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222. 행동에는 책임도 따르는 법이니까 (1)
오전 회의를 마친 천중명은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결재와 보고서를 살폈다.
집무실 창밖으로 높다란 빌딩들이 줄줄이 서 있고, 그 사이로 연결된 도로에는 차들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가끔 보고서를 넘기는 때와 천중명이 연필로 메모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볼륨을 완전히 줄여놓은 TV처럼 천중명의 집무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천중명이 방심하거나 혹은 자만해서 게을러지는 순간에 지경그룹은 흐트러질 테고, 무섭고 냉혹한 현실에서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이익이 생기는 방향으로 머리를 향할 수밖에 없는 기업의 생리상 올라오는 보고서와 결재요청은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려주는 스승이요, 과제와 같았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경영 환경에서 각 계열사의 사업 방향과 대응을 살피고 나면 그룹 전체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답을 얻는 느낌이었다.
“회장님?”
서류에 집중하던 천중명은 책상 앞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시선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두 번이나 노크했는데 답이 없으셔서 들어왔습니다.”
“잘하셨어요. 무슨 일인가요?”
유진교는 들고 온 결재판을 먼저 앞에 놓아주었다.
“신상훈 리온자동차 총괄사장이 급한 보고를 전해왔습니다.”
“벌써 스웨덴에 도착했나 보네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어쩐지 일 중독자들만 모여서 살아가는 느낌이어서 천중명은 가볍게 웃으며 결재판을 펼쳤다.
기자들에게 발표할 내용이었다.
스웨덴어, 영어, 우리말의 순으로 작성된 세 부의 발표문을 천중명은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안에 들어가는 지경케미컬과 지경전자의 명칭과 천중명의 이름을 검토해서 허가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스웨덴어를 몰라서 그런데 그쪽 말로 작성된 발표문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셨나요?”
“예, 회장님. 보내준 영어발표문까지 확인한 결과 표현이나 단어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내 이름은 빼는 게 좋겠는데 어떠세요?”
“그렇지 않아도 신상훈 사장과 통화했습니다. 스웨덴 현지 직원들과 연구소장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천중명은 눈썹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부를 원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경계할 부분이었다.
이번을 시작으로 계열사마다 프로젝트 발표에 ‘위대하신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이라고 떠들 우려도 있었다. 다만, 새로 인수한 회사의 총괄사장이 직원들과 간부들이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점을 고려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이번은 허락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때 천중명의 고민을 눈치챈 것처럼 유진교의 굵직한 조언이 있었다.
“랠리에 참가하는 트럭을 바꾼 이유가 회장님께 감동을 드리고 싶다는 그쪽 직원들의 열망에서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이번만큼은 성의를 받아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선을 든 천중명에게 유진교가 덧붙여준 설명이었다.
“본부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그렇게 하죠.”
사가각. 사각. 사가각.
천중명은 만년필을 들어 오른쪽 위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발표는 우리 시간으로 오늘 오후 5시쯤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최만호 실장이 아래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많이 허전하네요. 곽 이사도 벤처사업부로 나갔고. 본부장님은 절대 계열사에 보내드리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고개 숙인 유진교가 집무실을 나섰다.
하루를 일찍 시작한 덕분에 점심까지 서류를 살필 시간이 아직 한 시간쯤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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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의 옆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보며 곽대출은 “후!”하고 숨을 위로 뿜어서 이마에 쏟아진 머리칼을 들썩였다.
영어단어 죽어라 외웠다.
보고서 작성을 위해 엑셀과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도 익혔다. 그랬는데 느닷없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을 알아야 이해 가능한 사업계획서가 쌓여 있으니 독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주인영이 센스 있게 특허를 받은 것과 아닌 것을 분류해 놓았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손도운 개발자의 영향을 받았는지 발효 곰팡이를 이용한 제품부터 생전 처음 보는 열매와 잎을 이용한다는 화장품 계획서가 줄줄이 쌓였다.
스킨과 로션도 귀찮아서 하나로 섞인 놈을 바르는 곽대출이었다. 그런 그가 링클 케어니 눈가 주름개선제니 하는 이름의 신제품을 이해하려면 도대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후우-!”
곽대출은 또다시 한숨을 쏟아냈다.
화장품이야 주인영의 도움을 받는다고 치자.
레이저 스캔 도어락의 구조와 원리를 살필 때는 머리에서 뜨끈한 열기가 푹푹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해당 계열사에 보내서 평가를 듣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에 곽대출은 천중명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함께 다니며 힘을 실어주면 계열사에서 무시당하는 일이 적지 않겠느냐는 말뜻을 실감했다.
“해야지!”
아무렴 이따위 힘겨움쯤 이겨내야 나중에 천중명의 힘이 되어주지 않겠나. 곽대출이란 별것 아닌 인간을 품고서, 계열사 임원들을 찾아갈 때 천중명의 심정을 안다면 어떻게 이런 일에 지쳐 할 수 있겠냐 말이다.
알아야 계열사에 기본적인 것이라도 설명할 테고, 그들이 하는 의견을 이해할 일이었다.
곽대출은 모니터에 포털을 띄워놓고 주인영이 분류한 첫 번째 사업계획서를 펼쳤다. 그런 뒤에 연필을 집어 들었다.
서류를 살필 때 천중명 회장은 노크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소문쯤 발전본부에서 몇 번이나 들었다.
“어디.”
곽대출은 첫 줄에서 콱 막혔다.
탁탁탁. 탁탁.
세상 좋아졌다. 키보드만 누르면 모르는 단어에 관한 설명이 주르륵 모니터에 뜨니까.
곽대출 벤처사업부 본부장의 업무 첫날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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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리온자동차 신상훈의 보도자료를 확인한 내외신 기자들이 잔뜩 발표회장으로 몰려들었다.
신상훈은 파크 피터슨과 함께 나와 앞쪽의 기다란 테이블에 함께 앉았다.
“먼저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기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경리온자동차는 약 20일 뒤에 있을 트럭 랠리에 지금까지 없었던 차세대 트럭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신상훈은 먼저 우리말로 발표문을 읽었고, 유창한 스웨덴어로 다시 한 번 같은 내용을 전했다.
“지경리온자동차는 지경케미컬이 생산하는 블루크루드, 지경전자의 배터리를 이용해 유해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 새로운 트럭으로 참가할 것이며, 랠리의 챔피언이 될 것입니다.”
“우-.”
야유가 아니라 놀라움을 금치 못한 기자들의 탄성이었다.
“새로운 엔진 개발에 2조 원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하고, 이번 도전을 허가해 주신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님께 지경리온자동차의 모든 임직원이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다음은 파크 피터슨 연구소장의 말이 있겠습니다.”
신상훈이 고개를 돌리자 옆에 앉아 있던 파크 피터슨이 마이크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이번 도전은 리온자동차의 기술에 지경그룹의 기술을 접목하겠다는 우리의 의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경리온으로 확실하게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스웨덴어로 발표한 파크 피터슨이 시선을 주면 신상훈이 우리말로 다시 내용을 전했다.
“우리는 우승을 회장님께 선물하겠다는 열의에 차 있습니다. 한국과 지경그룹, 그리고 천중명 회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신상훈이 우리말로 전하고 나자 기자들의 질문이 줄을 이었다. 한국 기자들이 많지 않았는데 질문은 영어와 스웨덴어, 답은 스웨덴어와 우리말로 반복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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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수의 말대로 저녁부터 몸이 떨리던 천상기는 잠자리에 누운 뒤부터 제대로 몸살 기운에 시달렸다. 뼈마디마다 찬바람이 휭휭 불 정도로 몸뚱이가 떨리는데 열은 또 펄펄 끓어올랐다.
“흐햐햐햐. 흐햐햐. 흐햐햐햐.”
이렇게 물놀이 한번 해보고 천상기의 인생 끝나는구나 싶을 때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꿈결에서 들리는 것처럼 강갑수의 음성이 들리더니 모포 위쪽으로 손이 들어와 천상기의 이마를 짚었다.
“상기 씨! 일어나! 일어나서 약 먹고 자!”
천상기를 억지로 일으킨 강갑수는 조제된 약 두 봉과 물을 먹여 주었다. 그런 뒤에 그는 맨바닥에 고무판 하나 깔고 누운 천상기의 잠자리에 두꺼운 담요를 깔아주었고, 뜨거운 물을 담은 페트병을 양말에 싸서 세 개나 넣어주었다.
“열이 나면 체온을 식히라고 하는데 이런 몸살은 차라리 약 먹고 땀 쭉 빼는 게 빨리 나아.”
천상기는 강갑수가 넣어준 페트병을 안고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흐햐햐햐. 흐햐햐햐.”
해괴한 신음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 직후에 모포 위에서 강갑수가 천상기의 다리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저 손길이 고맙다. 사람 마음과 배려가 이렇게 고마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약 기운이 팽팽 돌고, 한기가 누그러지면서 천상기는 잠에 빠져들었다.
파도 소리와 훅하고 감은 눈 위로 달려드는 빛줄기에 천상기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좀 어때?”
“흐으. 그나마 좀 나아.”
“일어나. 이거 먹고 그 뒤에 약 먹자.”
“끄응.”
몸을 일으키는 천상기를 부축한 강갑수가 그의 앞에 양은냄비와 수저, 그리고 물을 놓아주었다.
전복을 굵직하게 썰어 넣은 전복죽이었다.
“갑수 씨는 먹었어?”
힘겹게 고개를 든 천상기를 보며 강갑수가 정말 크게 웃었다.
“왜?”
“상기 씨가 다른 사람 먹었냐고 물어본 게 처음이라 그랬다.”
“내가?”
“그래! 뭘 먹든 다른 사람 거 챙긴 적 없었거든. 먹어보란 소리도 없었고.”
“그야….”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말을 하려던 천상기가 입을 닫았다.
며칠 전부터 봉지 커피를 몇 번이나 얻어 마셨으면서 건네 준 사람에게 마셨느냐는 질문 한 번 해본 적은 없었다.
“얼른 먹어.”
“고마워.”
천상기의 어깨를 다독여준 강갑수가 천막을 나섰다.
사람 사는 거 정말 별거 없는데….
이왕 줄 거 김치까지 좀 주지.
천상기는 아쉬움을 달래며 열심히 전복죽을 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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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지나며 대송자동차의 정상화 방안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우선 등기 임원의 임명과 법인명 변경을 위한 주주총회 일정을 잡았고, 그 뒤에 리콜의 범위까지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 완성되었다.
그런 지경그룹의 방침에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리콜 주무부서에서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리콜을 명령하지 않았던 과실을 책임질 방법을 강구한 뒤에 시행했으면 한다는 의견입니다.”
정부와 해당 내용을 조율하던 최만호의 보고였다.
“지경이 인수하기 무섭게 리콜이 나온다면, 그동안 대송이 결함을 숨겼든가, 아니면 주무부처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비난에 휩싸일 텐데 그 점에 관한 의견을 분명하게 밝힌 뒤에 리콜을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전해 듣는 천중명이 기가 막힐 지경이니 직접 내용을 들었던 최만호야 오죽했을까.
“방법은요?”
“규정상 문제는 없으나 새롭게 출발하는 지경자동차의 의지를 보이는 차원에서 하는 리콜로 규정할까 합니다. 그리고 회장님.”
말끝에 최만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엔진과 동력계통만이 아니라 핸들 연결 부위, 그리고 오동작 측정에도 문제가 있다는 의견입니다.”
“리콜을 해야 할 수준인가요?”
“리온자동차의 기술진이 들어와 함께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문제로 지적된 부분이 사실로 드러나면 이 역시 리콜의 대상입니다.”
“후-. 대송은 어떻게 차를 만들었길래 이 모양인지 가늠도 안 되네요.”
그 뒤로 대략 한 시간가량 밴드사의 제품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안에 관한 논의가 계속 이어졌다. 오전 6시에 시작한 회의는 아침을 먹으며 이어졌고, 세 시간 뒤인 오전 9시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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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사람이 뛰어나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사채업자였던 박승양이 제2금융권의 큰손으로 다시 태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저축은행이라는 것이 또 그렇다.
통장에 돈 많이 꽂아주는 사람이 VIP여서 그렇게 분류된 사람 말 한마디면 직원 한둘 입사시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우받는다.
“커흠.”
저축은행 세 개와 대부업체 네 개를 손에 거머쥔 박승양의 하루는 결재로 시작됐다.
한알저축은행의 회장실에 떡하니 앉아 상무가 된 김도정이 올리는 세 개 저축은행의 결재를 살피는 일이었다.
오전을 그렇게 마친 박승양은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일과처럼 남부증권에 들러 문요양 회장과 차를 마신 뒤에 다시 이명선에게 들러 수익을 점검하며 하루를 마쳤다.
뭔가 깨끗해진 삶이었는데 반대로 박승양은 수익이 모두 드러나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급여는 말할 것도 없고, 임대수익과 이명선이 계좌에서 벌어들이는 수익까지 합산해서 세금을 낸다. 그것뿐이냐. 의료보험, 국민연금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앉을 지경이었다.
오늘도 박승양은 점심을 먹고 난 뒤에 문요양 남부증권 회장의 사무실에서 커피를 앞에 두었다.
“적당한 금융기관이 있으면 다리 좀 놔.”
“저축은행을 세 개나 가지고 계시면서 아직도 부족하십니까?”
“어허! 천중명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일 아닌가. 반드시 뭔가 있어! 내가 말이지, 저축은행을 돌 때면 진한 돈 냄새가 풀풀 풍기거든.”
“그야 현찰이 많으니까….”
“이렇게! 이렇게! 그걸 누가 몰라? 그런 냄새가 아니라 감당하지 못할 돈이 들어올 냄새라니까. 이건 조 단위의 싸움이 아니야.”
“예.”
아직 그런 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문요양은 그저 장단만 맞출 뿐이었다.