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24화 (224/315)

# 224

224. 자신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합니다 (1)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5만 원짜리 지폐만 잃어버려도 종일 속이 쓰린 게 사람 심정인데 50조 원을 날렸다고 생각해 봐라. 그것도 한국에 묶인 돈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돈 50조 원을 말이다.

뉴욕의 빌딩 서너 개쯤 넉넉하게 매입할 돈이고, 그 빌딩이면 대대손손 임대료 수익만으로 떵떵거리며 살아갈 돈이 아니던가.

“우리 할아버지가 계시거든. 성자, 일자를 쓰시는데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

생각만 해도 명치 끝 뜨듯해지고, 자부심에 어깨가 천장에 닿을 그 돈을 홀랑 빼앗긴 윤성일은 삶의 의미와 함께 이성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주주의 이익?

별 병신 같은 소리를 다 들었다.

아니 못 먹은 놈이 멍청한 거지, 정직하게 산다고 누가 표창장을 주나, 아니면 세금을 깎아주길 하나.

천중명이 했던 주주의 이익이란 말이 윤성일에게는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소리만큼이나 기가 막히게 들렸다. 막말로 대송자동차니까 주가가 올라간 거고, 또 그만큼 주식을 산 사람들이 이익을 먹은 것 아니냔 말이다.

그렇게 분노를 이기지 못해 죽어가던 윤성일의 목에 사이다를 드럼통째 쏟아 붓는 소식이 들렸다.

“크하하하! 크하하하하하-!”

대송건설 집무실에 앉아 분통을 터트리던 윤성일은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화병으로 죽기 직전에 중국의 조치를 들었고, 그때부터 윤성일은 주유기 레버를 꽂은 자동차처럼 삶의 의욕이 서서히 차오르는 느낌도 받았다.

“역시 대국이야! 그래! 그게 맞지!”

속이, 속이 이렇게 후련할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 윤성일은 중국이 생산을 중단시킨 공장과 판매망을 되찾아 올 방법은 없을까 하고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천중명은 몸을 움츠릴 게 분명했다.

아무렴 중국이 안전 점검을 다시 하겠다는 마당에 자진해서 리콜을 터트릴 수 있겠나.

여기에 뭔가 묘수가 있을 것도 같은데?

윤성일은 손을 뻗어 인터폰을 눌렀다.

“우 실장 들어오라고 해.”

[네, 회장님.]

이제부터 방법을 만들어볼 참이었다. 중국과 연결해서 공장과 판매망을 찾아오는 것이 시작이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

천중명은 김준후의 번호를 찾았다.

홍콩물고기를 상대할 때 천호득이 소개해 주었던 사람인데 유진교, 최만호와는 달리 아직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다.

- 예, 회장님.

“통화 괜찮습니까?”

- 제가 드리고 싶었던 부탁입니다. 적대적 인수에 관해서 여쭙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회장님이 어떤 조건으로 윤성일 회장을 굴복시켰는지에 대해 이쪽 금융 회사들 사이에서 토론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결론이 어떻게 났나요?”

- 돈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불법적인 자금이 있었을 테고, 그걸 눈감아 주는 조건이 아니었나 결론 내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에 연락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해서요.”

- 불법적인 자금을 말씀하십니까?

미국에서 살아서인지, 성격이 그런 것인지 확실치는 않은데 김준후는 직선적인 느낌이었다.

천중명은 윤성일과의 협상에 관해 솔직하게 전해주었다.

- 후아-!

김준후의 첫 번째 반응은 질렸다는 느낌의 탄성이었다.

- 그러니까 비자금을 윤성일 회장에게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리콜과 보상에 사용하겠다고 하셨단 말씀이죠? 와, 이건 진짜!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좀 더 기다란 감상을 펼쳐놓았다.

- 그런 돈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시는 분이라니! 회장님, 정말 30퍼센트를 준다는 말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까?

“내 돈이 아니라 고객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니까요.”

- 와!

3절에 걸친 그의 놀라움이 마무리된 다음이었다.

- 제게 도움을 청하실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내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중국의 조치에 관해서는 들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번 조치로 윤성일 회장은 반드시 돌이키지 못할 선택을 할 것 같은데 그 준비를 할 생각입니다.”

천중명은 원하는 내용을 10분에 걸쳐 내놓았다.

- 자칫하면 그나마 쥐고 있는 것을 모두 날리고, 남은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는데 그렇게까지 할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윤성일 회장은 모든 일에 결과가 잘못되었을 때 비난할 대상을 먼저 정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이번 조치에 기댈 겁니다.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이 그렇게 돌아갔다고 믿을 테니까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우선 준비해 놓겠습니다. 만약 미국에 있는 비자금이 묶인다면 지경그룹의 유보금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리콜을 시행하실 겁니까?

“고객의 안전을 위협하는 결함을 비용 때문에 눈감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고객의 안전은 몇 조, 몇 십 조 원의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답을 들은 김준후는 나직한 숨소리를 먼저 들려주었다.

-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회장님. 그리고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기업인 중에 존경할 분이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통화는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끝으로 끝났다.

**

허선영은 결국 은서연에게 휴대 전화기를 맡기고 회사에서 지급하는 새 전화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 직후에 천중명을 비롯한 몇 명에게 번호를 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권위나 체면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허선영이었다. 그러나 천중명과의 결혼이 보도되고 나서 밀려드는 전화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3년, 5년은 양호한 편이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초등학교 동창생이 전화를 걸어서는 납품, 행사, 문화와 관련한 지원을 요구하는데 당최 업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 수준이어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여유를 되찾은 허선영이 디자인 시안에 집중할 때였다.

“사모님.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사극에 나오는 냉정하게 생긴 상궁 같은 태도로 은서연이 사기로 만든 컵을 내밀었다.

“나중에 먹을 테니 놔두세요.”

“명예회장님께서 직접 부탁하셔서 준비한 한약입니다.”

캑!

저 약을 어떻게 뒤로 미룰 수가 있겠나.

디자인 시안에서 고개를 든 허선영이 컵에 데워 온 한약을 마신 다음이었다.

“평창동 사모님께서 약을 드신 뒤에 드십사 하고 주신 편강입니다.”

은서연은 기다렸다는 듯 편강을 내밀었다.

허선영은 우선 편강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서연 씨.”

“은 비서라고 불러주십시오.”

“좋아요, 은 비서. 혹시 와인 마실 만한 적당한 장소 아는 곳 있어요? 너무 화려하거나 비싸지 않은 곳이었으면 싶어요.”

“약속 장소를 찾으십니까?”

“네. 단둘이 만나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만한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고개를 갸웃했던 은서연이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청담동에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사모님.”

“그럼 예약 부탁할게요. 두 사람이요.”

“예, 사모님.”

다행이란 표정을 보인 허선영이 디자인 시안에 시선을 주었다.

**

감이 딱 맞아 떨어질 때가 있는데 지금 천중명이 그랬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 전화기가 울면서 액정에 조양회의 이름이 올라온 것을 확인한 천중명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회장님. 조양회입니다. 먼저 대송자동차그룹을 인수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양서평 부총재께서도 안부와 인사를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마워, 조 비서.”

우선 건너온 안부 인사를 천중명은 넉넉한 음성으로 받았다.

- 회장님. 가등섭 부총재가 움직였습니다. 중국 내 공장의 생산과 판매를 금지를 내린 것 모두 가 부총재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거양자동차가 이번 트럭 랠리에 참가합니다.

“그렇게 된 거였네.”

윤성일이 움직일 것은 짐작했지만, 가등섭이란 존재와 거양자동차의 랠리 참가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 2인자의 위치가 흔들리는 사실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혹시 윤성일 회장이 그쪽과 연결하고 있나?”

- 그 점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보다는 가등섭이….

조양회는 가등섭의 직위를 뺀 채 이름만 불렀다가 아차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끼리는 그냥 그렇게 부르지?”

- 아닙니다, 회장님. 가등섭 부총재는 트럭 랠리에서 반드시 모종의 수를 쓸 인물입니다. 그리고 회장님께 개인적인 청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이지 숨 가쁘게 말을 전하던 조양회가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였다.

“혹시 양 부총재의 안전을 부탁하고 싶은 건가?”

천중명이 대강 짐작하는 내용을 꺼냈고,

- 그렇습니다, 회장님.

조양회가 순순히 받아들였다.

- 아직 가등섭 총재의 힘이 우위에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회장님께서 초대하셨다고 말하고 양 부총재를 한국으로 가시게 조치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회장님.

“조 비서는?”

- 제가 남아 있어야 양 부총재가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가등섭 쪽에서 눈치 채지 못합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참 어렵게들 산다 싶어서 천중명은 먼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더 할 말은?”

- 뜻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천중명의 질문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조양회의 답이 있었다.

“조 비서.”

- 예, 회장님.

“양서평 부총재에게 안부 전해줘. 그리 길게 걸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 알겠습니다, 회장님.

의미심장한 대화가 그렇게 끝났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바로 번호를 찾아 문자를 입력했다.

[윤성일 회장이 중국의 가등섭이란 인물과 접촉한 정황을 확인해 주세요.]

[네, 회장님.]

답은 바로 있었다.

문자를 확인한 천중명은 인터폰에 손을 뻗었다.

“지경증권 송문철 회장 연결 부탁해.”

[네, 회장님.]

사람 참, 그런 꼴을 당하고도 변하는 게 없다니.

[회장님. 2번에 전화 연결되었습니다.]

천중명은 수화기를 들고 내선 번호 2번을 눌렀다.

“여보세요?”

- 예, 회장님. 송문철입니다.

“대송그룹의 남은 계열사에 있는 윤성일 회장 지분을 확인하세요. 그리고 그보다 0.5퍼센트 이상 매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얼마인지를 뽑아주시고요.”

- 전 계열사를 말씀이시죠, 회장님.

“그렇습니다. 호텔을 잡을 필요는 없지만, 말이 나오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윤성일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5퍼센트의 지분도 확보하지 못한 그의 판단이 계열사 전체와 그에 속한 10만 명 이상의 삶을 결정한다. 그런데도 욕심에 사로잡혀 빤한 수를 내미는 그의 단순 무식함에 아예 질릴 지경이었다.

윤성일 회장님.

여기에서 한 번 더 잘못된 판단을 하면 대송이란 이름이 아예 사라지게 됩니다. 남는 것은커녕 정말 윤세계가 아르바이트를 뛰며 월세와 통신요금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될 것 같지만요.

나직하게 한숨을 뱉은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랠리를 위해 만날 사람이 있었다.

**

2차 테스트 역시 성공이었다.

비록 블루크루드의 생산단가가 리터당 6천7백 원 수준이어서 당장 제품화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청정에너지 테스트에서는 충분한 합격점을 얻은 결과였다.

전에 없이 기자들이 지경리온자동차로 몰려들었고, 2차 테스트의 결과를 확인한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총괄사장님!”

이제는 낯이 익은 미국 경제지 기자가 복도에서 마주친 신상훈을 불렀다.

“이번에 트럭 랠리에는 중국의 두 개 기업과 일본의 유명한 자동차 회사에서도 참가 신청을 냈습니다. 이게 지경의 영향 때문일까요?”

“글쎄요.”

신상훈은 어깨를 들썩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지경리온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합니다. 유해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완주, 그리고 우승,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총괄사장님은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흥미로운 표정으로 답을 기다리는 기자를 향해 신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리온자동차는 지금껏 세계 트럭 시장의 강자로 군림해왔습니다. 거기에 지경케미컬과 지경전자의 기술력이 더해졌으니 유해물질을 배출하지 않은 우승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우-! 그 정도로 확신하십니까?”

“기자님 성함이?”

“로버트 페이셔입니다.”

신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 지경그룹 회장님을 인터뷰해 보세요. 나와 우리 기술진이 왜 확신에 차 있는지 알게 될 겁니다.”

“본사 회장님이요?”

“리온자동차에 지경의 정신을 심어주셨거든요.”

“지경의 정신이 뭡니까?”

신상훈은 먼저 가볍게 웃었다.

“한마디로 표현이 잘 안 됩니다. 내가 엔진 개발에 필요한 개발비 2조 원을 신청했을 때, 그리고 이번 랠리에 유해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우승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회장님이 하신 질문이 있습니다.”

로버트 페이셔 기자가 신상훈의 말에 집중한 채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상훈 사장. 자신 있어요?”

기자의 고개가 갸웃한 순간이었다.

“합시다! 자신 있다면! 이게 회장님께서 주는 답이었고, 지경의 정신입니다. 손해를 두려워 말고, 자신 있다면 어떤 프로젝트든 도전해라. 뒤는 지경그룹과 내가 책임진다.”

말을 하면서 감동이 올라왔는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던 신상훈이 천천히 내뱉었다.

“우리는 우승 자신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합니다.”

마지막 말을 남긴 신상훈이 여유 있게 몸을 돌렸을 때 로버트 페이셔 기자는 퍼뜩 최면에서 깬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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