 천중명이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에?
얼른 고개를 돌린 천호득이 시간을 확인하고 옷을 매만지는 순간에 바깥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방에 있지, 이 사람아.
내가 이 시간이면 서재에 있는 걸 몰라?
“제가 바로 들어갈게요. 저는 시원한 거 한 잔 주세요.”
이은명과 대화를 마친 뒤였다.
똑똑똑.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아버지. 저 왔습니다.”
“회장이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야?”
“아버지 뵙고 싶어서요.”
“흐헤헤헤. 얼른 들어와.”
천호득은 애써 만들었던 엄한 표정을 잊고는 휠체어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
윤세계는 부었다.
이건 정말 집에만 있어서 부은 거지, 살이 찐 게 아니다.
남들 보는 게 무서워서 그랬다.
잘 가던 미용실이니, 호텔 레스토랑이니, 백화점까지 당최 시선이 무서워 집에만 있었더니 눈꺼풀과 볼이 살찐 사람처럼 부었다.
거울을 들여다본 윤세계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청담동에 나가면 뒷골목에 줄줄이 서 있는 게 미용실인 세상이었다. 적당한 곳을 골라 머리부터 좀 만지고, 피부 관리하고, 다시 세상 속으로!
윤세계가 옷을 찾아 입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진동이 울리고 휴대 전화기 액정에 ‘회장님’이란 세 글자가 떠올랐다. 휴대 전화기를 양손에 쥐고 마음을 진정시킨 윤세계가 얼른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마음고생이 심했지?
세상에, 윤성일이 이렇게 자상하게 말을 건넨 게 얼마만인지 윤세계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 다른 생각 할 것 없다.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야. 알았지?
“예, 회장님.”
- 허허허.
인자한 웃음까지는 좀 오바인데?
눈물이 쏙 들어간 윤세계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 미국에 나가 있어. 좋은 일을 준비했는데 네가 좀 애써줘야겠다.
윤성일의 지시를 듣는 순간, 윤세계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불꽃처럼 피어나서 답을 하지 못했다.
- 항공편을 예약해 두었으니 내일 출발해.
이제 그만요! 그 정도면 됐잖아요!
혹시 천중명 회장에게 복수할 생각이면 제발 지금이라도 그만두세요!
윤세계의 본능이 그녀를 강하게 말리며 달려들었다.
- 왜 대답이 없어?
“예.”
본능이 그토록 말렸지만, 윤세계는 맥없이 답을 내놓았다.
- 네 인생이 바뀔 일이다.
윤성일의 마지막 말이 그녀는 정말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